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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직장선교] 일에 능숙한 사람 (잠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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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능숙한 사람 (잠 22:29)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인지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다니엘 레비틴(Daniel J. Levitin, 1957~)이라는 캐나다 몬트리올 맥길대학(McGill Univ.) 교수의 연구에 의해서 주창된 이론입니다. 

어느 분야건 세계적인 최고 수준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레비틴 교수는 작곡가, 야구선수, 소설가, 피아니스트 등 다양한 분야를 조사해보니, 어느 분야에서든 1만 시간보다 적은 시간을 연습해 세계 수준의 전문가가 된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두뇌가 진정한 숙련자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1만 시간 정도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해석했습니다.
  
1만 시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3시간씩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하루에 6시간씩 한다면 최소한 5년은 그 일에 몰두해 연습해야 나오는 분량입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 엄청난 노력입니다. 그만큼의 노력을 했다면 세계 최고는 아닐지라도 세계적인 전문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나는 이 분야에 전문가야’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의 시간들을 보면, 우리는 최소한 무언가 한 가지에 전문가들이 되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능숙하다’는 말은 ‘민첩함과 솜씨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말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처리함에 있어 민첩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잘 알기에 주저하지 않고 재빠르게 처리합니다. 또한 능숙한 사람은 그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서투르지 않습니다. 전문가답게 아주 솜씨 있게 처리합니다. 이런 사람은 존귀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존귀한 자리에 서게 될지언정 천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유명한 연주자나 운동선수와 같은 전문가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단 운동선수나 어떤 예능인들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비록 1만 시간의 법칙에 다다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 때 대충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게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 잘못된 신앙 때문에 자신의 삶에 게을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그 놀라운 장면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해 줍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다시 오실 것’이라는 그 말씀에 따라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들이 살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강렬한 재림신앙을 갖고 살았습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긴박감을 갖고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일지 내일일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게으르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곧 주님이 오실 것인데 뭐 하러 열심히 일하느냐?’고 말입니다. ‘주님 곧 오실 것이니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 나눠먹고 주님 오시면 주님 맞으면 되는 것 아니야?’ 라는 생각 때문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10)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신앙의 그 어떤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밤에 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열심히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기다리는 삶을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마태복음 24:40-41) 

여기서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남자가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음을 말씀한 것이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다는 것은 여자가 집안에서 가족을 먹이기 위해서 열심히 가정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주님의 영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던 일 멈추고 기도한다고 골방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해야 할 일 하지 않고 성전이나 회당에 모여서 성경공부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는 주님의 영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가족과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곳이 어디이든지 그곳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파송하실 때 교회당 안으로만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과 일터,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든 삶의 자리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내가 직장이나 일터에서 내 가족과 직장과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어디이든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표현으로 한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능숙하게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능숙하다’는 말은 ‘민첩하고 솜씨 있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민첩하고 솜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능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앞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무리 1만 시간의 세월을 보낸다 하더라도 그 시간들 속에서 열심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루에 3시간씩 10년 동안 일하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고 하는데, 그 3시간을 대충 시간만 때우는 식으로 허비한다면 10년이 아니라 100년의 세월이 흐른다 한들 어떻게 전문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시간 속에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시간을 아끼며 능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지 그는 최고의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상황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아버지 몰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가 한 순간에 노예가 되어 산다고 하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때에 늘 좋은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채색옷’이라고 말합니다. 채색옷은 소매가 손바닥까지 이르는 긴 옷을 말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그런 옷을 입지 않습니다. 간편하게 입어야 일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렇게 손바닥에 이르는 긴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는 일을 하지 않고 자랐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나는 일해보지 않아서 일을 잘 못한다’고 주인이 시키는 일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해보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노예로서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 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인 보디발이 그의 그런 성실함과 노련함을 보고 그를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만약 요셉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처럼 주인이 볼 때에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하다가 주인의 눈길에서 벗어나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농땡이나 치고 그렇게 했다면 그는 결코 가정 총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창세기 39:4) 

여기 ‘섬기다’는 말은 종이 주인을 섬긴다고 할 때도 쓰는 표현이지만, 동시에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종이 주인을 섬기는 모습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이 주인 보디발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랬기에 주인 보디발이 그 섬김에 감동을 받고 그를 가정 총무로 삼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들은 주인을 그렇게 섬기지 않습니다. 주인이 보는 데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하다가, 주인이 보지 않으면 대충대충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보든 보지 않든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요셉만의 태도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모든 신앙인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에베소서 6:5-7절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눈가림만 하는 것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인이 볼 때에는 열심히 하는 척하다가 주인이 보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주인이 보든 보지 않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마치 주님을 섬기듯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혹 직장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남 아래서 일하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눈가림만 하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그 진심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보는 앞에서는 열심히 하는 척하다가 보지 않는다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과 보든 보지 않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분명 다릅니다. 

요셉이 그렇게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요셉의 삶을 통해서 보디발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보디발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바로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며 바로를 호위해 주는 사람이 보디발입니다. 

