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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 끝까지 선교하는 공동체 (행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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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까지 선교하는 공동체 (행 13:1-5)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우리는 이제 초대교회의 모습을 탐구하는 긴 여정의 마지막 시간에 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바로 그 교회>의 여러 가지 특징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가 가야할 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이 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 길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교회사 2천년의 시대 시대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때로는 오해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걸어갔던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과 본서의 후반부 전체에 걸쳐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는 세계 선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또다른 특징은 “땅끝까지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먼저 초대교회의 선교 사역의 모습을 살펴보고, 신구약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선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땅 끝까지 선교하는 교회로 도약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초대 교회의 선교 모습

사도행전 교회의 아홉 번째 특징은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계 선교를 위하여 안디옥 교회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도록 하셨습니다. 

2-3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전체의 내용 구조는 1장 8절의 예수님의 선교 지상 대명(the Great Commission)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첫 번째 단계로 제1-7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의한 예루살렘 교회의 태동과 예루살렘에서의 교회 확장을, 두 번째 단계로 제8-12장은 유대와 사마리아 및 팔레스틴 전역에서의 복음과 교회 확장을, 세 번째 단계로 제13-28장은 안디옥에서부터 로마까지의 복음과 교회 확장 과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중 세 번째 단계인 제13-28장의 내용은 21:16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의 전3차에 걸친 전도 여행과 바울의 체포와 로마로 가기까지의 여정에 대한 기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의 50% 이상은 땅끝 선교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의 결론은 선교입니다. 선교는 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절대적 지상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1차 전도 여행의 개시 기사로서,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missionary)로 파송하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1절에 ‘선지자들과 교사들’로 불리는 다섯 명의 교회 지도자들의 명단을 열거하고 있는데, 선교사로 파송될 바나바와 사울의 이름도 그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안디옥 교회가 교회의 핵심 인물, 곧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검증된 인물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는 곧 그만큼 교회의 선교 사명이 다른 어떤 사명보다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선교의 중심 축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교회로 이동되는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하는 등 이방인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를 추진하기에는 많은 제약과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는 여전히 할례나 율법 준수 등을 고집하는 유대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어 이것 때문에 이방인 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세계 선교 사명의 바통은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넘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사를 볼 때 세계 교회의 중심축은 언제나 세계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나라의 교회로 옮겨졌는데, 그 첫 번째 모델을 안디옥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 갑니까? 중앙아시아를 전도하다가, 성령님의 인도로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지경을 넓혀 나갑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테네까지 유럽의 대도시, 상업과 경제의 도시, 정치와 철학의 도시를 복음으로 휩쓸어 갑니다. 

여러분, 아직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당시의 땅 끝인 로마와 스페인까지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여러분이 나를 지원하면 내가 스페인으로 가겠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바울 사도는 로마로 갔습니다. 어떻게 갔습니까? 역설적으로 죄수의 신분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배 삯 한 푼 들이지 않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안전하게 경호까지 받으면서 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셋집을 얻어 군사 몇 사람의 감시 아래 죄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자기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 특히 로마 군인들과 귀족 계급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28:30-31).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자신들이 물려받은 전통과 편견의 벽을 깨고 세계 선교의 기치를 높이 세웠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다가 먼 나라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이분들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순교적인 삶 앞에 겸허히 고개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신구약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2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본절은 이방 선교를 ‘성령께서 불러 시키는 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교가 소수 선교사의 일도 아니고 교회의 일도 아닌 성령님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선교의 기획자요 주도자이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방인 선교를 고안하거나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들을 사마리아와 이방 세계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에 성령을 기름붓듯, 물붓듯 부으심으로 선교에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선교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 하나님이 기획자가 되시고 하나님이 주도자가 되시는 것이 선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선교를 전담하기 위해 보내주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성령님을 ‘선교의 영’이라 하고,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 역으로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언제나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도와 선교 활동을 활발히 하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활동이 대단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온 인류의 구원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류의 시조가 범죄하여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맺은 언약을 통하여 인류를 죄에서 건지실 것을 약속하셨고(창 3장),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오셨습니다. 

