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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화된 신앙 (빌 1: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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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화된 신앙  (빌 1:20-30)

 
내 용 

금년의 교회 표어가 “제자화”입니다. 이 표어는 효과가 있어야지 표어로 지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제자화된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이제 벌써 10월이 되었는데 우리가 표어에 맞게 신앙생활을 훌륭하게 하고 있는지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범학교에서 앞으로 선생님이 되려고 입학한 학생들에게 제일 먼저 강조하는 교육이 있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가르치려고 여기 왔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성숙한 인간양성”입니다. 

“바람직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우리 인간의 본성을 성경에서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도 인간들에게 죄를 가르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성이 죄인이라서 자연히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죄를 만들게 됩니다. 교육의 효과로 말하면 온 세상이 선으로 가득해야 되는데 죄로 충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죄성의 세상은 인류 초기부터 성경에 나타납니다. 

창세기 6장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모두 쓸어버리는 심판을 내릴 만큼 인간의 죄성은 가득해졌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나아졌는가? 절대 아닙니다. 아마 하나님이 더 한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류의 종말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끝이 없는 선에 대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 소용이 없는 일인가? 그래서 그 해결 방법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 받을 세상에서 너희는 구원을 받으라.” 그 구체적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너희 구원을 찾으라.” 이것이 기독교가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 사건은 인간이 죄를 못 짓게 하는 효력보다 지은 죄를 용서하는 효력이 더 큽니다. 

이러한 진리를 접한 사람들이 가는 길이 생기는데 오늘 말씀에 바울이 말했습니다. “온전히 반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고 내 삶의 목표가 뚜렷하게 정해졌는데 그것은 나를 통한 그리스도의 존귀성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21절에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렇게 삶의 목표가 완전해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완성의 존재가 아니고 미완성의 존재인데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정하고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뿐이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생의 목표를 정해놓고 “미완성자인 내가 그 완성자를 향해서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순례의 길을 가는 그것이 인간 존재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곡의 벽에 가시면 볼 수 있는 광경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열두 살 아들을 데리고 제사장 앞으로 옵니다. 성인식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일찍 합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살라고 맹세를 시킵니다. 그러면 열두 살 된 아들이 서약을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기도를 받고 그 자리에서 나팔을 불고 춤을 추게 해서 “너는 이제 열두 살이 되었으니까 너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다 그때가 되면 자기 삶을 자기가 책임 져야 한다.” 이런 의식을 행합니다. 성인식을 일찍 하고 “이제 너는 성숙한 남자이다.” 인정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몸담고 있었던 PCUSA 미국 장로 교단은 성숙한 크리스찬의 삶에 대한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정했는데 제가 오늘 소개하려 합니다. 예수를 믿고 살면서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이 과연 제자화된 삶인가? 여기서 몇 가지 정한 게 있습니다. 그 첫째가 뭐냐? 건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건강하도록 노력하라.” 왜 그러느냐 하면 신학적으로 이 자아는 아가페 사랑의 주체라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가페적 사랑인데 너도 그렇게 살라고 했으니까 나라는 이 주체가 아가페 사랑의 주체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너 자신의 존재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절대 자학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를 멸시하거나 학대를 안 합니다. 고행 종교, 금욕 종교도 아닙니다. 나도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는 오늘 말씀에 나왔습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몸의 건강 유지를 위해 나라고 하는 이 주체가 풍성한 삶을 살아야 아가페 사랑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지면 아무것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통계로 발표한 것인데 마라톤 선수는 암에 걸리지 않는다고 나왔습니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통계가 그렇게 나왔습니다. 왜 그런가? 면역성을 키웠기 때문에 병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이 다 땀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마라톤 선수들은 건강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통계에 나왔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이 건강의 문제 때문에 초기부터 금주, 금연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성과를 봤습니다. 그 성과가 뭐냐? 한국 교인들은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술과 담배를 못하게 하는 것을 좀 율법적으로 해서 그렇지 아주 잘한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10년 동안 설교를 했지만 술 좀 마셨다고 지옥 가는 것과 같이 설교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담배 핀다고 저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설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에는 절대 나쁘다고 설교를 합니다. 결정적으로 나쁩니다. 치명적 타격을 줍니다. 얼마 전 신문 발표를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 먹고 생긴 질병 때문에 지난 5년 동안 진료비가 1조2천8백억이 들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89.4퍼센트가 남성 환자였으니까 확실한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술을 많이 마십니다. 

