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명의 떡과 피 (요 6:47-59)

첨부 1


생명의 떡과 피 (요 6:47-59)


내 용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사건 중에서 규모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것이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보는데 약 1만 명 정도가 참여하고 체험한 일이고, 또 그 내용은 보기만 했던 기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먹고 배가 부른 사건이라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기적에 속합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신비로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우리 갈보리 교인들이 영아부에서부터 노인층까지 주일날 출석하는 모든 교인이 야외예배를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갈보리교회에 등록한 1만2천명의 교인이 다 모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점심식사 준비는 하나도 안 해서 빈손으로 갔습니다. 야외예배를 드리고 오락도 하고 재미나게 놀았는데 저녁때까지 있다 보니까 모두 배가 고팠습니다. “큰일 났다. 너무 배가 고프다.” 그런데 가지고 간 음식은 주일학교 학생 가운데 한 아이가 햄버거 5개와 꽁치 두 마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한번 했더니 1만2천명의 우리 교인들이 모두 다 배불리 먹고 12바구니가 남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너무나도 신비스러운 사건이 지나갔습니다. 이 요한복음 6장에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적 사건을 본 사람은 또 보고 싶어 합니다. 이제 떡을 먹은 사람들의 좋지 않은 버릇이 생겼습니다. 사람만 많이 모이면 떡을 만들어내라는 은근한 기대와 요청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온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4천명 먹이는 기적을 또 한 번 행사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만 보면 다른데 마음을 쓰지 않고 ‘설교를 왜 이렇게 길게 하시나? 빨리 끝내고 어서 떡을 만들어주시지!’ 이렇게 한 끼 배부르게 먹고 싶은 요청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오늘 말씀 6장 전면에 나오는 기적 사건인데 이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서 그런 육신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을 주시겠다고 설교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먹은 군중들에게 바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 끼를 배부르게 하려는 데는 예수님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초능력의 사건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이 일을 행하는 이가 누구냐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는 메시야로다.” 이 고백을 들으려고 행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기적을 베풀어주셨는데 군중들은 배고픈 한 끼를 해결한 그 기쁨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원히 배부른 생명의 떡을 내가 주겠다.” 오늘 이렇게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떡보다 배부르게 먹은 사람도 그 이튿날 또 배가 고파집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셨다면 그 백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백성이 되었고 결국 퇴보 문화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 생명의 영원성을 보장해주기 위함인데 그러한 일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실 때만 가능하다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설교했더니 유대인들의 오해가 또 생겼습니다.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겠느냐?” 마치 식인종을 연상하는 오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의 불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을 때입니다. 속죄의 살을 먹고 피를 뿌리는 일은 이미 유대인들의 제사 문화 속에 뿌리 깊이 전해져 내려온 사실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속죄하기 위한 속죄제를 여러 가지 형태로 드렸는데 제일 많이 드린 것이 양을 끌고 와서 제사장이 그 양의 머리에 안수를 해서 인간의 죄를 끄집어내서 그 양에게 뒤집어씌우고 운명적으로 죄가 많아진 그 양을 잡는 것입니다. 

“너는 죄가 많아졌으니까 죽어라.” 그리고 그 양을 잡아서 순서를 다 하고 양의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는 순서가 있는데 이렇게 함께 나누어 먹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영혼의 임재가 자기들의 영혼에 오시는 영적 만족감을 가져오고 자기들의 속죄를 믿으면서 영혼의 기쁨을 가져오는 제사 의식입니다. 다 그렇게 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그 제사가 무효가 됩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의 말씀이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무효라는 말입니다. 이 제사 음식을 반드시 먹어야 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살과 피도 반드시 먹고 마셔야 됩니다. 안 먹고 안 마셔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반드시 먹고 마셔야 예수님의 생명의 결부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 성찬식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이것을 기념하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를 상징화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관계를 생각할 수가 있는데 인간의 수없이 많은 관계성 중에서 가장 깊은 관계 설명을 두 가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관계의 남녀가 사랑의 최고의 표현을 결혼이라는 예식과 아울러서 하는데 이것은 “부부가 한 몸이 될지라.” 그래서 피차 살을 나누는 의식 속에 영혼의 대화를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는 1대1의 인격 승화의 결합체로서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깊은 관계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둘이 한 몸이 될지라.” 이렇게 혼합체를 말씀했습니다. 

