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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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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46-5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라는 동리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구걸하는 한 맹인을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라는 말이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아버지 디메오는 여리고에서 퍽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시각장애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장애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시각장애자는 죄인이었습니다.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평생을 살아간 이 사람이 맹인의 아픔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맹인의 아픔과 고통을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맹인이 되어 보아야 맹인의 아픔을 알고, 우리 집안에 맹인이 있어야 맹인의 삶을 보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무엇을 한다는 것이 두렵고, 정상인의 도움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남산을 가보면 순환도로에서 산책하시는 맹인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도 남산에 나오실 수 있는 맹인이라면, 맹인으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잘 적응하면서 사시는 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중도 실명한 사람을 생각해보면 앞을 향하여 한 걸음 내어놓는 것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에 맹인으로 훌륭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고 강영우박사님, 모든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이 되신 분입니다. 찬송가 작사로 유명한 파니 크로스비 여사, 일생 무려 8000곡의 찬송시를 작사하셨습니다.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는 정말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맹인인데, 맹인의 고난을 극복하고 세계 정상의 가수로 우뚝 서 있는 분입니다. 12살 때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음악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 실의를 딛고 일어나서 피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악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야간에 재즈바에 나가서 피아노를 치면서 레슨비를 벌고, 32세의 늦은 나이에 성악가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여자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을 만나 함께 듀엣을 부르게 됩니다. 사라 브라이트만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신동으로 불리며 최고의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의 여주인공, 올림픽 주제가 등을 부르면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고 함께 듀엣을 부르자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time to say goodbye"라는 노래입니다. 가서 들어보세요, 얼마나 환상적인 노래인지, 그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좋아서 그의 노래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가 성공한 비결을 말합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배우기를 멈추지 마라 어제까지 배운 사람은 어제에 사는 것이고, 오늘 배우고 있는 사람은 오늘을 사는 것이며, 내일을 살고 싶다면 내일도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배우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삼중고의 장애인 헬렌켈라 여사,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헬렌켈러 여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헬렌켈러여사는 만인의 존경을 받는 위인입니다. 헬렌켈러는 미국에서 1880년 6월 27일에 태어나서 1968년 6월 1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88세를 사셨습니다. 그는 대학을 공부하고 사회사업에 뛰어들었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신 분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헬렌켈러를 깨우쳐준 설리반 여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은 ‘애클랜틱 먼스리’ 라는 잡지에 발표되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첫째 날은 제일 먼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들로 산으로 산책을 나가 아름다운 나무와 예쁜 꽃들과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 캄캄한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걸 지켜보고, 박물관에도 가고, 저녁에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다. 마지막 날에는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낮에는 오페라와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도시 한복판으로 나가서 반짝이는 불빛과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 그러고는 삼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다시 캄캄한 어둠 속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얼마나 감동적인지 진한 아픔이 묻어나오는 글입니다. 

가장 값진 감각 중에 볼 수 있는 시각이라는 것,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 임을 알아야 합니다. 

헬렌켈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명언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비록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힘도 가득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은 무시당하고, 금기시한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맹인이라고 하면 정말 무시당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죄인이었습니다. 

여리고의 길목에는 가난한 거지들이 나와서 구걸하여 먹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올라가는 이들은 마음이 선하고, 긍휼을 베풀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었기에 긍휼을 베풀고, 동정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선을 베풀지 않은 사람보다는 하나님 앞에 조금은 떳떳한 것도 같고,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동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거지들이 나와서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바디메오의 사건을 눈여겨보면 예수를 믿을 때에는 이 사람처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1.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병자도 다 고쳐주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지로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거나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혹시 여리고 길목을 지나가실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이 길을 지나가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여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들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전합니다. 갈릴리에서 12살 먹은 여자 아이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나인성에서는 죽어 장사지내려는 청년을 살려주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소외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형제로 생각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롬10: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믿음이 생겨납니다. 