그런데 내가 보니까 이 술 문화가 외국과 우리나라가 아주 다릅니다. 외국에서는 사람들이 그 술 마시는 자체보다 분위기로 먹습니다. 그래서 와인 한잔을 들고 이야기 재료로 그냥 서로 뻣뻣이 이야기하면 심심하니 손에 무엇을 하나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몇 시간씩 하도록 술 한 잔이 없어지지 않고 한 모금 마시고 분위기 삼아서 마시는 문화인데 폭탄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폭탄을 들이마시니 속이 견디겠습니까? 간질환, 위염, 심장병, 간질, 정신장애, 기억력 감퇴는 모두 그것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TV 프로 가운데 뽀빠이 선생이 사회 보면서 농어촌 동네 노인들 대담하는 교양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제가 그 프로그램을 보니까 미리 시나리오를 짰나 봅니다. 부인들로 하여금 과거 남편들이 속 썩인 사건 폭로전입니다. 하도 속이 상해서 몇 번이나 보따리를 쌌느니, 도망갔다가 자녀들 불쌍해서 돌아왔느니 하는 이야기를 부인들이 남편들을 앞에 세워놓고 추억이라고 재미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인 첫째가 술이고 둘째가 도박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건강하게 사려고 금주, 금연, 도박 문제 금한 것은 한국 교회의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결혼식이나 축하 잔치에서 와인 한잔씩 축배를 했다든지 건강상 조금 이용하는 것을 말하는가? 몸과 인격을 다 망가뜨리는 술 문화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회가 금해야 합니다. 여러분! 담배 한번 잘못 피웠다가 폐암 걸린 환자가 타임 잡지에 나와서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위험하다. 나는 평생 담배를 안 피다가 호기심 때문에 담배 한 대 피웠다가 니코틴이 폐에 달라붙어서 이것이 암에 된 사람이다.” 이렇게 상세하게 타임 잡지에 나왔습니다. 건강 보존은 나 자신입니다. 담배 한 대만 잘못 피워도 그렇게 큰 병이 생겨서 죽는데 365일 입에다 담배를 대시니 입이 견딜 수 있겠습니까? 건강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찬 제자들은 건강을 해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풍성하고 훌륭한 제자로 사는 것이라고 정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할 일을 찾은 사람이 예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할 일이 큰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능력과 은사에 맞는 일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70대의 사람과 20대의 할 일이 다릅니다. 또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이 있고 아이큐가 낮은 사람이 있고 상관없습니다. 얼마든지 자기 사명을 자신이 찾아야 합니다. 저에게 은퇴한 목사님들이 많이 찾아오십니다. 이야기도 나눕니다. 제가 꼭 물어봅니다. “은퇴하시고 나서 어떠십니까?” 저도 장래 은퇴할 거 아닙니까? 반드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은퇴하고 한가할 줄 알았는데 나는 더 바빠.” 그 사람은 할 일을 찾은 것입니다. 

자기 필요를 자기 안에서 분명히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할 일 없어서 죽겠다.” 이런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간을 잘 보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문화생활의 보편화로 시에서 경비를 들여서 수백 명씩 모아놓고 무엇을 가르쳐주는 것을 많이 합니다. 할머니들이 발레를 하고 댄스를 하십니다. 서예, 미술, 등산, 독서회, 가까운 여행, 장애인 봉사, 병원 자원 봉사, 전도활동, 늘푸른 대학, 찬양 무용, 요리강습, 각종 악기 배우기…. 얼마든지 있습니다. 

