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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말해야 될 때 (롬 10: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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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말해야 될 때 (롬 10: 8-15)
 
신앙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가르친바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신앙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 들어보신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과 언어에 대한 가르침의 다수가 편중됐고 미신이나 사람들의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우리 고유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고 또 입방정을 떨지 말아야 된다는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만일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의 언어에 대한 가르침이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언어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고 우리가 소원하는 것들에 대해서 입으로 되뇌는 그 차원을 넘어섭니다. 미국에서 신앙의 언어에 대하여 강조했던 부류는 대략 두 부류를 들 수가 있는데 둘 다 국내에 소개되었습니다. 

한 부류는 로버트 슐러 목사의 긍정적인 사고입니다. 로버트 슐러의 메시지가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그가 가르치는 긍정적인 사고의 철학이 과연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데에서 빌려 온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을 반겼습니다. 사람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생긴다는 데에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또 한 부류는 오럴 로버츠 목사의 소위 씨앗 믿음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seeds faith-씨앗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의 믿음을 씨앗처럼 사용해서 입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면 그대로 된다는 식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이 원래 의도에서 벗어나서 사람이 자기 소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주술적인 방법이 돼 버렸어요.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자동차가 보이면 그 자동차에 손을 얹고 이 차는 내 것! 이 차는 내 것! 이렇게 하면 마치 그 차가 내 것이 될 것처럼. 이것은 침 발라놓는 식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침을 발라 놓는 것처럼, 이것 내 것! 내 것! 이런 식으로 말하면 내 것이 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내가 원치 않는 현실을 부정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병원에서 어떤 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입으로 ‘아니야, 나는 이 병이 없어. 나는 건강해. 이 병이 나는 없어.’ 이렇게 고백을 하면 마치 그 병이 없어질 것처럼 생각하고, ‘맞아, 나는 그 병이 있어!’라고 시인하는 순간 그 질병이 현실이 될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런 농담까지 유행했습니다. 지옥에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여긴 지옥이 아냐. 나는 지옥에 있는 게 아냐. 이건 지옥이 아니야.’ 그러면 마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 무엇을 고백한다고 해서 아닌 것이 긴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입으로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서 긴 것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하나님은 미사여구를 사용하시지 않고 모세가 죽었느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yes면 yes, no면 no이지, yes가 maybe라고 한다고 no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말한다고 하면서 더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두려움의 종이 되고 미신적이 돼 버리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프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안 되었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떨어졌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힘들다는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 돼 버렸습니다. 마치 그런 말을 하면 그대로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요 미신이요 두려움이요 원시인들의 주술적인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왜 입으로 시인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 효험이 어디까지 유효하고 어디에 적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그 믿음이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 어디서 오느냐. 17절 말씀에 있는 대로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기적을 보는데서 오는 게 아니고 믿음은 하나님을 보는데서 오는 게 아니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미암습니다. 그 믿음. 그런데 그 믿음이 내 구원에 효험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에 그 믿음을 두어야 됩니다. 내 입으로 내 믿음을 시인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른 어떤 성례전이나 다른 어떤 의식이나 예식보다도 입의 고백이 더 효과적이고 효험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너희가 마음으로 믿고 그리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지 않았고, ‘너희가 마음으로 믿고 그리고 성찬식을 받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람에게 구원의 효력을 미치는 다른 어떤 예식이나 성례전보다도 믿음을 입으로 시인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8절에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구절에서 키워드는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 

왜 기독교에서 말씀선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느냐.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성도에게 그저 정보를 전달한다든가 성도를 권유한다든가 설득한다든가 이런 차원이 아닌 말씀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자체를 전달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씀하셨더니 죽은 나사로가 일어나 나온 것처럼,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셨더니 문둥병자가 깨끗하여진 것처럼,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은 것처럼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는 당신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전달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실 때에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당신이 선포하시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으면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 자체가 어떤 의로운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의와 주님의 은혜를 담아서 내게로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에요. 이것은 직접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 이외에 성례전이나 예식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예식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간접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전통은 말씀선포를 무엇보다도 강조해 온 것입니다. 말씀선포 그 자체가 본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교회가 복음의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이 여러분 가까이 다가가서 여러분 마음에 있고 여러분의 입에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고 예수님의 은혜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된다는 겁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된다는 겁니다. 

언어의 역할은 우리의 생각에 구체적인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말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이 구체화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믿음의 언어가 우리의 믿음을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실 때 무엇으로 지으셨습니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천지를 지으신 게 아니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더니 빛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언어가 당신의 창조적인 의도를 구체화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언어도 이와 같습니다. 이 사실을 불신자들이 더 잘 압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결코 믿지 않는 것을 입으로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믿는 사람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믿음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사람을 의식하고 민망하게 생각하고 계면쩍어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고 민망해 합니다. 그래서 고백을 하더라도 남들이 없을 때 고백하거나 아니면 시끄러울 때 고백하려고 합니다.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그건 시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한다는 말은 남들 듣는 앞에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사람들 앞에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천사 앞에서 너를 시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부요하시고 했습니다. 당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부요한 은혜입니다. 풍성한 은혜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부족할지 몰라요. 우리의 생각은 인색할 수 있어요.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것을 여러분의 입으로 시인하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할 때 꼭 소리를 내서 기도합니다.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것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천지차이에요. 같은 거 아니냐? 아닙니다. 생각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를 때가 많아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성령이 기도하게 하시는 말이에요. 그래서 내 생각은 부정적이고 초라하고 주저하고 겁을 먹더라도 내가 입으로 기도할 때는 전혀 다른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찬양을 부릅니까. 소리를 내서 찬양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노래에 섞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암송하셔야 됩니다. 나는 외우는 성경구절이 없다?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창피한 일이에요.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나는 성경을 잘 몰라요? 그거 자랑 아니에요. 구구단은 외우실 것 아닙니까. 구구단을 외우는 사람이 왜 성경말씀을 못 외웁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뭘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뭘 했습니까. 성경구절 하나 외우지 못하는.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읽고 무엇을 공부했다는 얘기입니까. 성경을 모른다는 말을 하지 하세요. 그건 자랑이 아니에요. 그건 겸손도 아니에요. 그건 영적인 무력함과 무지함을 고백하는거에요. 성경을 모른다는 말을 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외우는 게 나아요. 왜 성경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암송해야 된다고 하느냐. 암송을 해야 내 입으로 성경말씀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에 성경말씀이 들어 있어야 내 입으로 그것을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믿음을 의도적으로 입으로 말하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소리를 내서 찬양을 부르고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그건 점잖지 못한 신앙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믿음을 사용할 수는 있고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의 차이는 그 믿음이 얼마나 크고 작으냐의 차이가 아니고 자신의 믿음을 얼마만큼 사용할 줄 아느냐에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이 마음속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풀어놓아야 되는데 풀어놓기 위해서 여러분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일어나라, 빛이 있어라,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입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신다!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나님이 끝까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언어로 고백할 때 믿음이 잠재적인 차원에서 실제적인 차원으로 옮겨지면서 그 믿음이 우리를 위하여 역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는 것을 말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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