이 관계의 내용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둘만의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 관계를 아주 신성시하고 존경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는다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하나가 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주님과 나를 승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살을 나누는 관계보다 더 진한 관계가 있습니다. 피를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것이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녀의 관계는 영원히 뗄 수가 없습니다. 나의 분신이기 때문에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도저히 떼려 해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그런 관계의 결합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래서 주님과 나는 위대한 생명의 결부가 이루어져서 떼려야 뗄 수 없고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진액이 교환되어 버려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살과 피를 물려받은 아버지의 자녀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관계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이냐?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고 이 관계를 설명할 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주님과 더불어 한 몸이 된 사람을 만약에 어떤 사람이 칼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그 중앙을 칼로 치며 “너희들을 갈라놓았다.” 그러면 그게 갈라지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관계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어떤 것도 주님과 나를 갈라놓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이 하나가 되고 피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상징화해서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 시대 제사용 양은 흠 없고 점 없는 일 년 된 어린 양을 사용했기 때문에 쓴 말입니다. 왜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 양이 죽어야 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양의 피를 대속의 피로 정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은혜의 제도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린양 되신 예수님은 바로 구약 시대의 제사와 똑같이 십자가에서 자기 피를 흘려서 오고 오는 세대에는 양 잡아서 제사드릴 필요 없이 단번에 인류 전체 구원을 마지막으로 이루시며 속죄 완성을 예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대속죄일에 온 국민이 모여서 어린 양 하나를 데려다가 대제사장이 거기다 안수하는 것은 온 백성의 죄를 네가 뒤집어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너는 이렇게 죄의 덩어리가 되었으므로 살려둘 수가 없다.” 그래서 죗값으로 그를 죽이고 인간들의 죄는 속죄함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제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이 대신 지셨으므로 어쩔 수 없이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 속죄가 됩니다. 단번에 제사를 드려주신 것이 바로 기독교인데 왜 내가 죄를 짓고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느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은혜의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의 피의 속죄 능력을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은혜의 길을 믿으면 되는 간단한 원리의 기독교 종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 다른 데 가서 구원을 찾지 말라. 내게로 오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 뭐가 쉽고 가볍습니까? 믿으면 됩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미 예수께서 다 치러주신 속죄의 능력 가운데 그래서 내가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가지면 아주 쉽고 가볍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장점이란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어느 종교는 무거운 짐을 지어서 인간을 더 못살게 구는 종교가 세상에 흔하게 많습니다. 이 십자가 종교는 우리를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부터 자유하게 했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재판관이 “너는 죄가 없다.”라고 선언하면 끝났습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현장에서 그냥 걸어서 바깥으로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가 어떻든지 아담 때부터 원죄를 받았든지 말았든지 상관없이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순간,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순간 내 죄는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장점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죽는 것입니다. 예수의 구원은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영생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에 “사망으로부터의 자유함” 이런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모든 두려움과 공포에서 자유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살면 양심의 고통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내가 큰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 죄를 가지고 있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를 해버리면 다시는 기억치 않는다는 양심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함, 자유의 인간됨을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교가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명을 놓고 “이것은 내가 마셔야 할 잔”이라고 결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결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1절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 속죄의 길을 내가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자신이 치러야 할 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고난의 잔을 마셨고 고난의 길을 떠났으며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고자 이 성찬을 이렇게 배찬 하였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까? ‘나도 주님을 위하는 일에는 살을 떼는 아픔과 피를 흘리는 결단의 마음으로!’ 이렇게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후로 이 세상의 모든 나의 자녀들 가운데 나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자들에 의하여 세상은 구원의 길이 넓어질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사명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런 사명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성찬과 이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뉴멕시코주 알버버지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장로교가 운영하는 요양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요양원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한 대학생이 어떤 처녀를 사랑했는데 아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정말 좋지 못했습니다. 이 청년은 대학을 졸업한 후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건강이 계속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는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그 청년을 물리칠 수 없고, 또 이 세상에서 나에게 대한 지극한 관심을 저렇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어 우리 결혼하자고 결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점점 나빠집니다. 그가 다니던 신학교와 관계가 있는 요양원이기 때문에 뉴멕시코주 알버버지 요양원에 가서 건강 회복을 위해서 요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녀의 부모들은 딸에게 날마다 그 청년을 단념하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의 건강이 결혼 생활을 절대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결혼해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처녀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사랑의 감동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뉴멕시코주에 있는 이 요양원으로 가니까 자기는 버지니아에 사는데 거리가 멀어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알버버지에 있는 이 요양원을 찾아왔습니다. 원장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내가 이 요양원에서 뭐든지 시키면 열심히 일할 테니 여기 있게만 해주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서 요양을 하고 있는데 그는 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랬더니 그 원장이 “그러면 여기서 나의 비서를 하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래서 원장의 비서 일을 보면서 그 월급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치료비를 대신해주면서 옆에서 돌보며 지극한 사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건강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의사의 진단이 일주일 밖에 살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길어야 일주일이라는 시간입니다. 그랬더니 이 처녀는 그곳에서 일하는 목사에게 찾아가서 빨리 이 사람이 죽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누구도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일주일 밖에 살수가 없는데 왜 결혼식을 하려고 하느냐?” 그랬더니 “살아있을 때 결혼식을 올리면 내가 그의 이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의 흔적을 내가 영원히 가지고 살고 싶어서 그럽니다.” 미국에서는 결혼하면 남자의 성을 따릅니다. 

그러니까 “Last Name을 가져 호적에 올리고 그의 이름을 갖고 내가 평생을 살겠습니다.” 그렇게 간청을 해서 할 수 없이 환자를 놓고 결혼식을 올려주었습니다. 정말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에서 그 부인이 조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이제 나의 사명이 이 요양원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아내가 되어 주리라. 그리고 어머니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남편과 사랑을 나누던 그 요양원을 90세까지 떠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으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면서 용기를 주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요양원의 원장이 되어서 책임자로 90세까지 일을 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우리나라 한경직 목사님도 그 요양원에 가서 2년 동안이나 그분의 지극한 정성을 받으면서 건강 회복이 되신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돌아가시면서 이름 하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앞으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 이름으로 살고 내 이름을 위해서 살고 죽으라.”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지금 평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 살과 피를 마시면서 먹으면서 나를 기념하라.” 이렇게 하셔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그의 이름을 우리가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하는 마음의 결단을 가지고 이 성찬에 참여하고, 세상이 다소 고난스러워도 내가 주님이 된 그런 마음으로 그런 믿음의 고백으로 세상을 담대하게 이겨가는 힘과 능력의 영적 샘이 되기 위한 피와 떡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 성찬의 떡과 잔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늘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이 성찬에 참여하고 나도 어느 때는 주님을 위해서 내 희생의 피를 흘리고 헌신의 아픔의 살을 떼는 마음의 결단으로 이 잔을 들게 하시고 떡을 먹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