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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고전 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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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고전 1:22-24)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종교심을 갖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라고 종교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극한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과 족속이 문명의 수준에 상관없이 나름대로 종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벌거벗고 살아가는 종족도 그들 나름대로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달리 특별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보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백년도 못사는 사람이 영원을 사모하다니 기이하지 않습니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곧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으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사람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습니다. 그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활동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때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이었으므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셨고,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더불어 한 가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곧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지키는 한 아담은 에덴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뱀의 꾐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또한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고,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의 삶에 사망이 임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12절에 보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망 곧 죽음은 육체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생에게 주어진 죽음은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로, 영적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 죽음이란,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역할을 하는데,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비록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적인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자를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영이 죽은 상태이므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그 대신 피조물을 하나님인 줄 알고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장 18절로 23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이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해와 달과 별들, 산과 바다와 바위, 짐승들과 새들과 심지어는 곤충조차도 신으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는 죄로 인해 사람들의 영이 죽었기 때문에 생겨난 비극적인 결과입니다.

둘째로, 육체적 죽음이 있습니다.

영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육체의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릴 수도 있었는데, 범죄로 인해 그만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히 2:15).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는 조상의 혼령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상의 묘지를 잘 써야 후손들이 잘된다고 믿고 할 수 있는대로 묘 터를 좋은 곳에 쓰려고 애씁니다. 무덤을 잘 가꾸고 정성스레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왜 인생에게 죽음이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아담이 타락한 결과로 생겨났다고 말씀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55절로 56절에 이르기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죄를 정죄하고 죄인에게 사망의 형벌을 선고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죽을 운명을 타고 납니다. 여기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셋째로, 영원한 죽음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신 대로,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합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영생에 들어가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영영한 불 못에 던짐 받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처럼 불못에 던짐 받는 것을 일컬어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잘났더라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사는 동안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시 90:10). 아무리 오래 살지라도 백세를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번 죽고 나면 다시 구원받을 기회가 없고 음부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릴 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범죄한 인생의 운명은 비참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좀 잘나고 성공했더라도 그것이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닙니다. 욥기 4장 19절에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고 하였는데, 과연 인생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 인생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간들이 쌓아 놓은 모든 문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룰지라도 또는 수천억의 재산을 모았더라도 빈손으로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망은 죄로 인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사망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방도로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무슨 선한 행실을 하면 될까요?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였고, 12절에 보니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이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선하다고 인정하는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악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64장 6절에 이르기를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세우는 의로움이란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옷들이 서로 내가 너보다 더 깨끗하다고 다툰다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겠습니까? 자기를 깨끗하고 의롭다고 내세우는 인간들의 실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법을 잘 지켰더라도, 윤리 도덕을 잘 지켰더라도, 양심적으로 살았더라도,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비추어보면 추하고 악한 상태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옷에 묻은 더러움이 어두운 곳에서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밝은 햇빛 아래서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햇빛이 너무 밝은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성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에 불과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27)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결과로 드러난 행위를 보고 판단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동기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20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도를 깨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않을까요? 로마서 3장 11절에 이르기를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영생의 도리를 깨달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사망을 이기고 구원받는 비결은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도를 깨치고, 단전호흡을 하고, 요가를 하고, 생식을 하고, 금욕을 하고, 고행을 하고, 자선을 하는 등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육체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인격 수양을 위해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죄를 없애고 영생을 얻게 하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고안해 낸 방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방법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죽은 상태에 있는 영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얼굴을 붉히고 왜 하필이면 예수님만 믿어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항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구원의 방법을 정하시든지 그것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반드시 양이나 소나 염소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노루나 사슴은 제물로 바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왜 노루나 사슴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없습니까?”라고 항변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이 도리는 사람들이 정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과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세주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성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으며,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죄 값으로 죽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을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어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받는 데 우리의 공로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이르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이 방법이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불의하기는커녕 지극히 공의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거저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는 희생을 감수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충분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온 인류의 죄를 다 용서하고도 남는 효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들 뿐 아니라 앞으로 두고두고 태어날 무수한 사람들의 죄까지도 다 사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죄의 은총을 온 인류가 다 받아 누리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맨 가운데 주님께서 못 박히셨고, 그 좌우에 강도가 한 사람씩 못 박혔습니다. 얼마쯤 지났을 때, 그 중 한 강도가 예수님을 보고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강도는 구원 받기 위해서 무슨 선을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지금 저지른 죄 값으로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맡겼을 때 단번에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본문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데,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 신앙은 곧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사죄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의 은총을 우리 삶 속에서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대속의 은총을 힘입어 죄를 이기고 세상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만 구원 받은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이웃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먼저 믿은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십자가의 도를 의지하여 승리의 삶을 살아가며, 불신 가족과 이웃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증거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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