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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성경으로 (예장 총회창립 기념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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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창립 100주년기념 감사예배 

한국 초기의 기독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901년 미국 장로교총회 기간 중에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중국에서는 수 십 년을 기다려야 겨우 최초의 개종자에게 첫 번째 세례를 베풀 수 있었다. 한 세기가 지나서야 교회를 할 수 있는 교인을 모을 수 있었다.’ 백년이 지나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일본에서는 최초의 개종자를 세례하기까지 6년을 기다렸고, 12년이 지나서야 9명의 개종자로 교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최초의 선교사가 1885년 봄에 도착하여 1년만인 1886년 7월 11일에 최초의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1년만인 1887년 9월에 약 스무 명의 사람으로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3년 뒤인 1904년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 20주년 기념식장에서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현재 조선에는 820여 곳의 조직교회와 16,233명의 성찬교인 즉 세례교인과 11,004명의 학습교인 등 총 4만 명의 출석 교인이 있다. 거기에 더하여 주일학교에는 18,000명이 다닌다. 그리고 20여 명의 의료 선교사들이 열 두 곳 이상의 장소에서 일하면서 매년 5만회 이상의 진료와 처방을 한다.’ 이어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 20년 만에 거둔 이 놀라운 결과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시편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편118:23-24)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72:19) 자기 말로써는 감사를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빌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 한국 기독교는 1907년 1월, 평양을 중심으로 시작된 회개의 성령 대부흥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흔히 말하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그해 9월, 조선인 목사 일곱 명이 탄생합니다. 그때 언더우드는 그렇게 놀라운 기적적인 아름다운 모습과 부흥하는 한국 교회의 특징 다섯 가지를 짚습니다. 

하나는 ‘사도적 활동성이 있는 교회’ 입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이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겠다고 했고, 직접 선교에 나갔습니다. 직접 선교사가 되어 나간 것입니다. 교회의 대표들이 선교하러 나갔습니다. 베드로가 나갔고 요한이 나갔고 바울이 나갔습니다. 바나바가 나갔습니다. 이처럼 사도적 활동성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기도하는 교회’, 세 번째는 ‘헌금하는 교회’ 라고 짚었습니다. 언어우드는 한국교인들은 헌금을 참 잘하더라고 말했습니다. 네 번째, ‘모이기를 잘하는 교회’, 다섯 번째는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한국 교회가 그렇게 아름다운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의 보고를 접한 해외의 수많은 언론인, 성직자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경탄을 마지않았습니다. 그 중 하나로 영국 성공회 소속 카스코엔 목사가 런던 타임지에 기고한 글에 다음과 같이 한 말이 있습니다. ‘한국을 통하여 극동지방의 기독교가 빛이 전파되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작은 수가 아니다.’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지금 아시아에 한국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카스코엔 목사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전문적인 선교사는 물론 복음 전도자들이 얼마나 많이 나가있는지 모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미국이고 그 다음이 한국입니다. 

1907년의 회개의 성경 대부흥 운동을 통해서 태어난 한국교회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백 년 전인 1912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창립합니다. 그래서 백 년 뒤인 오늘 우리는 백주년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1919년에 3․1만세 운동을 주도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외래 종교가 아닌 한국을 위한 한국인의 종교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때부터 한국교회는 나만, 우리만 챙기는 교회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 뛰어들게 됩니다. 먼저 한 것이 그 당시에 이 나라를 좀먹게 하고 있던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던 술과 담배 퇴치운동을 했습니다. 

그 당시 술의 의미, 담배의 의미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심하지 않았지만 중국에 그렇게 많은 피해를 끼쳤던 아편이 또 마약이 우리나라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한국교회가 이것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공창제도 반대운동을 교회가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노동운동, 빈민 구제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인권이라는 이 중요한 주제를 위해서 한국 교회는 부단하게 노력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아픔을 치료하는 전인적인 병원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까지도 제대로 믿지 못할 정도로 한국 교회의 희망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빛이었고 꿈이었고 미래였습니다. 

그러다 1930년 초반부터 시작한 신사참배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한국교회는 무너졌습니다. 여러분의 시각과 좀 다를 것입니다. 그 이후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많은 발전을 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합니까? 문제는, 몸은 비대한데 근육이 없는 아이들, 몸은 큰데 힘을 쓰지 못하는 아이들, 복부비만, 피하지방, 내장지방 이런 것들만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한국 교회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 무너졌습니까? 