정 할 거 없으면 무료전철 타고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가끔 저에게 신청이 들어옵니다. “목사님! 언제 은퇴하실 겁니까?” 그래서 “왜 남의 은퇴를 묻습니까?” 여쭤보니 “은퇴하신 후에 우리 교회는 조그만 교회인데 오셔서 무료 목회를 해주시면 어떨까요?” 그런 요청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기도 많이 해보십시오. 너무 조그매서 목사 월급도 못준다니 내가 가서 부흥시키게 기도들 많이 하십시오.” 제가 그러면서 농담 삼아 이야기했습니다. 

찾아보면 자기가 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봉사할 것이 얼마든지 있는데 봉사는 안하고 쓸데없는데 신경을 쓰기 때문에 시간이 무료하고 삶이 풍성하지 않고 원망, 불평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성가대는 이렇게 젊은이들이 하지만 외국에 가면 60대, 7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거의 90퍼센트입니다. 평생 그 자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나는 평생 이 자리에서 알토를 했다.” 그러시는 분이 많습니다. “평생 주일학교 교사 했습니다.” 선생님 출신이 우리 교회만 해도 수백 명이신데 아이들 가르치는 것을 왜 못합니까?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가장 열심히 한 것이 무엇인가 기자들이 가서 물었습니다. 

지미 카터는 “내가 대통령 전에 하던 일을 계속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물으니 평화 봉사단에 가입해서 무주택자들 집 지어주는 목수 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출석하는 주일학교 교사 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미카터는 지금 나이가 80세가 넘었는데도 그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제자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할 일을 찾은 사람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기부 문화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게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인데 이 기부하는 문제는 돈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재능 기부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술가가 돈은 없는데 재능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가서 마을 담장 벼락을 전부 그림을 그려놓았더니 형편없던 동네가 무슨 미술관 같아졌습니다. 재능 기부인 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어린이가 실종되어서 우리 아이를 왜 못 찾아내느냐고 날마다 경찰관, 공무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찾기 싫은 것이 아니라 찾아도 안 찾아지는 것을 어떡합니까? 싸우다, 싸우다 지쳤습니다. 그는 지친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는 지쳤습니다.” 응답 받았습니다. “너 같은 사람을 위해서 일하라.” ‘아!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그래서 무보수로 자원봉사 하는 “실종어린이 찾아주기” 운동하는 자원봉사에 가입해서 자기 아이도 잃어버렸으니까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그 아줌마 한명 때문에 자기 아이는 못 찾아도 남의 아이들은 수없이 찾아주는 것입니다. 

자기 심정과 똑같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찾아준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어서 제가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감리교단에서 큰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 목사! 내가 부탁이 있어.” “뭐예요?” “이 목사 설교집을 나에게 전부 넘겨줄 수 있어? 테이프와 CD를 전부 넘겨줘.” “은퇴하셨는데 뭐하시려고요?” “아니야. 저 캘리포니아주에 교인 몇 십 명 모이는 교회가 있는데 교회 헌금이 적어서 목사님을 못 모신다고 하는군. 거기 가서 내가 자원봉사하기로 결정했어.” 그분은 큰 목사이고 아주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내가 했던 설교는 또다시 하기 싫어. 다 늙어서 설교 준비도 힘드니 이 목사 설교한 거 가지고 하나씩 써먹고 올 테니 그런 줄 알아.” “가지고 가십시오.” 그래서 가셔서 몇 년 동안 목회를 잘하셨습니다.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제자입니다. 

