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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헌금의 신앙 (고후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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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받아야 할 헌금의 신앙 (고후 8:1-9)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싸움은 내 마음 속에서 싸우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세상에 있는 도성은 그 성이 아무리 튼튼하고 높은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해도 무너뜨리지 못할 성은 없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의 성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리고 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무슨 방법으로든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성은 죄악의 도성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도성입니다.  우리 마음의 도성에는 소돔과 고모라성 보다 더 타락하고 심히 부패한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고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도성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쉬지 말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내 마음의 여리고 도성을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너뜨리면 주께서 준비하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새로운 약속의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꽈리처럼 틀고 앉아 있는 여리고 도성을 무너뜨려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도전하십시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증인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교회를 들락날락하는 교인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증인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셔서 이 땅에서 당신의 증인으로 사용되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 속에 들어가 삶의 현장에서 당신의 증인으로 사용되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무슨 명상도 아니고 구경도 아닙니다.  종교의식도 더더구나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찾아오시고 구체적으로 관계하시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여기에 앉았더니 나도 모르는 크고 기이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리고 사건으로서 경험되어지는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배에 성공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냥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 성령님의 만지심과 위로하심과 약속하심이 내 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되어짐으로써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모습으로 이 성전을 나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즘 교회들마다 전도가 힘들다고 합니다.  사실 평생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실상 믿지 않는 분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조사 통계를 보면 항상 거의 변함이 없이 등장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것입니다.  "교회에 나가면 돈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래서 요즘 개척교회들은 교인들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 않으려고 한다기 보다는 교인들 눈치가 보여서 못한다고 합니다.  돈 이야기를 하면 돌아서 가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당시의 교회를 가리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한 바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들을 연구해 보면 그 비유의 내용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돈과 재물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은 돈에 관한 이야기를 대단히 많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돈이라고 하는 경제가 절실한 우리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크 테니' 라는 작가가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인생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 사고의 절반에 가까운 것은 바로 돈과 관련된 것이라고 지적한 심리학자도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돈을 어떻게 저축할 것인가?  어떻게 지출의 비용을 줄일 것인가? 등등….  우리의 사고는 돈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작가가 웰링톤 제독에 대한 전기집필을 의뢰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상당한 시간을 웨링톤 제독의 평소 돈 씀씀이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의뢰한 재단측에서 아니 무엇 때문에 그런 중요하지 않은 본질적이 아닌 일에 시간을 그렇게 많이 써시나요? 라고 물었을 때 이 작가는 영국의 유명한 속담을 인용해서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돈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지요.  money makes man."

돈이 사람을 만든다.  돈은 물질입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사용은 자기의 정신이나 철학을 대표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돈에 대한 태도를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 정신을 사도 바울이 칭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교회보다 훨씬 나중에 세워졌던 마게도냐 교회의 교인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을 당해 어렵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은 마게도냐 교인들도 그렇게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마게도냐 교인들은 훨씬 궁핍한 형편 속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헌금에 임했는가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당시 마게도냐 지역에는 빌립보라든가 혹은 데살로니가, 베뢰아라는 도시가 속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도시에 있는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그곳의 교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감동적인 헌금의 정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받을 줄만 알았지 드림에 있어서 인색했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당신들도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도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의 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헌금의 정신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은혜에 감사하는 정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라고 했고, 4절에 보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절에도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9절에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은혜라는 것은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메시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분류할 수가 없습니다 만 굳이 종교라고 붙인다면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 혹은 호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은혜라고 믿으십니까?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복음이 너희들에게 찾아와서 그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 순간부터 신앙이 진지하게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그가 살아왔던 인생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 앞에 나와 드리는 헌금의 행위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헌금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헌금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헌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겠다!" 라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헌금을 해도 주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헌금은 구약의 율법에서 자세히 가르쳐지지만 중요한 것은 율법 이전에 이미 헌금의 모본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출애굽기에 율법이 주어지는데 십일조에 관한 교훈이 출애굽기에도 나오고, 레위기에서 본격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출애굽기나 레위기 이전에 앞서서 창세기 14장에 이미 십일조의 모본이 기록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배경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이 어느 날 자기 조카 롯이 적들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한 전쟁을 합니다.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브람은 자기의 사병 삼사백 명을 데리고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해서 조카 롯을 구출합니다.  전쟁에 성공을 하고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 개선의 여로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이 써시는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을 만나게 됩니다.  이 제사장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람에게 축복을 하면서 메시지 하나를 전달합니다.  그 말씀이 창세기 14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니까 상당히 자기의 자존심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내 전략은 얼마나 적중했는가?  내 생각과 지혜는 얼마나 뛰어났는가?"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를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여 너로 승리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아브람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아 나는 내 지혜가, 내가 열심히 싸워서 그것으로 승리한 줄 알았는데 승리할 수 있었던 여건, 또 내가 싸울 수 있었던 육체적인 조건,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구나."  자신이 전쟁에서의 승리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브람은 전리품 가운데 십 분의 일을 제사장의 발 밑에 갖다 놓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최초의 십일조에 관한 모본이라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헌금하기가 어렵습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돈이라는 것은 내가 땀을 흘려서 힘들여 애써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에 대해 자연스럽게 인간적 애착을 갖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일할 수 있었던 건강, 또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사고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마다 물질에서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예물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신이 바로 기본적인 헌금의 정신인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바로 이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본받을 헌금의 정신 둘째는 무엇입니까?