당시 바로 왕은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던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최고의 신이 ‘태양신 라’라는 신입니다. 바로는 그 ‘태양신 라’를 섬기는 제사장 가운데 우두머리였습니다. 왕을 ‘파라오’(바로)라고 부르게 한 이유도 태양신 라의 자손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태양신의 최고 제사장으로서 바로는 자주 태양신 앞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은 바로가 태양신 앞에 가서 제사를 드릴 때 늘 그 곁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보디발 역시 태양신을 열렬히 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보디발이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고, 여호와께서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창세기 39:3) 

요셉이 어떻게 했길래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그렇게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예배당에 가서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입니까? 요셉이 부르는 찬송소리가 심금을 울리는 감미로운 찬양이었기 때문입니까? 

성경은 요셉이 기도했다거나 찬송을 불렀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디발이 본 것은 요셉이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다른 종들과 달리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면 볼수록 요셉은 그가 믿는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터나 직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찬송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믿는 신앙으로 인해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상관들의 눈치를 보며 일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듯이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보디발은 자신의 집이 복을 받은 것은 요셉 때문이고, 요셉이 믿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가정의 모든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 요셉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정에 더 복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터에서 주님을 섬기듯이 성실하게 일하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요셉과 같이 나로 인해서 내가 일하는 일터가 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짧은 시간에 그렇게 되진 않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과 같이 오랜 기간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런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실제적인 이야기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강철왕’이라고 불리는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카네기가 철강업에 정열을 쏟고 있을 때였습니다. 공장을 수시로 순시하던 그에게 한 사람의 철공이 특별히 눈에 띠었습니다. 그 철공은 늘 말이 없이 맡은 바 자기 일에 몰두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세는 언제나 진지하고 자신감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래서 카네기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우리 회사를 맡겨도 책임 있게 운영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는 그를 사장실로 불러서 회사를 위해 공장장의 일을 맡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제안을 하면 마지못해 수긍하는 것처럼 해서 그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습니다. “사장님, 난 다른 일은 못합니다. 평생 해본 일이라곤 쇳물에서 철관을 뽑는 일밖에 없으니 철공 일이야 대통령이죠. 그런데 다른 일은 사양하겠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카네기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렇소, 내가 생각이 부족했었소. 당신이야말로 우리 회사의 가장 중요한 보배입니다. 당신이 세계 제일의 철공이니 오늘부터 대통령 봉급을 주겠소.” 그래서 그 철공은 그 회사에서 가장 많은 봉급, 대통령이 받는 봉급과 같은 액수의 봉급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한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가 있는 그 자리는 자신만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회사를 위해 일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 자리가 회사의 자리가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일한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가 됩니다. ‘자신만을 위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이 될 때에는 열심히 일하지만 자신에게 유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그 자리를 버릴 수 있습니다. ‘회사를 위한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손해가 되고 힘들지라도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몸 바쳐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알기에 내 이익과 관계없이 작은 일 하나하나에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일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자리는 어디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그런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게 신앙인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가 쓴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그 책에서 근대 서유럽의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기독교 사상이 얼마만큼 큰 의미를 갖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기독교가 사회 경제적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가 사회와 경제의 발전에 기여한 원인을 네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째가 정직이고, 둘째가 부지런함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검소함과 절약하는 마음가짐이고, 네 번째가 저축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니까 신용이 높아지고, 부지런하니까 수입이 오릅니다. 수입은 오르는데 검소하게 절약하며 살다보니 저축을 많이 하게 되고, 저축한 재산을 낭비하지 않고 국가에 세금으로 성실하게 납부하고 남은 것으로 재투자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사업도 확장되고 나라의 경제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자본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배경에는 성경적인 생활윤리가 터를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막스 베버는 그렇게 기독교 생활윤리를 실천하여 성공한 사람으로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크린은 미국 건국 초기에 활약하였던 인물로 대통령직을 제외하고 당대에 중요한 직책을 골고루 수행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를 일컬어 미국을 산업국가로 발전시킴에 정신적 기초를 놓은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의 부모는 영국의 청교도였는데,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미국에 와서 그의 부모님은 세탁비누와 양초를 만들어 팔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학교를 1년 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녀들을 신앙으로 가르쳤습니다. 
  
훗날 성공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부모님이 가난하여 학교교육이라고는 겨우 1년 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나에게 잠언 22:29절의 말씀을 체득(體得)시켰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영어 성경으로 ‘자기 일에’라는 말이 ‘in his business’입니다. 이 말씀대로 자신의 비즈니스에 부지런하여 성실히 산 결과 그는 성공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회상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일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주부가 가족을 위해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방을 청소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입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입니다. 직장에서 남 아래에서 일한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는 어떤 자리이냐 하는 것이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이면 종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존귀하게 해 주십니다. 사원이면 사원으로서,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가정주부이면 주부로서 내게 맡겨주신 것을 성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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