당시 한국 교회는 , 교회와 교인들이 당할 일들에 비하면 절 한 번 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다는 계산에 의해서 세상과 타협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두 사람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1938년, 결국 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 결정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국 교회는 무너지고 그 무너짐은 현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940년 4월, 존경하는 주기철 목사님은 네 번째 감옥에 수감되던 주일날 한국교회를 향하여 뼈아픈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조를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神社)에 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苟苟盜生)이 말이 됩니까?’ 구구도생이란 비굴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 내 주 예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내게서 떠났도다.’ 영광이 떠났다는 말씀입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수감된 주기철 목사님은 결국 그대로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분당소망교회가 속한 교회를 ‘장로교회’ 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좀 생소한 말이겠지만 ‘개혁교회’ 라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Reformed church’ 즉 개혁중인 교회, 개혁하는 교회,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부를까요? 중세 캐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거기에 맞서서 기독교회는 다른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대표되는 한 사람 혹은 몇 몇 사람이 이끌리다 보니 기준이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대표되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이쪽으로 휩쓸리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휩쓸리다 보니 기준이 계속해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간 사람이 타락되면 교회까지 타락되고 말기 때문에 개혁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사람 중심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던 이것 때문에 개혁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장로교회’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총회가, 로마 캐톨릭 교회를 예를 든다면, 교황처럼 한 사람 또는 몇 몇 사람의 통치가 아닌 지역교회에서 선거로 선출한 장로들의 지도력아래 독립될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교회입니다. 총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는 하나이지만 거기에 있는 수 천, 수만의 교회는 따로 따로 된 교회이고 나름대로 자기 교회를 이끌어가고, 총회 전체의 결정도 한 두 사람, 또는 몇 몇 사람이 아니라 이런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 결정하고 이끌어간다는 의미에서 장로교회라고 합니다. 장로는 누구를 말하는가? 교회법 22조에, ‘장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설교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하고 하나는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에는 목사도 포함되고 장로도 포함됩니다. 장로교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게 됩니다. 

이제 100년 전 당시 세계의 수많은 교회들, 언론들, 성직자들이 한국 교회를 향하여 그렇게 경탄한 이유를 살펴봅니다. 기독교회는 로마시절부터 그리고 맨 처음 초대 교회 시절부터 종도 없고 주인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구별이 없었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었습니다.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는 평등이었습니다. 이때 여자, 남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늘 낮은 자리에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서 주인도 없고 종도 없는 그러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초기부터 그랬습니다. 여자라는 존재는 비천한 존재가 아니라 남자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이루었습니다. 승동대감 이재형은 철종의 5촌 조카로 왕손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왕손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손인 이재형이 기독교인이 되고 난 뒤, 자신을 교회로 이끈 마부 엄기형을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종과 주인이 없었습니다. 왕손과 백정이 함께 만나서 나란히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운영하는 평등이 한국교회에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한 일을 보겠습니다. 100년 전 우리나라에 우리의 글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가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하층민의 자녀들은 돈이 없고 신분이 안 되어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그들에게 선진 서양학문을 가르쳤고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통해서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하층민이 중층으로, 상층으로 올라가도록 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국교회가 했습니다.

