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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에 동참하는 마음 (고후 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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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동참하는 마음 (고린도후서 8:1-15)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구약과 신약시대의 헌금은 그 방법과 사용처에 약간의 다름이 있습니다.   구약의 헌금(헌물)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 성전 보수와 관리, 또는 구제사업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의 헌금은 복음 전하는 일군들의 후원금으로 사용되었으며, 초대 예루살렘이나 이방인의 교회들에서는 오늘날처럼 건물이 없던 때이니 예배당 건축이나 관리보다는 많은 부분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헌금의 용도는 차이가 있지만 헌금의 목적과 정신은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에게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일각에서는 구약의 율법이 완성된 오늘날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 라는 주제로 끝없는 토론을 벌이는 중입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 물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입니다.   율법적인 잣대를 제시하며 십일조를 당연한 의무로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폐기된 규칙으로 여기는 양극단의 주장이 있습니다.  상반되는 주장에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도 있습니다.      

헌금의 이름과 방법이 서로 다를 뿐 자발적인 감사의 표현이 분명하다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해 열을 내어 비판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염려되는 쪽은 십일조의 정신을 왜곡하는 극단적 주장들입니다.   자발적인 헌금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십일조를 준수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 혹은 징계에 촛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조건부적인 헌금생활입니다.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 하나님으로부터 그 이상의 복을 받을 것이며 또 받아야 한다는 투자금 상환 같은 기대감에서 드리는 헌금이기에 건강하지 못한 헌금생활입니다.   

또 하나 우려되는 주장은 십일조가 신약에 와서는 폐기된 것인데 아직도 십일조를 실시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물질적 압박감을 가중시키며 교회가 헌금을 더 많이 거두어 들이려고 강요하는 악법이라고 비판하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헌금이라는 물질적 부담으로부터 자유하고픈 구실을 삼아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주장이라면 역시 건강하지 못한 십일조 폐기론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의식을 가진 많은 교우들은 헌금의 자발적인 정신을 존중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드리며 본인의 의지와 신앙고백을 따라 십일조 이상의 물질을 헌금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교우 여러분, 요즘 우리 교회가 돈이 부족한가?   헌금이 줄어 강조하려고 이런 설교를 하는가? 하며 너무 부정적으로 받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 혹은 물질관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오늘 분문을 통해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을 찾아보고  여러분의 헌금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 건강한 믿음생활의 한 부분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는 다른 단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물질이 필요하고 그 물질을 모으는 방법이나 사용 방법 등을 논할 때 다양한 생각이 있습니다.  교회가 평안할 때 그리고 물질이 건강하게 사용되고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교회의 재정운영이 세속적인 단체들보다 더 추하고 부끄러운 모양을 드러내는 요소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이 교회를 비판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이슈 중에 하나가 돈 문제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돈을 억지로 끌어모아 세금도 내지 않는 돈으로 목회자들의 배를 불리고 교회 재산만 늘리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는 ‘모여라, 돈내라, 집짓자’ 이것 밖에 하는 일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겉만 보고 하는 말도 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하는 말처럼 교회가 반성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부분도 많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학 1학년 때 같은 과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불신자가 아니라 전에 지방에서 교회를 다니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예배당 건축 설명회가 있던 주일이었습니다.   산동네 작은 예배당이 건물이 낡았고 또 재개발을 하게 되어 새 건물을 지어야 할 시기였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건축위원장 장로님이 교우들에게 건축헌금에 대한 설명과 헌금 참여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던 이 친구가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교회는 왜 맨날 돈내라는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다시는 이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 했습니다.  그 교회가 항상 헌금 이야기를 하는 교회도 아니고 예배당 건축을 준비해오던 일이었는데 그 배경을 모르는 그 친구에게는 일단 듣기 불편한 돈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릴 때 친구들에게 교회 가자고 전도하면 짖궂은 녀석들이 놀리며 부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갔더니 눈감으라 해놓고 신발 훔쳐 가더라’ 마루 바닥에서 예배드리던 시절 신발을 신발장에 두고 들어갔는데 집에 갈 때 신발을 찾으면 누가 바꿔 신고 가거나 없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어쩌다 친구 따라 교회에 왔다가 신발을 잃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부르던 또 한 소절의 가사는 ‘예배당에 갔더니 매미채를 돌리며 돈내노라 하더라’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이런 비아냥이 얼마나 속상하고 듣기 싫은 것이었는지 여러분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 내뱉는 비아냥이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어린 친구들에게도 교회 가면 돈내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부담스럽고 싫더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에서 헌금 이야기 하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런 주제입니다.   기독교 초창기에 목회했던 사도 바울은 일찍이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예견하였고 또 이미 교회 안에 그런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지방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성도들이 헌금을 어떻게 드리고 또 관리해야 할 것인가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우리 교회의 헌금봉투는 가능하면 헌금의 종류를 간소화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고급용지에 인쇄된 헌금봉투를 사용하던 분들이 보기에 좀 촌스럽게 생겼습니다.  본인이 기독교인이 아님을 밝힌 어떤 여학생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가 헌금봉투를 보고 자신의 블로그에 봉투를 찍은 사진과 짧은 글을 올린 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교회 봉투에 스탬프로 찍은 ‘겨자씨’라는 헌금 이름 때문입니다.   그 학생은 겨자씨라는 이름을 보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궁금하여 예배중 기도시간에 킥킥대고 웃다가 주위 사람의 눈총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올렸습니다.  

