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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섬기는 교회 (눅 4: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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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섬기는 교회 (눅 4:16-19)


누가복음 4:16-19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타자를 위한 공동체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교회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교회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론에 대한 이론도 많고 또 교회라는 것은 큰 산과 같아서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때 그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론을 다루면서 공통적으로 교회 중심의 접근법을 취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 교회 – 세상으로 이어지는 순서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고, 세상은 심판의 위치에 있습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되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승선시키는 모델이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교회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민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만 택하시고 이스라엘만을 선민으로 부르신 것일까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만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에게만 복을 주신다면 다른 민족들은 억울할 것 아닙니까?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를 밝힌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하는 약속이요, 두 번째는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요, 세 번째는 복의 근원 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축복을 주심으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3절의 마지막 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 창세기 18장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8)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특별히 사랑하셔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 민족들과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세상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복을 받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모범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이에 순종하는 민족이 얼마나 복되고 강성한 나라를 이룰 수 있는지를 모델 케이스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도 이스라엘의 법도와 신앙을 따라 살도록 만들고,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복을 받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런 기대에 부합하지 않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매를 맞고 심판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구원 역사는 이제 교회를 통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 민족 단위에서 교회라는 전 세계에 흩어진 전진기지들이 세워져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세상입니다. 교회는 이 사랑을 전하는 통로입니다. 교회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세우셨는데 그것은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 세상 – 교회의 순서가 맞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온 세상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교회처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전위대입니다. 

세상이라는 최전선에 투입된 전위대로서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싸워야 할 공동체입니다. 『세속도시』란 책을 썼던 하비 콕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속도시 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도시의 종, 즉 도시의 온전함과 건강을 위해 자신을 바쳐 헌신하는 종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세속 도시 한 복판이고 그 세속 도시를 하나님의 성도로 만드시는 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자기 성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봉사의 기관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타자인 인간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신 분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7) 예수님의 제자들로 구성된 교회 또한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본회퍼는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일 수 있다. 교회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교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삶의 문제에 동참해야 하는데 지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돕고 봉사함을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주님은 섬기려 이 땅에 오셨고, 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섬기는 자가 높임을 받듯이 교회가 세상을 잘 섬길 때 교회 또한 하나님이나 세상으로부터 인정과 높임을 받습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자기 성을 쌓고, 힘을 가지고 군림하며, 자기 권세를 부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더 낮아지게 되고 더 추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내어줄 때 예수님도 살고 우리 인간들도 살아났듯이, 교회가 자기를 비우고 희생할 때 교회 또한 살고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세상을 섬기는 교회

세상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은 예수님의 취임사라 부릅니다. 단순히 갈릴리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압축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령이 내게 임하였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성령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교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서 이루어졌듯이 이후의 교회 또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 예수님과 동일한 사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복음전파의 사역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복된 소식을 이 땅에서 가장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함께 했던 사람들은 유력한 권세자나 엘리트들이 아니라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 즉 병들고 귀신에 들리고 배고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부한 자들은 복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부한 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곤고한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한 첫 번째 섬김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사역입니다. 이는 해방과 치유의 사역입니다. 영적으로 포로 된 자도 있고, 정치적으로 포로 된 자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 먼 자도 있고 실제 눈먼 자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눌린 자도 있고, 실제 가난과 독재와 전쟁으로 눌리고 상처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두 자유케 하고 치유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될 사역입니다. 모든 억압이 있는 곳에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 그것이 교회의 사역이고, 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이 문제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문제로 불거졌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복음전도만이 자기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사회적 책임 또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을 사람들을 승선시키는 구원의 방주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힘써야 할 전위대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명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의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있는 불의에 대해서 항거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에게 빵을 주고 해방시키는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바 아닙니까?

결국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희년(禧年)입니다. 19절에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 은혜의 해가 바로 이스라엘의 희년입니다. 이스라엘은 50년 마다 원래의 상태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가난하게도 되고 또 부하게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빚을 얻기도 하고 노예로 팔려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래 지속되면 사회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불공평한 사회가 되어 사회가 불안전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희년이라는 제도를 두셔서 50년째는 원래 자리와 형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빚을 탕감 받습니다. 노예 되었던 사람들은 해방되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자기 땅을 되찾고 인생을 다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쁨의 날 ‘희년’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희년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나라입니다. 영적인 포로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만이 희년이 아니라 실제적인 가난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희년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영적 구원, 육적 구원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몸이 아프면 영혼도 힘듭니다.  육신이 배고프면 담을 넘는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불안하며 몸은 호의호식해도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교회 또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좇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행동합니다.

