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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니 (출 1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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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니 (출 12:5-14)

무더운 여름에 모기 한 마리가 졸고 있는 학생의 몸에 침을 찔러 피를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졸다가 모기에게 물린 학생이 ‘앗 따가워’ 그러면서 잠에서 깨어났으나 이미 모기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잠에서 깬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기가 또 피를 빨아먹으려고 학생의 손등에 앉았습니다. 

학생이 모기를 때려잡기 위해서 손을 들어 치려는 순간 모기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학생, 내 몸 속에 학생의 피가 흐르고 있어! 나를 죽이지마!” 그 말에 학생은 맘이 약해져서 모기를 죽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한 참 후에 또 모기가 피를 빨아먹으려 하자 학생은 이번에는 꼭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모기를 때려잡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모기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학생! 나는 학생과 피를 나눈 형제라오. 설마 형제를 죽이진 않겠지?” 

여러분, 여러분의 몸속에는 어떤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여러분, 투석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신부전증’이라는 질병에 걸린 사람 중에는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콩팥이라는 장기가 있습니다. 이 콩팥은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 안에 있는 독소물질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콩팥에 이상이 생겨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피 속에 있는 노폐물을 거르지 못해서 독소수치가 높아지고, 결국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콩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신부전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부전증에 걸린 사람들은 콩팥이 피 속에 있는 노폐물을 제거하지 못하니까 기계의 힘을 빌어서 피를 깨끗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몸속에 흐르는 피를 빼내서 기계를 통해 깨끗하게 한 후에 다시 몸 안으로 들여보내주는 것을 투석이라고 합니다. 이런 투석을 이틀에 한 번씩 해야 하는데, 한번 할 때마다 4시간씩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들은 투석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투석할 때 오는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때로는 투석 후유증으로 고생하기도 합니다. 주사바늘이 찌르는 고통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런 고통을 감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고통을 견뎌내면서 계속 투석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피 - 깨끗한 피를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다고 말입니다. 레위기 17:11절에서 말씀합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투석을 통하여 독소물질이 제거된 새로운 깨끗한 피를 공급받아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에 찌들어 있는 죄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의 피는 일회적인 죄용서만을 선언해 줄 뿐입니다. 죄없는 깨끗한 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 주는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능력이 되는지 가르쳐줍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을 비롯한 많은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한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으면서, 애굽에서는 그 전에 있었던 7년 동안의 풍년 기간에 이미 많은 곡식을 저장해 놓았기 때문에 흉년이 들어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흉년을 대비하지 못한 주변 나라들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오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야곱의 가족들도 흉년이 들자 먹을 것을 구하러 애굽에 오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오래 전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이 눈물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애굽의 국무총리로 있던 요셉의 요청에 의해서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된 요셉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국무총리의 가족이 왔으니 얼마나 잘 대우를 해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조가 일어나면서 애굽으로 건너간 야곱의 자손들은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애굽을 위해서 온갖 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던 세월이 400여년이나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힘들게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왕궁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도합 80년 동안의 훈련의 과정을 겪은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십니다. 모세는 바로 왕 앞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고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400여년을 노예생활하던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 왕이 선뜻 해방시켜줄 리가 만무합니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뜻하지 않는 재앙을 겪게 된 바로는 다급해진 마음에 모세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재앙이 멈추면 곧바로 바로 왕의 마음은 바뀌어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한 재앙이 무려 9차례나 되었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애굽 땅에는 엄청난 고통이 가해졌습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 왕에게 ‘이러다가는 우리 애굽이 망하게 생겼다’고, ‘모세의 요구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빨리 내보내야만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탄원을 하기에 이릅니다.(출애굽기 10: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왕의 완악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과 짐승의 첫 번째 난 것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예외는 없습니다. 애굽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 애굽 땅에서 기르고 있는 모든 짐승에게 다 해당되는 재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양을 잡아 그 고기는 먹되,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재앙을 내려 심판하실 때에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발라져 있는 것을 보면 그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 집을 건너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유월절 밤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출애굽기 12:29-30절에 의하면,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 그리고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죽이셨습니다. 애굽 땅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는 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 예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고 그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건너가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피를 바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집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 어떤 특별한 문안을 한 깃발을 세워놓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알리바바와 40명의 도둑’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대문에다 어떤 표시를 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쉬운 방법이 아닌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필 피를 바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는 모두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하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르라고 하신 데에도 분명한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가 죄를 사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생명을 빼앗아가는 재앙입니다. 애굽 땅에 있는 모든 가정들마다에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열 번째 재앙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서는 장자가 죽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서는 곡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집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발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는 유월절 양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양의 생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구해준 것입니다. 생명과 생명을 맞바꾼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라고 해석합니다. 고린도전서 5:7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유월절 어린양이 자신을 희생하여 죽음으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를 수 있었고, 그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고 넘어가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혈이 우리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지면 우리는 죽음을 면하고 생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우리의 죄를 씻어 용서하심을 받을 때에만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들으면 좋은 인격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고상한 성품을 닮고 싶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어려운 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하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할 때 우리에게 그런 유익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보다 예수 믿는 더 중요한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우리의 죄가 씻어짐을 믿을 때 그 때부터 진정한 신앙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대의 많은 신앙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신앙생활하곤 합니다.

