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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의 기업과 권리 (느 2:7-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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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기업과 권리 (느 2:7-10, 18-20)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는 국가적 사업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만을 자기 사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과거에 경부고속도로를 제일 처음 건설할 때에 아예 도로 바닥에 드러누워서 반대했던 '전직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영종도에 국제공항을 건립할 때도 무슨 환경문제 운운하면서 극구 반대했던 국회의원들이 수두룩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 스스로 시작했던 'FTA'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까지도 이제 와서는 무슨 나라를 망칠 일이라고 비난하면서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매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소리만 들었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금 전국 곳곳을 이어주는 온갖 고속도로들 대신에 여전히 국도를 덜컹거리면서 다니고 있을 것이고, 6, 7년 째 전 세계 1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의 편리함도 누리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반대자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특히 선구자들에게는 그런 반대자들이 더욱 많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안 해 본 일, 남은 위험하다고만 생각하는 일, 남은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는 일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앞장섰던 느헤미야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연 선구자적인 신앙인답게 그런 반대 때문에 약해지거나 물러서지 않았으며, 끝내 그 시작했던 '선한 일'을 완수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요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성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에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마귀의 방해공작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본문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선구자적인 신자는 자신이 계획하는 일에 반대하는 대적이 나타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부흥케 할 선한 사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7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7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9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하여 바사 왕 아닥사스다로부터 특별 휴가를 위시하여 통행권 보장 및 자재 조달에 대한 지원까지 받게 된 느헤미야는 이윽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예루살렘 귀환은 바벨론 포로지에 살던 한 평범한 백성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바사 제국의 왕의 측근으로 있는 고위관리답게 "군대 장관과 마병"이 호위하며 가는 대단한 행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만약 무슨 국가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바로 자기 집 앞길로 삼군 의장대가 절도 있게 행군을 하거나 기갑부대의 야전 훈련이 있어서 자주포나 탱크들이 지축을 울리면서 지나간다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밖을 내다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군대 장관'의 지휘 하에 완전군장을 갖춘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행진하고 '마병'들이 위엄 있게 호위하면서 나아가는 장면이란 당시의 민간인들에게도 평소에 보기 드문 아주 좋은 구경거리였을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행렬이 느헤미야가 바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까지 오는 동안 3개월 이상 계속되었을 것이니, 그 소식은 그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도달하게 될 즈음 즉 유브라데 강 서편 지역으로 진입할 즈음에는 이미 유다 지역에까지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귀환 소식에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당시 사마리아 지방의 통치자였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지방의 통치자였던 "도비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종 되었던 암몬 사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암몬 지역의 신하'라는 뜻으로서 도비야가 암몬 지역에서 어떤 고위 관직에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이 두 이방 지역의 정치인들은 바사 제국에서 '왕의 술 관원'을 하던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심히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근심하다'라는 말은 '걱정하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매우 언짢게 여기고 기분 나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산발랏과 도비야란 자는 도대체 왜 느헤미야의 귀환 소식을 듣고 그렇게 근심하게 되었습니까?
본문을 다시 보시면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 당장 그와 같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느헤미야가 그 두 사람에게 자신의 귀환 목적을 알려 준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그들은 전형적인 정치꾼들답게 이 느헤미야라는 인물이 바사 제국에서 왕의 측근에 있던 자리까지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뭔가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정확하게 추측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이나 유다 지역은 자기네의 관할 지역이 아닌데 왜 '이스라엘의 흥왕'을 두고 그렇게 견제를 시작했던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만약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이스라엘이 국력을 회복하게 되면 바로 이 두 사람이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을 오가는 중요한 통상로의 요충지에 있었습니다.
  
인류의 4대 문명 발생지 중에서 두 곳이 바로 예루살렘 성을 그 중간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두 문명 지역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질 때에는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예루살렘 성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도시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면 그 곳을 거쳐 지나다니는 비즈니스맨들을 대상으로 요식업이나 숙박업을 통해 돈을 벌 수도 있고 혹은 융자나 환전을 해 주면서 이윤을 남길 수도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후에는 그런 이득이 사마리아와 암몬 지역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장사꾼들이 이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지나다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음식점이나 숙소 하나조차 없는 것은 고사하고 강도당할 위험까지 있는 그 지역을 굳이 찾아갈 이유가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 무역상들은 자연히 유다 대신에 바로 곁에 있던 사마리아나 암몬 지역을 경유하게 되었고, 사마리아와 암몬은 바로 그 덕분에 옛날 예루살렘이 누리던 부를 자기네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을 부흥시키려는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산발랏과 도비야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마리아와 암몬을 다스리고 있던 그 두 사람은 속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예루살렘이 망한 덕에 재미를 톡톡히 보던 참이었는데, 이제 그 재미가 사라지게 될 위험이 닥치게 되었으니 당연히 기분이 나빠지면서 근심에 빠졌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고 시작하려 할 때 반드시 반대자들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흥왕하게 되면 그것은 사단에게 반드시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능력을 얻게 되면 될수록 원수 마귀는 상대적으로 그 입지가 줄어들게 되고 활동에 차질을 빚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선구자적인 신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마음을 뭉치고 어떤 선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 누구보다도 사단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일을 계획해 놓고 시작하려 할 때 반대자가 일어서고 방해꾼이 나타난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지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아, 우리가 하려는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구나. 그러니 사단이 이처럼 당장 근심하면서 달려드는구나.'라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회에서 무슨 사업을 결의하고 실행하려 하는데 그 첫 단계에서부터 뭔가 일이 꼬이는 것처럼 보일 때, '아이고, 이 사업은 벌써부터 안 될 징조가 훤하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렇게 빨리 마귀가 반응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 교회를 부흥하게 만들 진짜 선한 일이구나."라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선구자적인 신자가 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수준에서 놀 줄 알아야 합니다.