그 다음에 어느 공동체에 있어도 인간관계를 정상적으로 갖는 크리스찬이 능력 있는 제자라고 정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본질성 중 첫째가 속죄 사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원한 대제사장이라 우리가 부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대제사장이 속죄 능력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중보기도해서 온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해서 사죄권을 받아가지고 나와서 “여러분! 내가 중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는 다 이제 소멸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아주 기뻐하면서 속죄의 기쁨을 누리고 돌아갔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역할입니다. “내가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죗값을 다 담당했으므로 여러분의 죄는 다 없어졌습니다. 이 후로는 내 이름으로 뭐든지 내 이름으로 속죄 받으시고 회개 기도를 통해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속죄사역을 했습니다. 이 기도하는 문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잊어버려서 저는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개인기도는 잘하는데 공중 앞에서 기도하려면 떨리고 경험 없어서 좀 힘듭니다. 그런데 교회가 조그마할 때 교인들 기도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런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쳐다봐서 눈이 마주치면 “김 집사님 오늘 공중기도하시겠습니다.” 이런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아주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그때가 되면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전부 고개를 숙입니다. 또, 이상한 모자를 쓰고 수건 가리고 오시는 분도 있고 기도 끝난 다음에 들어오시는 분도 있고 별 다양한 분이 계십니다. 저에게 와서 실제로 부탁하신 분도 많습니다. “목사님이 별안간 기도시키면 나는 다른 교회로 갈 테니 그런 줄 아십시오.” 공갈친 분도 계시고 “목사님이 시키는 봉사는 뭐든지 다 순종하겠지만 기도만 시키지 마세요.” 그런 분도 계시고 “목사님 때문에 나는 심장병 걸릴 거 같습니다.” 그런 분도 계십니다. 

그래도 기도를 많이 시켰습니다. 한번은 집사가 기도하다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잊어버려서 “이제 기도 끝인데요.” 그러신 적도 있고 기도를 시켰더니 “할렐루야 아멘!” 그냥 그렇게만 말하신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기도를 시켰더니 “목사님이 갑자기 기도를 시켰기 때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분도 있고 아주 다양합니다. 어떻든 괜찮습니다. 기도는 창피한 게 아닙니다. “말 못해도 성령님이 내 마음을 대신 읽어서 대신 간구하여 주시느니라.”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내 이름으로 뭐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내 이름으로 회개 기도를 드리라. 그러면 내가 사해주겠다.” 속죄 사역, 대제사장의 사역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사역 중심은 평화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군, 천사가 하늘에서 노래했지 않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날 때부터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하실 때 성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 영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이 우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우셨습니까?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성인데 마귀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이렇게 야단치셨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이사야 53장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예언장입니다. 거기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 의미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평화 사역이 날 때부터 십자가까지 평화 초점 사역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십자가를 짐으로 평화 정착이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에 있어서 “너희는 교회에서 거치는 돌이 되지 말라. 너 때문에 교회가 어렵게 하지 말라.” 나 때문에 교회가 평화스러워야 되고 나 때문에 가정이 평화해야 되고 나 때문에 세상이 평화스러워야 됩니다. 트러블메이커와 피스메이커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는 곳마다 교회 분열시키는 목사도 집사도 있습니다. 편 가르기를 해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봉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무엇을 만들어서 거기서 무엇을 얻어먹으려고 하는지 날마다 편 가르기에만 신경을 쓰고 무엇을 조직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있습니다. 목사도 그런 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집사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교회는 갈라집니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공동체 평화에 기여하는 사람이 제자라고 했지 않습니까? 주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이 성령 주도형의 평안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제자들 마음이 불안해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선물해주십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노니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내면적 평안을 영적 능력이라고 합니다. 

성령 주도형의 평안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성령님의 내재성이 내 영 가운데 역사할 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이 슬플 때도 있고 불안할 때도 있지 어떻게 항상 바보처럼 웃고 다니느냐?”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성경 이야기는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시편 23편이 무엇입니까? 사울 왕이 특공대 3천명 정예부대를 풀어서 다윗을 죽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다윗을 보호하던 80여명의 제사장들이 단칼에 참수형을 다 당했습니다. 다윗이 산속으로 도망가서 아둘람 동굴 속에 숨었지 않습니까? 풍전등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 발짝 잘못 나가면 죽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비록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때도 주께서는 나와 함께 계심이라.” 성령 주도형의 평안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의 제자이다.”

