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 (행 10:1-5, 44-48)

첨부 1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 (행 10:1-5, 44-48)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주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워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힘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멋진 교회, 이상적인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 예수님의 삶을 사는 소그룹 공동체, 표적과 기사가 계속 이어지는 공동체가 되어갔습니다. 사도들과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고, 교회내 거룩과 정직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큰 희생을 치루기까지 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목회사역을 돕게 하기 위해 믿음과 성령과 말씀이 충만한 집사 일곱을 선출함으로써 신약 교회의 일꾼 뽑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허용하심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순교하는 공동체임을 보이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구원의 복음이 전이방인에게로 전해져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고넬료 가문의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베드로 일행이 로마의 군인 고넬료와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있었던 성령의 강림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지시에 의해 고넬료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45절) 이방인 전도를 확실히 보증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교회의 또다른 특징은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 입니다. 먼저 초대교회의 이방인을 품는 모습을 살펴보고,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초대교회의 이방인을 품는 모습

44-46절=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적 교회의 여덟 번째 특징은 그들이 이방인을 품었다는 데 있습니다. 10장과 11장에 자세히 기록된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는 그 길이만 하더라도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한 눈에 보여줍니다. 

로마의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시켜 고넬료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대주의와 이스라엘 선민(選民) 사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씩이나 환상을 통하여 답답한 베드로를 깨우쳐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전도자가 가지고 있는 ‘편견’입니다.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워서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면 욕을 먹고 뺨을 맞기 때문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카타콤에 숨어서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검투장에서 갖은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상황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 복음 전도의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전도자의 마음에 있습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았을 것이라는 편견, 저 사람은 복음을 전하면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복음 전파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복음의 은혜로부터 소외시킨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딤전 2:4). 사도 베드로는 세 번의 환상을 통하여 겨우 그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베드로는 모인 식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했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절), 비로소 그들에게 세례를 주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초대교회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려지게 되어, 마침내 교회에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당시의 높은 편견의 벽을 뛰어넘어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로서, 유대인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다양한 인물로 구성되었지만 반목이나 대립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출신 배경과 계층,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성도 여러분!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누구라도 쉽게 와서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조건이나 배경 때문에 소외되거나 무시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성도라면 누구하고라도 화합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자는 초신자를 섬기고 바르게 인도하여 그들로 높아지고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교회는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강하고 견고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여러 번의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인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주된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복음 안에는 동양인과 서양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하나입니다. 바울은 1, 2,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인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심하게 핍박받았고, 쫓겨나고 매를 맞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 교회는 이처럼 당시의 높은 편견의 벽을 헐고 그들이 개 돼지처럼 여기는 이방인을 자신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맞아들인 교회였습니다.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 -- 우리 교회의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인 온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하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열방 가운데서 한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족속을 건져내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담을 쌓고 자신들만이 선민이라는 오만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방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제사장 나라’의 직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혈통이나 민족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영도하에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오는 날 ‘중다한 잡족’이 이미 이스라엘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누리는 모든 은혜와 특권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구별, 즉 혈통, 민족, 언어, 문화 등으로 인한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백성 가운데 거하는 나그네를 사랑하시며 약한 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8). 

그리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9). 하나님은 나그네와 소외계층을 위해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십니다.

신 14:28-29=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절기를 지킬 때에 한 도시에 거주하는 나그네와 함께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신 16:14).

하나님은 시편기자와 선지자들을 통해 이방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시 146: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렘 7:5-7=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온 인류를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행 10장) 28절을 보면 베드로는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이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고 있던 모든 장벽이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고 있던 모든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유대인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서기 전에는 사람들은 혈통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언어에 따라서, 그리고 문화에 따라서 각기 뛰어넘을 수 없는 담을 쌓고 그 담 안에 갇혀 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선 이후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장벽들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하나님 안에서 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롬 10:12, 13).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록 혈통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모두 한 가족 한 식구처럼 서로를 인정하며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위대한 진리를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엡 2:11-1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말씀입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5-16=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닙니다. 서로를 갈라놓았던 모든 장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한 백성이요 한 권속인 것입니다. 

갈 2:28-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가 온전히 서 있습니까? 그렇다면 서로를 내 피붙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어야만 합니다. 성격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행동방식이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정녕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힘입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간의 투명하고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 되려면?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교회는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입니다. 사도들과 당시 유대계 성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높이 세워진 담을 과감히 헐고 이방인들을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을 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 45절과 46절을 보면 베드로 일행은 고넬료 가족이 성령에 감동되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바로 그들은 하나님이 오직 유대인의 하나님이요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평소에 내가 분명한 진리라고 생각해 왔던 일들도 사실은 주관적인 편견과 아집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만해도 나사렛 예수 도당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전통을 무너뜨리는 이단자라는 그릇된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진멸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저 멀리 다메섹까지 원정길에 나설 정도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주관적인 편견과 아집으로 이단으로 빠진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말시온, 아리우스, 펠라기우스 같은 초대교회 이단들이 그러했습니다. 

또 중세 시대 인본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던 얀 후스를 화형시키고 갈릴레오를 이단아로 정죄했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날마다 세 가지를 감사하며 아침 기도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나를 이방인 되지 않게 하시고, 노예 되지 않게 하시고, 여자 되지 않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편견과 아집에 빠져 우리와 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별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어받아 실천에 옮기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부터 먼저 우리교회를 찾아오는 다문화가정의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환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부터 먼저 우리 주위의 조선족이나 이주 노동자들이나 탈북자들을 편견 없이 영접하는 아량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나부터 먼저 우리 주위의 나그네들과 소외된 이웃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랑의 팔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교회는 사도행전 교회처럼 이방인을 품는 공동체로 더욱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복 받는 비결은 나와 다른 사람들, 다른 체질의 사람들, 언어와 피부색과 습관이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교단과 교파간의 벽을 허무는 일에 힘써야 하고, 특히 영호남이 하나 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땅에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과 조선족, 그리고 탈북자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때 한국교회는 진정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멀리 해외로 나가 선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복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찾아온 이들을 포용하고, 우리 주위의 힘 없고 약한 자들을 찾고, 소외된 자들을 품어야 합니다. 중국 땅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30만 탈북난민들을 위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두주먹을 불끈 쥐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방인을 품는’ 넓은 마음이 가득해지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