둘째는, 희생의 정신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우리가 이 구절을 보면 마게도냐 교인들이 신기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삶의 정황은 환난 속에 있었습니다.  많은 시련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제적인 형편은 '극심한 가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 라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3절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헌금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렇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했고, 힘에 지나도록 희생적으로 헌금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헌금 정신은 한 마디로 희생이었다는 것을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희생정신입니다.

본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가리켜서 제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제물이라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섹크리파이스(sacrifice)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섹크리파이스(sacrifice)라는 말은 희생이다는 말입니다.  희생의 제물이다는 말입니다.

저는 진정한 헌금의 성격은 어느 정도 희생이어야 한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나는 원래 하나님의 그 영원한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해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분의 흘린 피로 내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값없이 나에게 구원을 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셔서 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이것이 깨달아지고 고백되어지는 사람들이라면 그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의 응답은 어떤 태도이어야 할까요?  저는 때로 우리의 매우 성의 없는 그런 헌금행위는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마치 싸구려 은혜인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격하시키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고백교회의 신학자요, 나치와 더불어 싸우다가 순교했던 '본 훼퍼' 목사님은 그 당시 독일교회가 무기력한 상태 속에 빠져버린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켰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이 희생의 정신을 상실한 데에 독일교회가 무기력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실는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희생만 하는 삶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희생이라는 것은 일종의 씨 뿌림과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씨를 뿌릴 때는 땀을 흘려야 됩니다.  시간을 바쳐야 되고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땀 흘림에는 열매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를 바라볼 수가 있다면 우리의 씨 뿌림은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밀을 알 수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희생을 전혀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 8장입니다.  그런데 이 헌금에 대한 교훈은 9장까지 계속됩니다.  9장을 읽어보면 특별히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헌금을 씨 뿌림과 심음과 거둠의 법칙으로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히 헌금을 심음과 거둠의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계속되는 고린도후서 9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여기서 심는다는 것은 헌금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심고자 하는 자에게는 심을 수 있는 것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주 앞에 드릴 것이 없는가?  그것은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드려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드릴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드리는 사람들에게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보면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도 심음과 거둠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할 수가 있었을까요?  십자가의 죽음은 분명히 고통이고 희생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피 흘려 희생하셨을 때 그분의 그 피 흘림으로 인류의 수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기쁨과 감격을 경험하고 일어나는 거룩한 환상을 바라볼 수 있었을 때 주님은 고통스러웠지만 기쁨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음의 비밀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도의 설화 가운데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인도에 가난한 거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궁에서 가까운 다리 옆에서 항상 구걸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은 어느 날 임금께서 행차하시다가 자기에게 한 번 눈길을 주고, 그 왕은 아주 유명한 통치자고 또 그분은 황금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그는 마술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가진 황금의 한 조각이라도 하사해 주면 그는 거지 생활을 면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임금께서 드디어 행차하시다가 이 거지를 보았습니다.  마차를 세워놓고 한참 쳐다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왕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거지에게 측은한 마음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그래서 이 거지는 서슴치 않고 "예, 저에게 황금 한 조각만 주시면 저는 다시는 거지생활을 안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왕이 또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거지는 머리를 숙이면서 "임금이시여! 저는 임금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물러서지 않고 임금이 또 묻기를 "지금 네가 가진 것은 무엇이냐?  무엇을 갖고 있느냐?"  "저는 이 밥그릇 속에 밥알 몇 개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 몇 개를 나한테 줄 수 있느냐?"  이 거지는 한참을 주저했습니다.  이상한 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 밥알, 우리 한국 밥은 다 붙어있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밥알들이 따로 따로 굴러다닙니다.  그 밥알 중에서 다섯 개를 골랐습니다.  다섯 개 밥알을 골라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왕의 손에다가 밥알 다섯 개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왕이 빙그레 웃으면서 "잘 있게!" 하면서 가더랍니다.  거지는 분하고 슬펐습니다.  "그래, 나한테 주지는 못할망정 밥알 다섯 개를 가져가?"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그날 저녁 그는 아주 속상한 마음으로 자기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배고파서 자기의 밥그릇을 다시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왠 일입니까?  밥그릇 안에 다섯 개의 황금구슬 알이 번쩍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다섯 개의 황금알이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거지의 소감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더 드렸어야 하는 건데…."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이 무엇이 부족해서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것을 요구하실까요?  어떤 면에서 그것은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또 우리가 그의 나라에 동참하는 참된 기쁨을 선물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가 주 앞에 드리는 헌금은 희생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마게도냐 교인들에게서 본받을 헌금의 정신은 세 번째로, 헌신의 정신입니다.

