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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쳤다 (아 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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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쳤다 (아 2:10-17)

제가 아가서를 본문으로 설교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가서가 과연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냐, 성경에 포함될 자격이 있는 책이냐 하는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민망한 내용이 아니냐, 외설적이지 않느냐, 이런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단 설교자들이 아가서를 자주 인용하지 않습니다. 설교 본문으로 자주 채택하지 않습니다. 마치 경기에 투입되지 않는 선수와도 같습니다. 팀에는 소속이 돼 있는데 뛸 기회를 얻지 못하는 선수와도 같습니다. 

아가서는 무슨 말을 하려는 책이냐. 사람들이 제일 흔하게 제시하는 이론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노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신랑이고 교회가 신부이기 때문에 신랑 예수님과 신부 교회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에 아가서 구절이 종종 등장합니다. ‘주는 저 산 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별’, ‘주 나의 사랑 나 주의 사랑 그 사랑은 내 기쁨’ 이런 모든 것은 아가서에서 따온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가서가 기록될 때 아직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인의 성경에 아가서를 포함시켰는데 그럼 그 당시 사람들이 이 노래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설득력이 있고 당연한 해석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시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그 이외의 어떤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법학에는 보편적 해석의 원리라는 원칙이 있는데 이 말은 글을 읽을 때 보편적인 의미대로 해석하라는 뜻입니다. 

이 원칙은 법학뿐만이 아니고 신학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무슨 숨은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전에 가장 보편적인 의미대로 읽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아가서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구체적으로 남자와 여자 간의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오늘 이 설교는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본전도 건지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고 전해드립니다. 우리가 즐겨듣는 가요의 80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아십니까? 사랑을 노래합니다. 사랑을 빼면 가요의 주제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노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노래하는 그 내용 대부분이 슬픈 내용입니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슬픔을 말합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이루어질 없는 사랑, 더 이상 내 옆에 없는 사랑, 아픔을 주는 사랑, 이런 식으로 사랑의 기쁨보다는 슬픔을 노래할 때가 많고 아니면 사랑의 순간적인 면을 노래합니다. 불타는 사랑, 터질 듯 한 가슴, 언제쯤일까, 언제쯤 말을 걸어올까, 언제쯤 손을 잡을까…. 

인간이 느끼는 사랑이 늘 이렇게 가슴이 터질 듯 하다면 벌써 가슴은 옛날에 터졌을 것입니다. 사람은 심장마비로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육체적인 매력과 구별할 수 없는 감정을 노래합니다.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그건 너,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이것도 사랑 맞는데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여자가 아름다워 보이기에 사랑을 느끼는 이런 모든 것은 다 정당한 사랑의 감정입니다. 

저는 그것을 폄하할 의도가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이 남자와 여자 간에, 남편과 아내 간에 노래할 만한 사랑의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 대다수는 그 사랑의 노래를 부를 때가 별로 없이 살 것이고 더 귀하고 복된 사랑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남녀 간의 사랑의 전부일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말하지만 온전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는 사랑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아담을 도울 자가 없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하와를 지어서 아담의 돕는 배필이 되게 하셨어요. 그래서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담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로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노래는 아담이 자기 아내를 맞으면서 기뻐서 부른 노래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신앙과 성은 한 동네가 아니라고 누가 말을 합니다. 사람이 거룩해지려면 성을 멀리해야 된다고 누가 말합니까. 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호기심이나 욕망에 대해서 부끄러워합니까.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다음에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음을 깨닫고 나무 잎사귀로 옷을 해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 뒤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벌거벗었지만 그 이전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인간은 성은 은밀한 중에 탐닉하는 욕망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숨겨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성적 행위가 줄어들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줄어들지 않았어요. 다만 음지로 숨은 것뿐입니다. 

음지로 숨으면 숨을수록 사람은 성에 대한 인식이 더 어두워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성에 대해서 물어볼 때 부모가 당황합니다. 민망해 합니다. 자녀가 왜 이렇게 조숙할까, 왜 이런 것을 벌써 물어볼까, 왜 이런 것을 궁금해 할까,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물어보는 게 당연한 거예요. 안 물어보면 이상한 거예요. 그러나 자녀는 부모가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런 것은 부모님에게 물어봐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모로부터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음지에서 그것을 배웁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친구들과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통해서…. 

남녀 간의 사랑이 즐거운 것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즐거운 것과 기쁜 것은 다른 것입니다. pleasure-즐거움, joy-기쁨, 이건 다른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기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고 또 그 기쁨을 나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훨씬 더 드뭅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가 비롯되느냐면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을 인류는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왜곡시키고 오해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번민을 주는 원인이 돼버렸다는 사실이에요. 시그만 프로이드의 결론은 틀렸지만 그의 진단은 옳았어요. ‘많은 노이로제, 인간의 정서적인 번민이 욕구의 불만에서 비롯된다.’는 설입니다. 

