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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교회 이런 교회 (살전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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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이런 교회 (살전 1:2-8)

생 포아라는 사람은 아름다운 여성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모든 기쁨에 미소를, 모든 슬픔에 눈물을, 모든 분노에 사랑을, 모든 비애에 위로를, 모든 허물에 용서를, 모든 불행에 기도를, 모든 희망에 격려를 보낼 수 있는 여성은 아름답다.”
  
우리 교회 모든 여성이 그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렇게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마음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육체의 아름다움은 동물에게 비단 옷 입히고 장식물로 치장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마음에 있습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자는 행복합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델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의 행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도 행위가 있는 믿음이 있고 행위가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생각만 하는 것도 아니고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있으나 마나합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형제가 헐벗고 있는데 덮게 하라, 먹을 것이 없는데 먹으라 하면 뭐합니까? 입을 것을 주고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네가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8-19)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말은 많으나 믿음의 역사는 없습니다. 말은 능하나 믿음은 무능합니다.
  
바울은 말 많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하였습니다(고전4:19-21).
  
예수께서 가버니움에 가셨을 때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습니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예수께 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로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이 계신 집 지붕을 뚫고 환자가 누운 자리를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상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믿음이 행동하면 믿음이 보입니다. 믿음이 말하면 믿음이 들립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경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하셨습니다(눅22:32).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모든 것이 바닥나도 믿음이 바닥나면 안됩니다. 믿음의 밑천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비실이가 되지 말고, 믿음의 실용주의자가 되십시다. 실용주의자란 행동주의자 실천주의자입니다.

  
󰊲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손과 발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톨스토이는 사랑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아름다운 사랑, 둘째는 헌신적인 사랑, 셋째는 활동적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활동적인 사랑입니다. 
  
지성에는 비판과 분석은 있어도 사랑은 없어 냉랭합니다. 칼같은 지성은 자르고 분할하기 때문에 화합시키지 못하지만 똑같은 강철로 만들어진 바늘은 조각 난 것을 잇는 통합의 역할을 합니다. 바늘은 찌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귀도 있습니다.
  
바늘귀에 꿴 실이 조각을 연결시켜줍니다. 통합을 위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늘은 사랑의 수고를 합니다. 바늘은 찔러서 아픔을 주는 것 같으나 깨닫게 하고, 하나가 되게 합니다. 서로 다른 둘을 하나로 엮어 줍니다.
  
어떤 포수가 나무 둥지에 앉아 있는 새를 잡으려고 총을 쏘았는데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가가 보니 새의 다리만 부상을 입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새는 새끼를 품고 있었습니다. 새끼를 두고 피할 수도 있었지만 앉아서 총을 맞은 것입니다. 사랑의 희생이었습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는데 백부장이 보낸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로 오다가 예수님께 백부장의 말을 전하기를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전합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따르는 무리를 보시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하셨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집에 가보니 종이 나아있었습니다(눅7:2-10).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수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손길이 닿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제부터 사랑을 자본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 사랑의 수고로 열매가 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3절하)
  
아침형 인간은 인생을 두 배로 삽니다. 아침을 지배하는 사람이 하루를 지배하고 하루를 지배하는 사람이 일생을 지배합니다. 아침형 인간은 대 자연의 여명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아침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없고 건강도 없습니다. 
  
왜 일찍 일어날까요? 성취할 꿈, 이루고 싶은 소원 때문입니다. 꿈만 있다고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소망과 함께 인내가 필요합니다. 야곱이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고단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들판에서 양들과 추운 밤을 지새웠고 뜨거운 낮의 더위와 싸웠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 된 인품을 낳고 연단 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롬5:3-4 쉬운성경)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소망 때문입니다. 소망이 시련을 견디어 내게 합니다. 소망을 이루려면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정신이 육체의 요구를 이겨나가야 합니다. 천재가 따로 없습니다. 참을성이 보통 사람을 능가할 뿐입니다. 인내가 인생의 자본입니다. 아내의 인내만큼 명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 인내가 남편의 폭력보다 강합니다. 인내는 인생의 최고미덕입니다. 
  
콜럼버스는 소망의 인내로 신대륙을 발견했습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바다! 보고 또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가고 또 갔습니다.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는 인내의 성품을 지녔습니다. 대륙이 보일 때까지 풍랑 속에서도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절망의 파도와 싸우면서도 이사야서를 읽으며 소망의 에너지를 얻었답니다. 결국은 육지가 나타났습니다. 믿고 찾아 나선 대륙이 보였습니다. 감격하며 소리쳤습니다. 보인다! 대륙이 보인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
  
우리 속담에 눈썹만 뽑아도 똥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괴로움도 이겨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힘들어도 참으세요. 더 참으세요. 끝까지 견디세요.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은 참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1:4)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감사하고 자랑스런 교회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1:3-4)
  
우리 교회 이런 교회, 소망의 인내로 소망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입니다. 믿음으로 영차영차 하는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믿는 자의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입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수고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끝까지 견디게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소망입니다. 바라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절망입니다.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이런 교회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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