5절에 보면 마게도냐 교인들은 헌금을 하면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드렸다.  그들에게 헌금이란 돈이 아닌 바로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헌금은 결코 돈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신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비교적 가난한 세월을 살아왔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돈을 저축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몸에 익숙한 습관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가 모아둔 돈을 잘 선용하여 쓰는 그 정신의 훈련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부족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에게 검소와 절약을 가르쳐 온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 개미는 겨울을 생각합니다.  다가올 겨울을 생각하면서 그 여름날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런데 베짱이는 나무에 앉아서 춤추며 그냥 노래합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베짱이는 개미집에 와서 양식을 구걸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그 이튿날 얼어죽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강남스타일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기 나온 것을 아십니까?  옛날 이야기처럼 개미는 여름철에 여전히 땀을 흘려 열심히 일을 합니다.  너무 열심히 일을 하다가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철에 그는 만성 신경통을 얻습니다.  말년에 병원 찾아다니느라고 모은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립니다.  이제 개미는 병든 몸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면서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구걸을 하면서 고독한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춤과 노래를 부르던 그 베짱이는 어느 날 연예기획사 감독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가수로 발탁되어서 그의 탁월한 춤과 노래로 대박을 터트려서 거대한 부자가 됩니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지만 이제 우리가 일하고 저축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교훈을 던지려고 하는 교훈만은 아주 분명합니다.

닥터 엘른 레드패드라는 신학자요 목사님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여 교인이 와서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가 교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이때 레드패드 목사님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부인, 아시다시피 저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장과정에서 눈만 뜨면 저희 부부를, 자기의 아빠 엄마를 보기만 하면 계속해서 달라고 졸라대었지요.  그는 얼마 전까지도 그랬습니다.  우리를 만나기만 하면 줄기차게 그는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아시다시피 작년에 제 아들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죽은 제 아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저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인, 저의 소원이 무엇인지 압니까?  제 아들이 벌떡 일어나서 다시 살아나서 저에게 달라고 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분은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인! 죽은 교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교회는 당신의 헌신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 선택은 부인의 몫이지요."

이 분이 쓴 글의 마지막에 그는 유명한 씨티스타트 라는 선교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헌신의 장을 이러한 메시지로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 참으로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분 앞에 바치는 어떤 희생도, 어떤 헌신도 결코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앞에 응답하며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은 분명히 믿음의 백성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저는 이 거룩한 특권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깨달아지면서 희생과 헌신으로 자신을 드리는 아름다운 신앙으로 거듭나는 이 가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이번 추수감사절에 구체적으로 고백되어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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