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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스겔, 준비되었나? (겔 24: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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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준비되었나? (겔 24:15-27)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이 다스리던 어느 날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당시 블레셋 군대는 병거가 삼 만, 마병이 육천 명이었고, 군대는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겁에 질려 굴과 바위틈과 웅덩이에 숨었습니다. 

이 전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울 왕에게는 용맹한 왕자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4장 6절을 보면 요나단이 그의 부관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의 말은 간단했습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줄 믿는다, 그대는 나와 함께 적진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부관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기꺼이 요나단과 함께 적진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요나단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4장 7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두 사람은 적진을 향해 뛰어든 결과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으로 인해 블레셋 진영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고,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기회를 잃지 않고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요나단과 그의 부관은 그날 최고의 영웅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도 이런 작전을 수행하길 원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작전에 참여할 특공대원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저는 땅끝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작전 파트너가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파트너가 될 특공대원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는  소중한 것들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화에 보면 은퇴한 영웅에게 옛 상관이 찾아옵니다. 상관은 힘든 제안을 합니다. <이번이 마지막일세. 한 번만 나랑 함께 하세. 갇혀 있는 전우를 구해야 할 게 아닌가?> 고민하던 영웅은 상관을 따라 나섭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상관과 함께 작전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과 에스겔 선지자의 합동 작전을 언급합니다. 그 작전의 목적은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전해 왔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으므로, 한 번 더 강력하게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 

<에스겔, 너랑 나랑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한 번 더 강력하게 경고하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유다의 멸망이 임박했고, 그 날이 오면 정말 처참하게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에스겔은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16절을 보세요.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전을 위해 에스겔이 기뻐하는 것을 빼앗는다고 하셨고, 에스겔은 소중한 것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게 선지자들의 고단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에스겔이 감당해야 할 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뜻밖에도 아내를 잃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이고, 한번 잃으면 다시는 만회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에스겔이 처음 선지자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가 30세였던 주전 592년인데, 본문의 사건이 있었던 때는 그가 34세 되었을 때니까, 그의 아내는 젊고 한창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아침에 주위 백성들에게 말했는데, 그 날 저녁에 아내가 죽었습니다. 얼마나 슬펐을까요? 

그런데 그가 감당해야 할 짐은 아내만 잃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보통 사람처럼 슬퍼할 수 없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수건을 풀고 머리를 풀었습니다. 수건은 머리에 쓰는 관을 상징하는 것인데,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모든 영광을 내려놓는 행동이었습니다. 또 신발을 벗고 맨 발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입술을 가리고, 초상집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아내가 죽더라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6~17절을 읽어봅시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상한 행동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 머지않아 백성들이 아끼는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길 때가  오며, 그 때는 너무 위급하여 슬퍼할 겨를도 없을 것임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작전을 잘 수행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최고의 파트너였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라고 했습니다. 그는 수건을 풀지도, 머리를 풀지도 않았고, 모든 것을 평소처럼 했습니다. 가슴으로는 울면서도 겉으로는 울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에스겔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19절을 보면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라고 했지요. 그는 백성에게 대답했습니다. 

20-24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 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너희가 에스겔이 행한 바와 같이 행하여 입술을 가리지 아니 하며 사람의 음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두고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되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그는 전해야 할 말씀을 남김없이 전했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으라. 이대로 버티다가 유다가 망하는 날이 오면 그대들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큰 재앙의 날이므로 슬퍼할 틈도 없을 것이다. 가족들의 장례를 치를 시간도 없을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임하는 재앙은 무섭습니다. 너무 처절하고 비참해서 슬퍼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를 향한 경고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도 부정하고, 심판을 부정합니다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심판도 유효합니다. 