태재고개라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 지역에 교회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분당 중심에는 뭐가 있었느냐 하면 5일에 한 번씩 시골 장이 섰습니다. 파출소가 있고 제가 분당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데 분당초등학교가 있었고 양영 중고등학교가 있었고 그 다음에 서울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약간의 도시 문명같이 이루어진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장 책임자가 저의 아버지셨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잘 아는데 5일마다 장이 서면 저 오포에서 농민들이 무엇을 많이 이고 지고 팔러 옵니다. 팔고 나면 또 다른 물건을 사서 지고 5일마다 산 고갯길을 넘나드는 농민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저렇게 길이 잘 되어있지만 옛날에는 이 길이 얼마나 험악했는지 버스가 논바닥으로 굴러서 네 바퀴가 하늘로 올라간 적도 있고 지프차가 뒤집혀서 하늘로 올라간 적도 있고 아주 사고뭉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골 사람들이 짐을 지고 이 고갯길을 넘어갈 때 가끔 가다 행운을 만납니다. 트럭 운전사가 어떡하다 지나가면 그 짐 지고 땀 흘리며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트럭을 태워줍니다. “타십시오. 이 차가 오포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얼마나 신이 납니까? 트럭에 타는데 등에 짐을 많이 짊어졌지 않습니까? 그러면 옛날에는 트럭에 난간이 있었습니다. 

그 짐을 거기에 내려놓지 않고 진채로 난간을 붙들고 그냥 갑니다. 사실 그렇게 가는 것은 그냥 걸어가는 것보다 힘듭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가 “짐을 내려놓으시고 붙드세요.” “차만 태워줘도 고마운데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나요.” 그런데 저도 그 차를 많이 탔고 우리 담임 목사님도 항상 그 차를 타고 많이 신세를 졌으니까 그것을 다 봤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은 예화거리가 없을 때는 언제나 태재고개가 나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짐을 내려놓으면 주님이 대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네 짐을 나에게 내려놓으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 놓으라.”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성령 주도형의 능력 있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원망 충만, 슬픔 충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든 불안감은 언제나 미래적입니다. 현실적인 것은 10퍼센트도 안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12제자를 평가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에게 실망을 주었습니까? 보십시오. “누가 크냐?”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을 거야? 요한과 야고보야?” 다른 제자들이 분히 여겼습니다. 누가 제일이냐고 해서 예수님은 실물 교육으로 어린아이를 데려다 이 사람과 같이 되라 하셨습니다. 남의 집에 오면 발 닦아 주어야 하는데 제자들은 아무도 안했지 않습니까? 결국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 눈에 비친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기대에 정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쓸데없이 자리다툼이나 하고 거기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인지 이상한 신경전을 벌입니다. 봉사에는 관심이 없고 자리다툼에만 관심을 쓰는 교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느 때 훌륭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 체험한 후 그때 비로소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쓸데없는 짓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에 괴로움을 드렸다. 이제는 주님의 원대로 살아야지.” 그래서 모두다 순교자가 되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죽어야 돼. 예수님과 같이 죽어야 돼. 예수님과 같이 죽는 것조차 나는 감당할 수 없어. 거꾸로 매달려야 돼.” 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성령 주도형의 평안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뜻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는 각오, 쓸데없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도 바울의 제자화 성명 발표를 이렇게 했단 말입니다. 

그 길을 가자고 저렇게 표어를 제자화로 걸은 거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래도 3년이 지난 다음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순교자들이 되고 이 땅에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기초적인 공헌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30년 교회를 다녀도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됩니다. 금년에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면 저 간판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 “살든지 죽든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여러분 모두 이렇게 제자화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의 제자화를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나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 가운데 함께 하여 주셔서 결국 내가 내 인생을 그리로 갈 수 있는 영적 능력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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