목사도 성경을 보고, 녹음된 성경말씀도 잘 듣고, 다른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말씀도 잘 듣고, 잘 들어야 믿음이 생겨납니다. 

요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었는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죽을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왕권적인 메시아를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고대하던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바디메오는 지금 나사렛 예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자, 자기의 소망이요 구세주에게, 그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른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도 이 시간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나의 주님이라고 믿음으로 영접하면서 고백하여야 합니다. 삶의 변화와 기적을 가져오고 구원하는 신앙은 이성에 있지 않습니다. 제도나 어떤 직분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온전한 고백,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나의 빛, 나의 선하신 목자,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가 사는 것도 주님 때문이요, 내가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것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바른 고백과 함께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2. 열정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디메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면 금방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나무라고 꾸짖고 나옵니다. “너는 눈 먼대로 살아라, 그것이 너의 운명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잠잠하라” 고 합니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세요. 잠잠하라는 말이 말이나 됩니까? 바디메오는 더욱 소리 질러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잠잠하라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끈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주 젊잖게 믿으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낙담을 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용하라, 잠잠하라는 말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끈기 있는 기도와 끈기 있는 믿음만이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다 알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준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강청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강청해야만 들어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주기 싫은데, 하도 달라고 하니, 할 수 없어서 빼앗기는 심정으로 들어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기도의 비결은 지속성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삼삼12:23에서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전에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이제는 기도를 접고 쉬고 있습니까? 응답이 더디다고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해보았자,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기도에 대하여 의심하십니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아버지가 되시기에 나 같은 것과 대화하실 수 있는 시간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운행하시느라고 너무 바쁘시기에 사소한 나의 문제 같은 것은 관심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불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어줄 때까지 졸라대고 붙들고 늘어져야 들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려고 하는데, 우리가 빼앗아가듯이 가져가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하물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보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복을 움켜쥐고 계시며,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 복을 달라고 졸라대고, 하나님은 주지 않으려고 다시 감추시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7:9-11에 보면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눅18: 7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오래 참지 않고, 시간 오래 끌지 않고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속히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오래 끌고, 들어주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피하였지만,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간구를 신속하게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애원하는 기도, 안타깝게 부르짖는 기도에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은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였지만,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은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의 병을 고쳤다고 하지 않고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간절함만 있고, 확신이 없었다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열정과 함께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다 해결하여 주십니다. 확신하셔야 합니다. 확신하지 않고, 허공을 울리는 기도 드리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3.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메오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아오려는 사람은 주님이 모른다고 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십니다. 

요6:37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잠잠하라고 하던 사람들이 바디메오에게 말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맹인 바디메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다시는 거지 옷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결단합니다. 더러운 냄새나는 옷, 거지같이 보이려고 남루한 옷, 더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엡4:22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 같아 보입니다. 주님은 그가 오자마자 그의 눈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맹인의 확고한 의지와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눈만 고쳐주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맹인의 영혼까지도 구원하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맹인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선생님이란 말은 “랍오니”라고 하여 “나의 선생님이여”라는 말입니다. 랍비라는 말보다 더 강한 존칭이며, 간절한 애정과 존경심이 담긴 말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기 위하여 소원을 물으셨고, 맹인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간절한 소원을 말했습니다. 맹인은 볼 수 있는 능력을 소원하였습니다. 시력을 회복시켜달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돈이나 좋은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맹인의 눈이 떠졌습니다.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라갔습니다. 

“따르니라”는 말은 방향전환을 말합니다. 그의 가치관이 새로워졌습니다. 그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에 그도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너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나를 따르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눈을 뜨고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게 되었고,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 충성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살려주신 주님을 떠나서 자기의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정말 내가 주님 앞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아니,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여 이것을 원합니다. ”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지금까지 다 보고 있었으나, “주님 영안을 열어주옵소서”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정말 깊이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지 말하라고 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 하나님의 그 넓고 큰 세계, 영광스러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알찬 핵심, 이것 때문에 믿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습니다. 간절한 소원과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생애 주님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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