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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욱 큰 은혜 (약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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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큰 은혜 (약 4:1-10)

한국의 개신교는 믿음과 기도의 능력이라는 광맥을 찾기는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몰랐습니다. 마치 큰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써야 될지 모르는 사람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숫자놀음과 크기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데 그 유산을 이용했습니다. 그 결과로 교인들 숫자는 많아지고 교세는 커졌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유산이 너무 빈곤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재물을 구한다든가 건강을 구한다든가 개인의 소원을 이루는 도구로 쓸 뿐입니다.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무속신앙이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비는 대상만 다를 뿐 비는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걸 굳이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구하고 싶은 것을 구하는데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게 원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였느냐. 그건 아니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어른들 그들의 공로와 업적이 불분명합니다. 분명히 한국교회를 키우기는 했는데 우리가 배워야 될 대상이 아니라 배워서는 안 될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쌓아올린 업적만큼 그들이 끼친 손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한 사람도 많지만 그들 때문에 예수 안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본인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어른들은 사울 왕과도 같습니다. 부모와 같은 존재인데 배워서는 안 될 어른이 돼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한 순간에 인간의 욕심이 떠나간 줄로 알았는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육신의 욕심은 변장을 해서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헌신하면 인생의 욕심이 떠나갈 줄로 생각하지만 헌신한 후에도 욕심이 여전히 다른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공로를 세우면 인간의 욕심의 문제가 해결될 줄로 알았지만 공로를 세운 후에 욕심은 여전히 다른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육신의 욕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모르는 채 믿음과 기도를 배워놓으니까 그것을 육신의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 써버리는 것입니다. 교수가 똑같은 과목을 가르치더라고 과거 강의 노트를 폐기하고 새 원고를 쓰듯이 우리가 똑같은 믿음을 가르치지만 그 내용을 새롭게 정리해야 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불만이 많아요. 남의 얘기하듯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만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멋있게 들리지만 남의 얘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요. 우리가 불만이 많아요. 과거보다 살기가 나아졌다고 하는데 여전히 불만이 많고 이 불만의 불똥이 서로에게 튑니다. 서로 남을 탓하기에 바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개 때문이다.’라고 탓하기에 바쁩니다. 정치처럼 불만을 표출시키기에 좋은 도구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치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불만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불만이 적었다면 덜 정치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하는 말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압니다. 경제가 더 잘되지 못하는 이유가 특정 정치인 때문이 아니에요. 남북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이유가 특정 당 때문이 아니에요. 환경문제가 심화되는 것, 한반도가 열대국가가 되는 것, 그게 어찌 특정 정치인 때문입니까. 이쯤 되면 상식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를 탓해야 됩니다. 이웃나라 미국의 예를 들면 오바마가 취임하기 전에 벌써 금융위기가 터졌어요. 그때 벌써 경제가 안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공화당은 미국경제가 안 좋은 이유가 오바마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정치적 수사학이지 진실은 아닌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저마다 자기 불만을 말하면 그것이 민주주의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사회가 더 시끄러워집니다. 몇 달 전 교회 오는 길에 어느 아파트 앞에서 철야 농성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도 몇 주 동안이나. 농성을 하려면 직장에서 할 것이지 왜 남이 사는 아파트 앞에 와서 농성을 합니까. 그것도 24시간. 남들을 최대한 불편하게 하고 남들의 속을 있는 대로 긁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나는 이렇게 하겠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당신이 내게 이렇게 해 달라. 사회가 나에게 이렇게 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만 많아요.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사람은 없고 정부가 이렇게 해 달라, 대통령이 해 달라, 교회가 해 달라, 부모가 해 달라, 이런 요구하는 사람들만 많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세상에서 누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 있습니까. 누가 나에게 빚을 졌기에 내게 잘해줘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이 나에게 빚진 것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잘해줄 의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유산을 다 써버리고 나니까 흉년이 와서 먹을 것이 없는데 아무도 탕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nobody gave him anything - 아무도 주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게 세상이에요. 그게 현실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아니면 누가 무엇을 주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지 않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려면 하나님께 구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얻기 위하여 싸우고 그래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더 싸웁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인간의 괴로움은 그의 욕심에 대한 징벌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불교라면 이런 상황에서 욕심을 없애라고 말하겠지만 야고보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크나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만 2절, 3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불교에서는 구할 대상을 말하지 못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하고 다만 구해도 얻지 못할 경우는 정욕으로 쓰기 위하여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일이 약간 복잡해집니다. 아마 여러분 생각에 ‘아, 내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라면 기도의 내용을 약간 수정하면 되겠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얌체 같은 생각입니다. 거기에는 더 큰 신앙적인 문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야고보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첫째로 우리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다는 말은 세상과 친구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4절 후반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다는 말은 세상과 벗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적인 것을 즐기고 우리의 사고방식이 세상적이고 세상과 익숙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을 좋아하고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벗되는 것은 하나님과 스스로 원수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편하지 않고 마음이 즐겁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했을 때 제일먼저 하나님께 불평하는 게 아니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닫고 회개로 시작해야 됩니다. 세상과 벗이 되어 있는 한, 우리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5절에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만 얻으면 만사형통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성령의 감동이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성령의 감동이 즐겁지만 내가 세상과 벗되었을 때에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고 안타까워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는 것을 느끼게 하시기 때문에 회개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성령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기도하게 만드시고 회개하게 만드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교회로 인도하시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순종해야 됩니다. 