원수 마귀의 궤계를 그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훤히 꿰뚫어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각자가 소속된 봉사 기관들을 통하여, 또한 여러분들이 특별회원이나 임원이 되어서 섬기고 있는 '예수 세계화 운동'의 여러 사업들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고 시작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반대 의견이 술렁대고 방해되는 사건들도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럴 때일수록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고 원수 사단에게 손해와 타격을 주게 될' 선하고 의로운 필수과업임을 확신하면서 더욱 힘차게 추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선구자적인 신자는 자신이 충성하는 일을 비난하는 원수가 나타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축복의 사명'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18절 이하 20절의 말씀에 "18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19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20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대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먼저 성벽의 파손 상태를 몸소 시찰해 본 후에 방백들과 백성들을 불러 놓고 '이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진 채로 방치해 두는 것은 실로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선한 손"이 지금까지 자기를 어떻게 도우셨으며 그 결과 아닥사스다 왕이 자기에게 "이른 말씀" 즉 성벽 재건 공사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한 말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 유다 백성들은 "일어나 건축하자"라고 외치면서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 직후에 또 무슨 일이 따라왔습니까?
그것은 앞에 나왔던 두 사람 곧 "산발랏"과 "도비야"와 함께 이제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라는 자까지 가세해서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을 두고 "업신여기며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암몬과 마찬가지로 "아라비아" 역시 예루살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었으므로 그 세 사람의 이해관계는 일치했으며 따라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 대한 반감 역시 일맥상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느헤미야가 하려는 일을 두고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라고, 즉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바사 왕에 대한 반역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모함을 하면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선구자가 무언가 하나님의 일에 착수하고 그 손발이 바빠지기 시작하면 원수의 조롱과 비방도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야 누가 조롱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신자가 주변의 불신 이웃들을 향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부지런히 전도를 하면, "하! 교회에 나가 봐도 별 수 없던데 뭘."이라는 비웃음을 여지없이 듣게 됩니다.
  
'교회가 너무 많다.'라는 불신사회의 여론에 밀려서 개척교회를 세울 생각조차 아예 하지 않으면 물론 욕을 먹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명감에 찬 젊은 목사가 담대하게 나아가서 빌딩 한 칸을 월세로 얻어 교회 간판을 내걸고 개척을 시작하면, 그 주위에서는 "흥! 그 흔한 교회가 또 하나 더 생겼구나."라고 코웃음 치는 소리가 틀림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그런 '업신여김'과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는 실로 기뻐하시는 일인 것을 선구자적인 신자는 꼭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그런 원수의 비난을 어떻게 이겨내었습니까?
그는 우선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원수들이 느헤미야에게 "너희들이 바사 왕을 배반하려고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모함해 왔을 때, 사실 느헤미야는 "나는 이 예루살렘 재건에 대하여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정식 허락을 받고 온 사람이다."라고 떳떳이 대꾸해 줄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대신에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은 세상 군주의 허락 하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사업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이 일을 하는 것이고 너희들이 아무리 비웃고 방해를 놓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케' 해 주실 것이다."라고 훨씬 더 강력한 카운터펀치를 그들에게 날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느헤미야는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명록'이라고 번역된 말은 '역사적으로 그 후손들까지 두고두고 누리게 될 축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의 이 대답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함으로써 앞으로 완성될 예루살렘을 통해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될 것이지만, 너희들은 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 사업에 전혀 동참하지 않고 방해만 하는 자들이니 그 성이 완성된 후에 받게 될 기업의 몫에 대해서도 당연히 아무 특권도 돌아갈 것이 없고 무슨 권리 행사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루살렘을 통해 앞으로 누리게 될 축복의 상에 너희들은 숟가락도 올릴 수 없다.'라는 말로서, 실로 너무나도 멋있는 결정타 한방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선구자는 원수가 비웃고 비난하고 대적해 올 때 이처럼 당당하게 응수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따위 비난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생애 최고와 전부를 바쳐서 충성하고자 하는 헌신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허튼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신자와 교회를 매도하는 자들은 우리가 확신하며 소망하고 있는 미래의 '예루살렘의 기업'에 대해서는 아무 권리도 없는 '마귀의 자녀'들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하는 일을 두고 도대체 왜 불신언론들이 제멋대로 비판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정성과 힘을 다 바쳐서 자기네 예배당을 아름답고 크게 짓는 일을 두고 왜 불신자들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하는지 정말 저로서는 '웃기는' 일입니다.