프로이드가 이 말을 하기 전에는 인간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놀랍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참모습에 대하여 이만큼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마음껏 나가서 자기 욕구대로 살라는 말이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전자발찌 찹니다. 성범죄자가 됩니다. 아니면 도착증 환자가 됩니다. 알코올중독, 마약중독, 도박중독이 있는 것처럼 성중독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중독된 사람이 행복하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습니다. 사람들 중에 그런 치료받는 사람들 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문제가 됩니다. 제가 오늘 설교가 잘해봤자 본전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어렵고 저렇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하게 되면 방종을 권하는 것이 돼버리고 규범과 규칙대로 살라고 말하게 되면 이제껏 교회가 말했던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돼 버립니다. 진부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아가서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숨겨진 비밀이에요. 하도 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것을 놓칩니다. 

첫째로 사랑은 밝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슬픈 노래, 느끼한 노래, 한이 있는 노래, 이 모든 것은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밝습니다. 선합니다. 좋은 것입니다. 숨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당당한 것입니다. 사랑은 하도 좋아서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합니다. 부러워하는데 질투하는 식으로 부러워하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저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왜 못할까,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의 부러움입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어느 외국영화를 보는데 도중에 이런 노래가 있었어요. You give me a reason to live-너는 내게 살 이유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좀 느끼한 영화이고 느끼한 노래였어요. 그때 그 노래가 저에게 충격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 저 영화에 나오는 저런 식으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럼 살 이유가 없다는 얘기일까. 그럼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산다는 얘기일까. 그건 절대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랑, 밝은 사랑은 당신이 내게 살 이유를 제공한다는 식의 그런 감정 의존적인 사랑이 아니고 내가 당신에게 살 이유를 제공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살 이유를 제공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 이유를 제공한다, 이것이 옳습니다. 많은 영화가 해피엔딩이 아니죠. 사랑을 얘기하지만 헤어지는 장면으로 끝나지요. 만일 당신이 내게 살 이유를 제공한다면 왜 헤어집니까. 그건 잘못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밝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어둡고 치우친 것으로 대체한 인간의 모습을 말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창조적이고 회복하는 것이고 더해주는 것이고 사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했지요. 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합니까. 상대방이 주저앉아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멈춰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서 ‘일어나 가’라고 말한 게 아니고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에요. 멈춰있는 사람,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 가시오’가 아니고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고 권면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랑이에요. 그러므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도 더 건강하고 더 담대하고 더 적극적이고 더 힘이 있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아가서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말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주저앉아 있는 사람을 일으키는 사랑이에요.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요, 이것이 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누구든지 느낄 수 있고 사랑의 유희는 누구든지 시도할 수 있지만 주저앉아있는 사람을 일으켜서 함께 가게 하는 사랑은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어른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상대방을 어여쁘게 보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이 구절이 아가서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어여쁘다, 예쁘다는 말은 사람이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에요. 그 사실을 아십니까. 예쁘다는 말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에요. 가장 우호적인 행위에요. 좋아한다는 말보다도 예쁘다는 말 속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어요.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더 점잖아져서 나이든 분에게 예쁘다고 하면 실례가 되지만 그래서 존경스럽다느니, 어렵다느니, 다 쓸데없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속에 원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예뻐해 주는 것입니다. 남편 되시는 분들, 아내를 예뻐하셔야 됩니다. 또 아내 되신 분들, 남편을 예뻐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예쁘다고 말을 해 보세요. 본문에서도 말하지 않습니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안 예쁜데 어떻게 예쁘다고 말하느냐 ? 자기 자식 안 예쁜 부모 있으면 나와 보세요. 제가 보긴엔 꿀돼지 같더구만. 

그러나 부모 눈에는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예뻐 보이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쁜 데에 주목하면 됩니다. 눈이 예쁘든 코가 예쁘든 목소리가 예쁘든 마음이 예쁘든 신앙이 예쁘든 한 가지라도 예쁜 것에 주목하면 그 사람 전체가 예뻐 보입니다. 예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고 사랑하면 예쁩니다. 하나님 만드신 모든 것이 예쁩니다. 그것만 알면 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예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뻐하신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용서하신다, 의롭다 하신다, 하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예뻐하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예뻐하시면 누가 우리를 밉다고 하겠습니까. 그게 복음이에요.

네 번째로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이것은 심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피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생하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식는 사랑은 봄에는 사랑했을지라도 가을에 가면 식고, 여름에 사랑했을지라도 겨울이 되면 식어버리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오히려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면 소생합니다.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 살아나요. 

여러분이 설사 사랑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겨울이 지나면 사랑이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일어나라’ 했더니 죽은 자가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들고 일어나라’ 했더니 중풍병자가 일어났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일어나 함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뿐만이 아니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되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주저앉았던 인생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고 우리가 함께 갈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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