아마 우리 교인들 중 태반이 겨자씨 헌금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심코 지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겨자씨 헌금을 정한 것이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동안 아무 설명이 없었으니 당연합니다.   우리 교회가 영국교회 예배당을 빌려 사용하고 있지만 언젠가 필요하면 건물을 구입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고 혹은 교인 수송차량 구입과 같은 큰 비용을 지출할 때 한꺼번에 헌금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종잣돈을 비축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겨자씨라는 이름을 붙이고 헌금을 했었습니다.   말그대로 겨자씨가 아주 작지만 이 다음에 크게 자라면 큰 몫을 감당하리라는 기대감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우들이 워낙 이동이 많다보니 세월이 흐르며 기억에서 잊혀졌고 또 새로 오신 분들은 의미를 모른체 봉투에만 이름이 남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은 작은 공동체이고 재정상황도 넉넉하지 못해 수입된 헌금의 많은 부분이 교역자의 생활비와 교회 내 행정, 예배와 일반 경상비로 지출이 되고 대외적으로 선교와 구제, 장학금 전달하는 일에는 아직은 많지 못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대외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지금보다 더 많은 비율로 성장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보다 건강한 교회가 되어 우리 교우들이 주의 선한 사업을 위해 즐거움으로 동참하는 마음이 더 자라나고 성도들의 경제사정도 함께 나아져 가길 바랍니다.   

이번에 남전도회가 주관하는 선교기금 마련 바자회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마음을 합하여 협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먼저 나의 필요를 충분히 만족시킨 후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나누려고 하면 어쩌면 평생 한 번도 선한 사업에 동참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급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덜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면 나에게 덜 급하고 별 필요 없는 것을 절약하여 다른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 무엇을 위해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연보에 동참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연보는 어려움을 만난 이웃을 돕기 위해 자원하여 내는 물질인데 수재를 만나거나 지진을 당한 이웃들을 도울 때 모금하는 돈을 의연금이라 하는 것처럼 연보는 의연금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로마시대에 많은 피식민지 백성들이 기근과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바울은 팔레스틴 지역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지방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고 그곳 성도들과 계속하여 교제를 가졌습니다.   전도여행을 다니며 각 지역 교회의 형편을 알게 된 바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교회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웃 교회들에게 형제교회 성도들의 고난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중에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지방이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방입니다.   마케도냐에 있는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이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청하여  바울에게 그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게 해달라 간청하였고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마케도냐 지방의 교인들도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도 어렵지만 더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해 힘닿는대로 모금에 동참하였으며 때로는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였습니다.   바울은 마케도냐 성도들의 이런 열심을 보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이상으로 헌신하였는데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다음에 우리에게까지도 그 사랑을 전달했으니 내가 그 일의 증인이라 하며 칭찬하였습니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인들의 열심을 고린도교회에 소개하며 여러분도 이 일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디도를 보내어 이 은혜로운 일을 시작하게 했었는데 이제 여러분이 모두 협력하여 그 일을 완수하라고 격려합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말과 지혜와 열심 그리고 우리를 향한 사랑이 풍성한 것처럼 이 은혜로운 일에도 열심을 내어 동참하라 부탁합니다.   이것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혹은 마음으로만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증명하라는 바울의 말은 고린도교회 입장으로 거절하기 어려웠고 명령보다 부담스런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연보를 거두는 일에 동참해야 하는 당위성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함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명령으로 하지 않고 다만 나의 의견을 전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해부터 마음에 두고 시작한 그 일을 이제 끝마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할 마음만 있다면 여러분의 형편을 따라 받으실 것이며 없는 것을 바치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없는 것을 어찌 억지로 드리라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하는 마음 이것이 바울이 권하는 연보의 정신입니다.   