다음은 여성 문제입니다. 당시 여성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50-60년 전까지도 그랬습니다. 집의 재물에 한계가 있으면 오빠를 위해서 여동생은 희생해야했고, 남동생이 있으면 남동생을 위해서 희생해야했습니다. 그런 여성들로 하여금 교회가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름을 가졌지만 호적 등록할 때 쓰는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교회는 여성들의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고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고 이름의 의미를 갖도록 해주었습니다. 여성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더 배울 사람들은 교회가 돈을 대고 선교사님들이 돈을 대어서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유관순이 그랬습니다. 선교사가 학비를 대주어서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들로 하여금 교회가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 진출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한국교회였습니다. 그야말로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꿈이었고, 희망이었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당시는 사람들이 병이 들면 미신적 치료를 했습니다. 지금 에티오피아에는 공식적으로 주술적 치료를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신적 치료 대신에 교회는 환자들을 선교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과학적인 치료를 받도록 해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영과 정신의 자유를 주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술적 치료를 하다보면 먼저 죄인이 되어야합니다. 귀신이 들어있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에서 집안에 어떤 일이 있거나 병이 들었다고 하면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둘러서서 기도하는데, 귀신 내어 쫓는 기도를 합니다. 병 귀신이나 또는 문제를 만드는 어떤 귀신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들은 늘 귀신 속에 둘러싸여 살게 됩니다. 그 교회에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지 압니까? 수 만 명을 넘어서 십만 명이 넘는 교인이 모입니다. 잘못 가르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 문제가 앞으로도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과거 한국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으로부터 해방, 영적인 해방, 정신적인 해방을 얻도록 인도했습니다. 교회가 한국 시민들로 하여금 술과 담배를 멀리하여 나라를, 사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남편들은 술을 마시고 아편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은 죽어라 농사를 짓고 가정 일을 하면서도 늘 서러운 일들을 당했습니다. 그런 때, 교회가 일부일처제를 지키게 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춘원 이광수 글이 있습니다. 1917년에 ‘야소교가 조선에 준 은혜’ 라는 제목에서 ‘기독교는 한글을 보급하였고 여성을 해방시켰고 여성의 재혼을 허락하였고 학교를 세웠다.’ 라고 극구 치하하고 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세례를 베풀 때 아홉 가지를 검증했습니다. 먼저 개종의 동기가 순수한가, 예배에 제대로 참석하는가, 헌금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가정 예배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술과 담배 마약은 금지하고 있는가, 일부일처제를 지키는가, 본부인과 지금 살고 있는가, 제사를 금하고 있는가의 여덟 가지를 확인하고 그 다음 하나 더 확인합니다. 세례를 베푸는 아침에 세례 받는 사람의 동네에 가서 이웃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교회를 다니고 난 뒤 삶이 바뀌었는지 질문하고 이웃 주민들로부터 긍정적은 대답을 들었을 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런 한국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전체 국민의 1% 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을 주도했습니다, 그 주도의 대표적인 것이 3․1 운동이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 교회를 향하여 비난의 소리들이 많습니다. 그 위상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얼마 전 한 기독교 단체가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입니다. 개신교를 신뢰하는가에 대한 답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8.4%밖에 없었습니다. 불신하는가는 48.3%였고 신뢰도 불신도 하지 않는다가 33.3%였습니다. 신뢰하지 못한다가 훨씬 더 많습니다. 특히 3대 종교 신뢰도에 있어서는 캐톨릭을 신뢰한다가 35.2%, 불교를 신뢰한다가 35.1%, 개신교는 18%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종교에 대한 신뢰도도 캐톨릭 신자들은 스스로 캐톨릭을 96.6%를 신뢰한다고 말하고 있고, 개신교는 자기 종교를 76.2% 신뢰한다고 합니다. 72.2% 신뢰한다고 하는 불교도보다는 조금 높았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비난, 교회의 신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습니다.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이 일치되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말이 행동과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야합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어야한다.’ 이것은 정말로 뼈아프게 생각해야합니다. 신앙을 지키되 함께 하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사회봉사를 좀 더 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주 많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재정사회를 투명하게 해야 한다.’ 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몇 몇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교회 재정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보고 감독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기독교인둘이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 제일주의 지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꾸 커서는 안 되고, 커야 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 개혁 이전에도 기독교는 많은 방안이 나왔습니다. 도를 깊이 닦아야한다고 생각하고 수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산속으로 들어가고, 바닷가에 가기도 하고, 호숫가에 가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격하게 혁명을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내부를 바꾸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내부 개혁론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론자들이 던진 한 마디 말이 기독교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그 말은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이 말에 개혁이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가 태어났습니다. 

오래 전에 존경받는 한국의 한 신학교 교수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에 권위가 있는가?’ 만약 오늘날 이런 질문을 했다면 이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런 질문을 받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가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권위는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으며,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찾아내면 됩니다. 교회이든 나라이든 대통령이든 아버지이든 남편이든 선생님이든 하나님의 종 목사이든 간에 본질을 잘 지킬 때 권위가 나오게 됩니다. 남편은 남편의 본질을 잘 지킬 때, 아버지는 아버지 본질을 잘 지킬 때 거기서 권위가 나옵니다. 

교회가 본질에 충실하다는 말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 되겠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것이 교회본질입니까? 성경입니다. 한국교회가 불신 받고 있는 시대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힘써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더 읽어야하고 더 공부해야합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살아야합니다. 조금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여도 성경대로 살아야합니다. 힘써 기도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병든 사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섬겨야합니다. 병든 자들을 치료해야합니다. 교회가 이것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어른들이 생명을 바쳐서, 교회의 기둥들이 교회의 대표들이 생명을 바쳐서 했던 일을 해야 합니다. 선교입니다.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그저 앉아서 복음 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이 나가야합니다 교회의 기둥들이 나가야합니다. 

한 가지 더, 이제는 교회의 제도도 성경적으로 바꾸어 나가야합니다. 이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시대를 불문하고 공간을 뛰어넘어서, 시대를 뛰어넘어서 어떤 머리로도 따라갈 수 없는 지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현실에 맞는 제도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현실에 맞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제도로 바꾸어 나갔기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썩고 말았습니다. 

교회 교리가 그렇게 땅에 추락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잘한다고 한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잘한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를 위해서 잘 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한국 교회의 자리를 제대로 다시 찾으려면,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꿈이 되고 미래가 되고 희망이 되고 길이 되려면 이 길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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