둘째로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됩니다. 겸손해야 됩니다. 이것이 진실한 회개입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는 회개는 입술로만 회개입니다. 회개는 필연적으로 애통함과 또 눈물과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을 수반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어렵습니다. 

6절 말씀에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어떻게? ‘순복할찌어다’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자기의 불만을 외치는 한은 하나님께 순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복한 사람은 잠잠합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해놓고 자기주장을 한다면 그건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한 게 아니에요.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 그게 제일 어려워요. 저에게도 어렵고 예수님에게도 어려웠어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읽어보신 분은 예수님에게도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같이 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에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 부분이 제일 어렵지만 이것을 잘 인내하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집니다. 

세 번째로 10절 말씀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낮추는 일은 우리 자신이 할 일이요, 높이는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높이려 하는 것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일이 훨씬 쉽고 편안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도 주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훨씬 더 쉽고 빠릅니다. 이것이 바로 더 큰 은혜입니다. 

6절 말씀에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이미 은혜를 받았지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주님에게 순복하고 우리 자신을 낮췄을 때 주님이 우리를 높이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쉽고 훨씬 더 평안한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은혜에요. 

오늘 제가 이 구절을 설교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대로 해 보았더니 효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통하여 증빙한 진리에요. 만일 사람들이 해 봐도 안 되더라 그랬다면 벌써 오래전에 이 말씀을 폐기처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보니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전히 이 말씀을 읽고 배우고 가르치고 강조하고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경험상으로 증빙한 검증된 하나님의 진리임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이에요. 

원래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것을 배웠습니다. 제자들도 이것을 실천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것이 왜곡돼서 열매만을 강조하고 유익만을 강조하고 결과만을 강조하고 그 결과를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고 이것을 우리의 특권으로만 생각하고 거기에 인간의 육신의 욕심이 합류했더니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먼 이상한 신앙이 돼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의 육신의 욕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시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신 후에 마귀의 시험이 왔다면 우리가 무엇을 받든, 성령의 권세를 받든, 은사를 받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능력을 소유하든, 모든 비밀을 알든, 예언을 하든, 방언을 하든, 어떤 공로를 세우든 그 자체가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시험은 어느 때든 옵니다. 

인간은 어느 때든 시험에 취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우리 자신을 살피고 내가 세상과 벗되지 않았는가를 늘 살피고 그리고 우리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뜻에 순복하고 그리고 싸울 생각, 다투려는 마음, 불만스러운 마음이 많아질 때 이것이 세상의 탓이 아니고 내 안에 영적인 문제가 있는 증거라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주님 말씀대로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얼마나 꺼림칙한 일입니까. 

성도가 열심히 기도하는데 잘못 구하고 있어요. 성도가 열심히 구하는데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어요. 그 자체가 해괴망측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거기에서 우리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우리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순복하고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고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고 낮추면, ‘주 앞에서 낮추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 개신교인들은 겸손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 더 큰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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