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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변화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행 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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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행 10:9-16)

한 젊은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22살에 인생에 전환점을 이루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함께 길을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숨지는 무서운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는 수도사가 되어 평생 주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수도사가 된 후 신학을 공부하면서 29살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을 강의했고, 특별히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수도사로서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육체적인 수난을 통해서 구원의 기쁨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17절을 읽으면서 그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런 육체적인 수난이나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위대한 발견을 통해서 마음속에서 샘솟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 1483-1546)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당시 거대 공룡과도 같았던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행태들에 대해서 개혁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권한은 왕권 위에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중심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였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서 힘없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위에 군림한 교회는 정치와 야합하고서 백성들을 갈취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당시 힘없는 백성들은 자주 전쟁터에 동원되어야 했고,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며 거지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영주들은 군사들을 동원해서 이 거지떼를 자기 영토에서 쫓아내는 것을 중요한 업무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런 잘못된 사회를 교회가 바로 세워가야 하는데 교회는 그런 힘없는 사람들을 오히려 외면했습니다. 사제들의 타락은 말할 것도 없고,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사제들과 권력자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황청의 금고에는 돈이 넘쳐나는데도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데 필요한 돈을 백성들에게 거둬들이기 위해서 면죄부라는 것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권력은 그 어떤 변화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거짓된 교리로 백성들을 현혹하거나 착취하는 로마 교황청에 개혁을 촉구할 때에 로마 교황청은 젊은 사제인 루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 성당 문에 로마 교황청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95개 반박문을 내걸게 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교황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젊은 사제 하나가 한 말이 가져올 엄청난 개혁의 물줄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은 견고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변화하지 않고 이대로 가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를 꺼려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변화 없이는 새로운 내일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그럼에도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갔던 베드로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전통전인 유대인입니다. 당시 유대인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주전 586년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고국을 떠나서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던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중에는 다시 조국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의 문화 속에 살면서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렇게 다른 나라에 살면서 다른 나라의 문화에 젖어 살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이 열려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것에서 상당히 개방적이었습니다. 반면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서 이스라엘 땅에서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용어로 사용하던 아람어를 쓰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땅을 벗어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방 문화를 접하지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방인이나 이방 문화에 대해서 닫혀진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통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율법과 그들만의 전통을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 변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범죄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또 오순절 성령체험을 한 이후 히브리파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전통에 대한 고집들이 많이 꺾였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지금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무두장이는 가죽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은 짐승의 사체를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부정한 것을 만지는 사람 역시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두장이는 죽은 짐승의 사체에서 가죽을 벗겨내 그것으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가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매일 죽음 짐승을 만져야 합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두장이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옛날 사람들이 백정을 천대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잠깐 들린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 마지막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 날’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두장이 시몬의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잠을 자며 함께 생활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옛날 베드로였다면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모습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랬습니다. 남들은 부정하다고 생각해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던 나병환자들을 직접 만나셨습니다. 심지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그 병을 고쳐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어 멀리하려 했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 벽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후 베드로도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던 무두장이의 집에 며칠 씩 머물면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인 베드로가 참 많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변화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베드로에게는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복음을 더 많이 전하는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이 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제 육시에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제 육시는 요즘으로 말하면 낮 12시입니다. 낮 12시는 유대인의 기도시간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오후 3시, 그리고 해 질녘을 기도 시간으로 정해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낮 12시에 기도하기 위해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습관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허기를 참는 방법으로 기도하러 갔던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하고 싶은 강한 열망이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붕은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두장이의 집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올라간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은 해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인해 기도하기 좋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기도 중에 베드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더니 보자기 같은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데, 그 안에는 각종 네 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나는 것들’은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깨끗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먹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환상 가운데 하늘에서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인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분류되어 있는 것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잡아먹으라니,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10절 마지막에 표현된 대로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황홀한 중에’라는 말은 일반적인 지각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사용했던 개역성경에서는 ‘비몽사몽 간에’라고 표현되어 있고, 공동번역 성경에는 ‘무아지경’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절반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거의 무의식 상태인 그 때에도 부정한 것은 먹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생각 깊숙이에 유대인의 전통과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마만큼 베드로가 유대인의 전통과 문화를 버리고 복음적인 사고로 변화된다는 것이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가서 함께 기거하며 함께 밥을 먹고 생활할 정도로 많이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더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방인들을 품을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유대인은 품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부정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하더라도 유대인은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아직까지도 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말하지 말라.’ 그리고 세 번이나 그런 환상을 경험한 후에 베드로가 깨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으로 보면 세 번이나 그런 환상을 보았음에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플라톤(Platon, B.C. 428-348)이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참 진리를 찾은데 방해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동굴의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동굴 안에 갇혀 살고 있는 한 무리의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고, 얼굴도 뒤를 돌아볼 수 없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오직 동굴의 안쪽 벽만을 쳐다볼 수 있을 뿐 동굴 바깥쪽에서 비쳐오는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가 족쇄를 풀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강렬하게 비추는 태양빛을 따라 동굴 입구까지 가 봅니다. 동굴 밖에는 더없이 아름답고 환한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저 동굴 바깥에서는 환한 태양이 비치는 아름답고 멋진 세상이 있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동굴 벽만을 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동굴 밖에 더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동굴의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많이 깨우쳤는데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사고, 어려서부터 받아온 문화적 교육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베드로는 ‘부정한 것이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시고,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하던 중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신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떻게 이방인이 성령을 받을 수 있지?’ 라고 생각하던 베드로는 그 때서야 환상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깨끗하게 하여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베드로의 생각에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변화는 세계 선교역사에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변화를 받고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옛날 베드로처럼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선포한 바울과 유대 그리스도인 사이에 심한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교회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해 줍니다.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자신이 보았던 환상과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임함으로 그들에게도 구원이 이르렀음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셨고,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확실하게 증언합니다.(사도행전 15:9-11)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 전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락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 바울은 거리낌이 없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를 비롯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굴의 우상’과 같이 유대적 사고에 굳게 갇혀 있던 베드로의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시고 세계 속으로 복음이 증거되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그 때 베드로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의 전유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시기 위해서 똑같은 환상을 세 번씩이나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유대적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이 시대에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깨져야 하 것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져야 하고 변화되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변화된다는 데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하고 안전함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스로 변화를 선택하면 우리는 변화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변화를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변화하려 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변화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 변화를 선택할 때 우리가 겪는 아픔이나 수고보다도 훨씬 더 큰 아픔과 희생을 겪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 천주교에게 변화를 요구할 때 그 변화를 수용했더라면 종교개혁은 이렇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 천주교 스스로가 변화됨으로써 세계 역사에 더욱 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천주교는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젊은 수도사의 변화를 요구하는 소리를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만드셨고, 그로 인해 유럽 전체에 엄청난 개혁의 물결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변화를 거부하자 하나님께서 로마 천주교에 엄청난 시련을 겪게 하셨고, 많은 것을 잃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하심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순응하면 우리는 변화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협력자가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하심에 고통스럽게 끌려가게 됩니다. 
  