성인이 된 세계

그렇다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하고 교회는 빛으로 가득해서, 세상은 항상 교회의 교화와 섬김을 필요로 하는 세상인가?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은 자율성을 가지고 날로 성숙해져 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에 대해서 둔감합니다. 결정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재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빛이 더 우월한 곳입니다.

세상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아기를 거쳐 성인으로 들어서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여전히 미성숙한 어린아이 취급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전도 현장에서 많이 느끼는 바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이나 교회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옛날처럼 벼락이 칠 때 하나님의 두려움을 생각하며 벌벌 떠는 세상이 아닙니다. 벼락이 자연현상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믿게 하려면 이들을 한계상황으로 몰아가야 합니다. 온갖 것들을 끌어들여 그들이 죄인임을 인정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 이후의 세계나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별 관심도 없고 두려워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책은 있냐고 하며 죽음의 공포를 강요해야 합니다. 세계는 이미 성인화 되었습니다. 본회퍼의 말입니다. “인간은 모든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신이라는 작업가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 과학과 예술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 세상은 신 없이도 문제를 처리하게 되었다. 신은 끊임없이 그 활동범위를 억제당하고 있으며 지반을 잃고 있다.” 세상은 이미 죽음에 대한 문제나 생명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터득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실 전도하기 쉬운 곳이 바로 감옥과 병원과 장례식장입니다. 감옥에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누구보다도 잘 깨닫기 때문입니다. 병을 앓고 나면 인간은 연약해져 신을 의지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장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장 진하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비겁하게도 과학과 문화의 허점만 노리며 하나님이 설 자리를 마련하느라 고군분투합니다. 과학이 실패하거나 오용되는 순간 나타나 ‘그것 보아라. 하나님 없는 세상이 얼마나 어리석게 되는지를’ 하며 심판자처럼 등장합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예전에 유행했던 프란시스 쉐퍼류의 문화 비판이나, 반 뉴에이지 운동들이 바로 그 중심에 있습니다. 과학 대신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하려 합니다.

이런 기독교의 곤궁에 대한 본회퍼의 분석입니다. “기독교 변증론은 ... 이 성인화된 세계를 향하여 세계는 신이라는 후견인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설사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포기한다고 해도 이른바 궁극적 문제, 죽음과 죄책이 그것인데, 그것은 여전히 남게 되며 거기에 대해서는 다만 ‘신’만이 답을 줄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신과 교회와 목사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은 감옥과 병원과 장례식장에서만 주님이 되시고 있습니다. 과학과 이성보다는 신비주의와 기적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는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한계상황과 어둠 저편이 아니라 삶의 한 복판에서, 삶의 한 중심에서 주님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본회퍼의 말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벌벌 떨면서 신을 위한 장소를 남겨 놓으려고 한다. 나는 한계에 처해서가 아니라 중심에 있어서, 약함에 있어서가 아니라 힘에 있어서, 따라서 죽음과 죄책을 계기로 해서가 아니라 생과 인간의 선에 있어서 신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 한계에서가 아니라 마을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중심이지, 결코 우리들의 미해결의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것이 아니다.”

세상은 어둠이 덮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빛이 더 강합니다. 루터나 칼빈이나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위해서 인간의 죄성과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노예의지를 주장한 것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노예의지나 죄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세상을 온통 무채색과 무능력으로 덧칠해 놓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지구 구석구석에도 계시고, 또 온 우주에 편만하십니다. 그러니 진리는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세상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것은 양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세상이 발견한 진리까지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봉사는 단순히 세상을 교화시키는 일만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에 줄 수 있는 교회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나라의 궁극적인 도래의 희망, 평화와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섬김과 희생의 위대함, 인류의 형제 됨과 같은 가치들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서로 소통하며 서로에게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교회는 세상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도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행동합니다. 때로는 함께 보조를 맞추어가며, 때로는 배우며, 때로는 이끌어감으로써 세상과 교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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