온 땅에 사람이 많아지고 그들 가운데 죄악이 관영해졌을 때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에게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홍수를 일으켜 죄로 물든 인류를 정화시키고자 하셨고, 경건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통하여 새로운 종족을 세상에 번성시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전인류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노아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었을 때 분명히 드러난 것은 인류의 죄악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따라서 의인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언약을 주시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창 12장). 이 사람 아브라함에게서 한 민족이 나오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이 민족을 ‘이스라엘’ 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선택된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만이 선택된 자들이라 자만하며 이방 민족과 담을 쌓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 민족에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방 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심원한 계획에 속한 일입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모여든 무리들에게 자신들이 이방인에게 가는 것이 자기들의 생각이 아닌 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며 명령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47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계에 흩어진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 심원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이방 죄인을 구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깊고 오묘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친백성을 희생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천 년 전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늘도 죄인을 부르러 우리를 보내십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을 보내신 예수님은 오늘도 주님의 그 심원한 계획의 성취를 위해 우리를 보내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따라 가야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기 꺼려했지만 가야 했듯이 우리는 이 사회의 이방인들, 곧 죄인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27살에 선교의 사명감을 가지고 영국에서 중국으로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온 토마스 선교사, 그러나 중국으로 건너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중국 한 모퉁이에 붙어 있는 한반도에 사는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민족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강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말로 된 성경책을 배에 싣고서 대동강을 따라 올라왔습니다. 그때는 대원군이 한참 쇄국정책을 펴고, 카톨릭 신자들을 잡아죽이는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을 전해 주려고 노력을 하다가, 결국 우리 관군들의 공격에 의해 배가 불타게 되고, 그는 강변으로 끌려가 칼날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하는 그 순간에 그는 자기 목을 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던져 주며 “이것을 읽어보시오” 라고 소리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를 칼로 친 사람이 그 성경을 주어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읽고는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피가 대동강변에 흘렀기에 그 피값으로 오늘 한국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에는 조선에 와서 선교하다 돌아가신 선교사와 평신도들의 묘가 167기나 있습니다. 그중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묘가 하나 있습니다. 1907년 미국 텍사스 해외선교부 파송으로 조선 땅에 와서 황해도 개성에서 사역하다 맹장염으로 쓰러져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한 루비 캔드릭의 묘입니다. 그녀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조선은 박해가 점점 심하고 생활환경은 너무나 열악합니다. 3일 전에도 내가 아는 교인이 관가에 끌려가 순교당했습니다. 이 땅은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목 잘려 순교당하고, 제임스 선교사가 순교한 땅입니다. 지금 박해가 너무 심해 철수하라는 선교부의 지시가 있으나 대부분 선교사는 순교할 각오로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 편지로 20여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지원했습니다. 루비 캔드릭의 비문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합니다. “내 목숨 1000개가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이 작은 한반도에 지난 126년 동안 3000여명의 정규 선교사와 비공인 선교사 1200여명이 와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룩했습니다. 할렐루야! 


3. 땅 끝까지 선교하는 공동체 되려면?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현저한 특징은 땅 끝까지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도들은 당시의 매우 높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말씀으로 무너뜨리고 이방인 선교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갖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지만, 초대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열정을 계속하여 불태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가 초대교회처럼 주님이 인정하시는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행전 교회처럼 목숨을 걸고 복음 전도에 나서는 교회상을 정립하려면 무엇부터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성도 개개인이 교회는 선교 공동체임을 확신해야 하겠고, 선교 마인드를 확고하게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선교 지향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주일학교는 미래의 전도자를 키워내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보내는 선교사’입니다. 보내는 선교사인 교회는 ‘보내어진 선교사’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사역을 위해 밤낮으로 중보 기도하는 후방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예산의 상당 부분을 선교와 전도, 구제와 봉사를 위하여 과감히 투자해야 합니다. 파송된 선교사가 안심하고 복음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이상적인 선교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우리에게 맞는 맞춤형 선교 정책이 필요합니다. 당장 시행해야 할 정책도 필요하지만, 한국교회와 우리교단의 선교정책과 호흡을 같이하는 우리의 중장기 정책이 필요합니다.  

그 정책에 따라 선교의 역량을 준비하며, 선교사 후보생을 선발 훈련하며, 단기선교여행 등을 통해 성도들에게 선교지 체험을 갖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구역과 전도회와 사역팀들이 모여 나누는 대화 가운데 복음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가 주된 대화의 주제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노회와 총회, 그리고 연합회 등과 보조를 맞춰 때로는 개교회적으로, 때로는 연합된 힘으로 선교 과업을 이루는 일에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꼭 먼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사는 곳이 선교지입니다. 성경은 선교의 제1차 대상이 골육과 친척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살라미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했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두 사람의 강한 애착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먼저 이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회당으로 향하도록 재촉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가정의 선교사이고, 직장의 선교사이고 사회의 선교사입니다. 해외 선교지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일터에서도 순교할 각오로 사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보통 사람이 직장에서 여덟 시간 일한다고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홉 시간, 열 시간 일할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보다 1, 2시간 정도 회사를 위해서 말없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잔업수당을 받지 못해도 기쁜 마음으로, 때로는 밤 늦게까지라도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사의 마음이고 사도행전의 마음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끝이 없습니다. 마침표(period)가 아니라 콤마(comma)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은 끝났지만, 교회는 계속하여 29장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흩어져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다시 나가서 교회를 세우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교회가 교회를 낳는 일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고 우리 교회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것이 속사도행전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서현교회가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를 온 마음을 다하여 원합니다. 사도행전적인 교회는, 1)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 2)예수의 삶을 사는 공동체, 3)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공동체, 4)고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 5)거룩과 정직을 추구하는 공동체, 6)주의 종의 동역자를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7)순교하는 공동체, 8)이방인을 품는 공동체, 9)땅끝까지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야말로 우리교회가 지속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주님의 이 꿈과 비전, 개인 영혼을 살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한 교회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비전에 동참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척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를 낳고 또 낳아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정신은 바로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지금도 주님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교회는 이 땅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방가르드(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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