4세기 로마제국에는 <배교자 줄리안>이라고 불리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다시 이교로 돌아가고자 했고, 많은 사람을 순교하게 했습니다. 그가 한 그리스도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그렇소.>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내 주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줄리안이 비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네 주가 살아 있다고? 그렇다면 지금 그 나사렛의 목수는 너를 살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그 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폐하 같은 사람을 위하여 관을 짜고 계십니다.> 이 일이 있은 그 다음 해인 363년 6월, 줄리안은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어가면서 남겼다는 말이 유명합니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진정한 승리자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청종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 앞에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청종하고 말씀 앞에 진지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본문의 에스겔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내를 드려가면서 하나님의 파트너로 작전에 참여한 특공대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기에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가장 소중한 마지막 한 가지를 받고 드릴 수 있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시시한 것으로 거래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서 하나 밖에 없는 그의 아내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기꺼이 아내를 드렸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목숨까지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 분께 무엇을 드리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분이 먼저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주셨기에 우리도 기꺼이 우리 생명까지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이런 관계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빛나는 분들은 하나님과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격하고 있었기에 자신들도 기꺼이 소중한 것들을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그런 분들 중 한 분입니다. 손동인, 손동신, 두 아들이 여순반란사건 당시 공산당원 청년들에게 순교하여, 그 슬픈 장례식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분은 아홉 가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왔으니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쩌면 이렇게 귀한 보배 사역을 나에게 맡겨주셨으니 감사.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하신 나의 축복을 감사.  넷째. 두 아들이나 순교 하였으니 감사.  다섯째. 누워서 죽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복인데 끝까지 전도하다가 총살로 순교 당했으니 감사.  여섯째. 미국을 가려고 준비 중이었던 두 아들을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에 보내주셔서 내 마음을 안심케 하시니 감사.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시킨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맺어 질 것이 믿어지니 감사.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의 진리와 사랑과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손 목사님은 <어때? 출동 준비 됐어?>라고 묻는 하나님께 <준비 다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고, 두 아들을 드리는 작전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그리고 감사했으니, 그 작전명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수하게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오 분 대기조처럼 대기하고 있다가 즉각 응답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작전에 자신을 드리고, 가족을 드리고, 재물과 시간과 생명까지 드렸습니다. 이런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수행하신 모든 작전들 중에서 최고의 작전은 무엇이었으며, 그 파트너는 누구였을까요? 그 작전은 <인류 구원>이었고, 작전 파트너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작전 계획에 따라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목수로 사셨고, 그 후 제자들을 불러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가르치셨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형벌을 대신 당하셨으며, 부활하심으로써 생명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최고의 파트너이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 준비됐어?> 여러분,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늘 출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렇게 출전하여 전사한 특공대원처럼 살다 가신 분의 시를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그 분은 <윤동주 시인>이고, 읽어드릴 시의 제목은 <십자가>입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하나님 뜻을 위해서라면 꽃처럼 피어나는 자신의 피를 조용히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 피를 억압당하는 우리 민족을 위해 흘렸습니다. 그는 순국열사요, 동시에 자기 십자가를 진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신약성경을 닳도록 읽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기로 작정했던 분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길 원했던 자신의 소원대로 살다가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은 그런 것입니다. 신앙은 할 일없는 사람들의 시간 때우기나, 갈 데 없는 사람들의 유흥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새털처럼 가볍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우리네 삶을 비장하게 하고, 장엄한 희생으로 속을 채워, 거룩한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때로 그 짐이 무거워 넘어질 때, 비로소 <나도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작은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기에 조금은 덜 부끄럽게 됩니다. 이 십자가 안에는 분노를 참음, 미움을 버림, 욕심을 비움, 마음을 낮춤, 더 많이 사랑함, 예수님을 더 사모함, 얻음보다 줌으로 얻는 감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성령님 안에서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에 충만했을 때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주님 제단에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참음도, 버림도, 비움도, 낮춤도, 더 사랑함도, 더 사모함도, 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제자의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선배들에 의해 아름다운 복음이 이 세상에 널리 퍼졌고,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너, 준비됐어?>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최후의 작전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 최후의 작전명은 <우리 구원하기>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천국으로 불러 가시는 작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작전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작전을 위해 언젠가는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너, 준비됐어?> 그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과감히 버리고, <예, 준비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길 원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 벌레 먹은 생명을 드리는 대신,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도 모두가 그 때를 위해 늘 준비되어 있길 원합니다. 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무거운 십자가>를 가볍게 질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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