누가 자기네들 보고 교회 일을 위해서 기부해 달라고 했습니까?
성전건축을 무슨 자기네들이 낸 세금에서 나오는 국가 보조금으로 짓기나 합니까?
불신자들은 기독신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나누는 예배의 은혜, 성도 교제의 기쁨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교인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선한 봉사를 위하여 헌금을 바침으로써 누리게 되는 더 큰 축복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도대체 뭐가 배가 아픈지, '교회가 왜 예배당을 크게 짓는 일에만 돈을 쏟아 붓고 구제나 사회사업에는 힘쓰지 않느냐?'라고 제멋대로 험담을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깐 언급했었지만 이 강서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계획을 비난하고 도저히 안 될 일이라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처럼 이 '선한 일'에 동참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우리 경향교회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엄청난 축복에도 결국 아무 '기업'도 '권리'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들의 후손까지도 이 경향교회의 자자손손 수천 대가 지금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 더 크게 누리게 될 축복에 대해서도 아무 '명록'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큰 일을 시작하다가 반대자나 원수로부터 조롱과 방해를 받게 될 때 절대로 구차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은 교회와 성도를 아무리 우습게 여기고 깔보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기고자 하는 이 일을 반드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향교회를 통하여 미래에 반드시 받게 될 축복은 당신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우리와 경향의 후손들만의 기업이 될 것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응수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통하여 온갖 '선한 일'들을 위하여 충성하는 중에 비난이 쏟아지거나 핍박이 덮쳐 오게 되면, 바로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반드시 축복하실 가장 소중한 우리만의 기업인 것을 확신하면서 더욱 자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추진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려고' 유다로 귀환했을 때 거기에 제일 처음으로 반응을 나타낸 사람은 그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협조자가 아니라 그 일을 언짢게 여기는 대적들이었습니다.
온 유다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마음을 합하고 '이 선한 일을 하려' 했을 때 즉각 따라온 일은 무슨 만사형통의 징조가 아니라 그 원수들의 조롱과 비난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단 역시 여전히 이 세상 임금 노릇을 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모으고 큰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 순간 즉시 원수 마귀들이 제일 먼저 우리를 대적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처럼 우리의 하는 일에 대하여 '근심하는' 원수가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옳은 일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사업을 작정한 후에 채 '한 삽'도 뜨기 전에 우리를 비판하며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우리는 우리가 하려고 하는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미래에 반드시 크게 축복하실 우리만의 소중한 기업임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기자들에게는 가끔 협박편지가 날아드는데, 그 중에는 그 기자를 '죽이겠다는 위협'(death threat)이 담긴 편지도 있습니다.
겁쟁이 기자는 그런 편지를 받으면 당장 기가 죽고 주눅이 들어서 그 후로는 기사를 소신껏 쓰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짜 사명감 있는 기자들은 그런 협박 편지를 받게 되는 것을 두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로 여기면서, '죽인다는 위협받을 만큼 올바른 기사를 썼으니 정말 이제부터는 당신도 기자다운 기자로 인정받은 셈이오.'라고 서로 축하까지 나누는 것입니다.

선구자적인 신앙인, 선구자적인 사명인은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 일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두고 누가 비웃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으며,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는 교인을 두고 어떤 불신자가 무슨 언짢은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저 주일이나 겨우 지키면서 '얌전한' 신앙생활을 하고 그저 교회 예산이 돌아가는 한도 내에서 만족하면서 '평안한' 교회생활만 해 나간다면 우리를 욕할 사람도, 우리를 방해할 원수도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열심을 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상황은 틀림없이 180도로 반전될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당장 반응을 하면서 기분 나빠하고 신경전을 걸기 시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정식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면서 공공연히 비난하고 결국에 가서는 집요한 반대와 끈질긴 방해공작까지 반드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구자적인 신자는 그런 원수의 등장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축복의 경주를 달음질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비난과 방해를 받는 것이야말로 그 성도가 이제 본격적으로 '신자다운 신자'가 되었으며 그 교회가 진정 '전투하는 지상교회'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증해 주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섬기는 길에 조롱꾼들과 방해꾼들이 나타나게 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흥왕'케 하는 것인 동시에 결국 자신이 누릴 '예루살렘의 기업과 권리'가 될 것이 틀림없음을 확신함으로써, 한번 힘을 내어 시작한 그 선한 일을 끝까지 담대하게 성취해 내고야 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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