영국에 파워코스트라는 백작 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대단히 큰 부자로써 거대하고 화려한 성에서 살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 백작 부인에게도 마침내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임종을 기다리고 있을 때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부인, 얼마나 힘드세요?” 그러자 죽음을 눈앞에 둔 백작 부인은 두렵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괜찮습니다. 

저는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학식이나 재산이나 명예도 죽음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흰 눈같이 깨끗이 씻어 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없습니다. 그 말씀이 내 영혼에 그렇게 감미로운 말씀이요 힘이며, 위안의 말씀이 되는 줄 이 순간까지 몰랐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며,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귀한 은혜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까? 그것을 깨달으셨다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나 높은 학문이 알려주지 않는 엄청난 하늘의 비밀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죽음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내게서 행복이 멀어진다고 생각하면 신앙생활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불안한 마음에 평안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온 세상의 불안으로 인해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인격적 수양의 덕을 쌓기 위해서 신앙생활하거나, 뭔가 고상한 취미를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이야 더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언제 어느 순간엔가 신앙이 내게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신앙을 떠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우리 주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신앙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것은 세상의 행복과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행복하지 않는 것 같은 삶의 여건 속에 있을지라도 나를 구원하신 그 십자가 은혜로 인해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 우리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생명을 잃게 되는 상황 앞에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생이 끝나면 더 영원하고 더 아름다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에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진 애굽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다. 각 가정마다 맏아들이 한 순간에 죽었습니다. 맏아들은 얼마나 귀합니까? 모든 자식이 귀하지만 맏아들은 더욱 귀합니다. 

그렇게 귀하게 자라던 맏아들이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시름시름 병들어 아프다가 죽은 것도 아닙니다. 교통사고나 어떤 사고를 당해 죽은 것도 아닙니다. 낮에까지도 건강하게 뛰어놀았습니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식사도 맛있게 잘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징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그 아이가 죽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 집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옆집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앞집, 뒷집 할 것 없이 모든 집들마다 갑작스럽게 죽은 맏아들로 인해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아비귀환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서만은 평온합니다. 곧 출발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멀리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해방과 자유를 맞게 되었다는 설렘으로 출발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말입니다. 
  
얼마나 대조적인 상황입니까? 애굽 사람의 집에서는 집집마다 맏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통곡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서는 자유와 해방에 대한 설렘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주었습니까?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 때문입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발라진 집에서는 자유와 해방에 대한 설렘으로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고,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발라져 있지 않는 집에서는 맏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통곡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발라져 있습니까? 그 피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고 많이 알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일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선하게 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어주심을 믿는 그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지금도 내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져 있으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집에서 통곡소리가 들려올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는 마음에는 구원의 감격과 소망이 가득하여 두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늘의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 1483-1546)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짜보면 피가 흐른다!’ 그렇습니다. 참깨를 틀에 넣고 짜면 고소한 참기름이 나옵니다. 잘 익은 포도를 짜면 달콤한 포도즙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도 피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십자가 사건은 피흘림의 사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우리 주님의 피흘리심이 성경의 중심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데 힘과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수혈을 받아야 합니다. 말기 신부전증 환자들이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받아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매일같이 수혈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삶에 힘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우리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십시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우리에게 임할 재앙이 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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