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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세례에 주어지는 선물 (갈 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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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세례에 주어지는 선물 (갈 3:26-29)


오늘은 우리가 예배와 함께 입교와 세례 예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세례가 무엇인지는 세례교육을 통해서 다 들어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 시간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골2:12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는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오는 세례의식은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한 우리들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에 있었던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인해 영생을 누릴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죽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향락과 삶의 방식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나라 백성다운 삶의 목표와 방식과 가치관을 지닌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뜻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구원입니다. 세례는 말하자면 구원 받은 이의 표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3:21에서 세례에 대하여 쓰기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했습니다. 

이렇게 세례는 하나님에 의한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을 증언하는 표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가 갖는 그 이상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7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를 받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못 입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27절 안에서 그 뜻을 찾자면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합한다는 말은 또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말의 두 가지 다른 뜻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는 26절과 연관시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가 그를 옷 입음으로써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같이 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단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았다는 표지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고 그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또 뒤따르는 28절과 연관시켜서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하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한 가지 옷을 입을 때 유니폼을 입었다 합니다. “유니폼”이란 말은 “같은 모양”이란 뜻입니다. 

다 같은 형태의 옷을 입으면 모두가 하나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합한 사람은 다 하나인 것입니다. “옷”은 종종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거나 구별하기 좋은 수단입니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 말하는 “블루 컬러”와 “화이트 컬러”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블루 컬러”는 푸른 색 작업복을 입고 육체노동을 하는 근로자계급을 지칭하는 말이고 “화이트 컬러”는 흰 색 와이셔츠를 입고 사무실 근무를 주로 하는 계층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입은 옷을 보면 직업이나 신분의 차이를 쉽게 알아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한 것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모든 차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게 되면 훈련소에서는 다 머리를 박박 깎고 아무 계급장 없는 꼭 같은 군복을 입습니다. 군대에서는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오산에 있는 공군작전사령부의 기지교회 예배에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작전사령관이 제가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할 때 저한테 배운 생도였습니다. 생도시절부터 착실한 신자였는데 별 셋까지 달고 작전사령관이 되어있었습니다. 예배시간보다 일찍 와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서 일찍 내려갔습니다. 목사가 된 옛 교관을 모시게 되었다고 예의를 깍듯이 갖추어 영접을 하며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식탁에는 기지교회 군목 외에도 사복을 입은 사람이 두어 명 더 합석을 했는데 기지교회의 제직들이라고 소개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 장로라고 소개를 받은 한 사람은 스스로 계급이 상사라고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작전사령관은 안수집사였습니다. 군대에서는 보통 계급이 중장인 사령관과 상사는 같은 상에 앉을 일이 없는 신분차이가 하늘과 땅 이상으로 큰 사람들입니다. 어쩌다 같은 식탁에 앉게 되었다 하더라도 상사는 사령관이 혹 묻는 말에 답을 할 수 있을 뿐이지 먼저 말을 걸거나 직접 보고조차 할 만한 신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재미나게 이야기들을 나누는지 몰랐고 사령관도 그 상사에게 꼬박꼬박 “장로님”이라고 경어를 쓰는 것을 보고 참 아름답게 여긴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세례 받은 이들 사이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라는 것이야말로 곧 하나님나라 그 자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을 향해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들 사이에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성, 연령, 신분, 종족, 국적, 피부색갈 등 상존하는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차별이 철폐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를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의 편지 속에서의 언어사용에서부터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몇 절 앞인 23-25절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하며 주어를 “우리”로 쓰던 사도 바울이 26절부터는 매절마다 쉽게 주어를 “너희” 또는 “누구든지”로 바꾸어 쓰고 있음을 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변화를 얻은 이들은 나아가 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이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고 또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란 그 집단이나 사회의 중심이 그리스도에게로 이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심, 자유인 중심, 남자 중심, 가진 자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서로간의 갈등과 다툼을 그치고 하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함은 세상의 하나 되지 못함보다 훨씬 더 비정상적이며 악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좁은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각각 줄을 가지고 거기에 돌맹이를 하나씩 매달아 돌린다고 해봅시다. 

각자가 자기 중심으로 돌리면 이 돌 저 돌이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고 서로 다치며 줄들이 엉키고 꼬여서 돌릴 수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돌맹이를 매단 줄을 한 사람이 한 손에 모아 쥐고 돌리면 돌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도 안 날 것이고 다치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언제까지나 거침없이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도 우리 모두가 주님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갈등과 혼란과 상처 받는 일 없이 순조롭게 평화롭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례 받은 이들의 삶은 그런 조화와 공존의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세례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같은 언약의 자손이 되며 함께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이을 백성이 되었다는 표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9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세례는 이 모든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런 은혜를 영원히 누리는 삶을 향해 확실하고 단호하게 돌아설 것을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입으로, 눈에 보이는 상징적 행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은 이의 믿음의 증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례의식이나 세례를 받는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믿는 이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지만 이에 앞서 26절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이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선물들을 영원히 받아 누리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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