둘째는, 평균의 원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여러분에게 짐지워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나누어 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지금 여유가 있는 여러분이 어려운 형제를 도와준다면 그들 역시 넉넉할 때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균형을 이루어 서로를 돕는 일이 됩니다.   성경에 말씀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 (출 16:18) 하였습니다.   

어디에서 읽었던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할 때 아침마다 거두었던 출애굽기의 만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식구수 대로 먹을 만큼의 만나를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조금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지만 되에 달아보면 신기하게도 식구들이 먹기에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은 적당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욕심을 내어 더 많이 거두거나 남겨 내일을 위해 비축해두었습니다.   욕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일에 대한 불안함과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만나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혹시 모르니 내일 먹을 것도 거둬놓자 했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먹고 남은 만나에 다음 날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려주신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를 거두는 법칙은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책임지고 먹여주신다는 믿음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바울은 광야에서 거두었던 만나로부터 균등의 원칙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일용할 양식마저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누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참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나도 당장 부족한데 혹은 나도 언젠가 부족할 수 있는데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면 나는 무엇으로 살까?  염려하며 내 것을 움켜쥐고 나누지 않는다고 하여 내 것이 많아지거나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남에게 주고나면 나는 내일 무엇으로 먹고 살지?   없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나 먼저 살고봐야 되겠으니 나눌 수 없다 하고 꽁꽁 묶어놓지만 그것이 결국 나도 사용하지 못하고 썩어지는 물질이 된다는 교훈을 꼭 기억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물질을 가지고 선한 일에 즐거이 사용하는 사람들이지 돈에 얽매이고 그것을 의지하며 돈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람쥐나 청설모가 겨울을 대비하여 분주하게 먹이를 물어 나릅니다.  저렇게 열심히 감추는데 다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어떤 글을 보았더니 다람쥐가 나중에 먹으려고 여기저기에 열심히 저장해 놓지만 다시 찾아먹는 것은 겨우 30%이고 나머지 70%는 찾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람쥐가 숨겨놓은 것을 찾지 못한 덕에 땅속에 숨겨진 도토리가 이듬해 싹이 나고 자라 생태계를 유지한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게 참 재미있습니다.  

다람쥐보다 훨씬 지혜로운 인간이 내일을 대비하여 저축하고 저장하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오직 나만을 위해 쌓아놓고 어려운 이웃을 나몰라라 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까지 끌어모아 나만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다람쥐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좋은 일에 써보지도 못한 재물의 대부분은 이런저런 일로 내 손을 떠나버립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연보의 원리는 헌금의 원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립니다.  헌금으로 그 은혜에 동참하며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신 이웃의 필요를 함께 나누며 삽니다.   이웃 사랑은 마음으로 시작하여 나눔이라는 행동으로 그 사랑을 증명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헌금 외에도 여러가지 방법과 통로를 통해 이웃을 위한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줄 압니다.   아무쪼록 그 일이 감사와 기쁨의 섬김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여러분의 섬김과 나눔으로 주의 은혜가 더 널리 전달되고 여러분의 삶이 주의 은혜로 날마다 기름지고 윤택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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