교회는 시대적 변화와 함께 변해야 합니다. 복음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거기에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고집스럽게 옛날의 전통을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인양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입고 있는 옷을 바꾸려 하는데도 마치 복음을 바꾸려하는 것처럼 변화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변화의 물결의 흐름을 탈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꼭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어느 누구도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그렇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지, 기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빨리 주님이 재림하셨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던 것처럼,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 ‘이놈의 세상 확 바뀌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탄식의 소리가 나올 때에는 변화를 기다립니다. 변화될 때 겪는 고통보다도 지금의 상황이 더 처절하기 때문에 변화를 기대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이 아닌 이상 누구나가 변화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려 할 때 우리에게 서서히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변화를 기다립니다.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변화할 준비를 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에게 ‘초등학교에 가고 싶냐’고 물으면 대부분 ‘가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초등학생은 빨리 중학생이 되고 싶고, 중학생은 고등학생이, 고등학생은 빨리 대학생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학년이 바뀌고 교복이 바뀌는 것이 스트레스이고 두려움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알고 준비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연세가 들어갈수록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라고 해도 지금 살던 집이 좋다고 이사하려 하지 않습니다. 변화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노인들에게는 새로운 날에 대한 희망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독수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독수리는 30년을 산다고 합니다. 30년이 된 독수리는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무디어진 부리 때문에 먹잇감을 사냥하지 못해서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독수리는 60년을 살기도 합니다. 독수리가 서른 살에 생을 끝내지 않고 60년까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정을 하나 거쳐야 합니다. 독수리가 30살쯤 되면 그 날카롭던 부리가 구부러져 무디어지고, 무엇이든 움켜쥘 것 같던 발톱도 다 닳아서 낡아집니다. 우아하고 거대한 날개는 거추장스러울만큼 깃털이 무거워져 재빠른 날개짓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길로 갈 것이냐’ 아니면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새로운 삶을 살 것이냐’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 독수리는 바위산으로 날아가 둥지를 틉니다. 그리고 거기서 외롭게 150여일을 홀로 지냅니다. 독수리는 먼저 자신의 무디어진 부리로 바위를 쪼아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부리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계속합니다. 그러면 다 닳아진 독수리의 부리에 튼튼한 새 부리가 다시 나오게 됩니다. 그 튼튼한 새 부리가 나오는 데까지 약 50일 정도가 소요됩니다.
  
새로운 부리가 나오면 독수리는 그 튼튼한 부리로 자신의 발톱을 하나씩 뽑기 시작합니다. 발톱을 뽑아내는 고통을 참아내면서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리면 거기에서 새로운 발톱이 나옵니다. 새로운 발톱이 나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약 50일 정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수리는 쓸데없이 커져서 무거워진 자신의 깃털을 하나씩 뽑아냅니다. 그러면 새로운 깃털이 생겨납니다. 털갈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깃털이 나오는 데도 50일 정도가 걸립니다. 그렇게 150일 동안 고통과 아픔을 겪고 나면 그 독수리는 제2의 생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 독수리는 30년을 더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무디어진 부리와 발톱을 뽑고 30년을 더 살 것이냐, 아니면 고통을 두려워하여 그냥 그 자리에서 죽음으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은 선택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선택한다면 교회는 새로워질 것이고,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평안을 위해서 변화를 거부한다면, 그 자리가 곧 마지막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위상이 끝없이 추락한 한국교회는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개혁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느냐, 아니면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풍요를 그저 누리기만 하다가 서구 교회들처럼 쇠퇴와 몰락의 길로 갈 것이냐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오늘의 평안을 누리기만 할 것이냐, 아니면 변화를 통해 더 나은 교회로 성장할 것이냐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변화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변화를 거부하는 자리에는 썩은 물만 고이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고통스럽더라도, 조금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십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서 나간 사람을 선구자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 누가 선구자여야 하겠습니까? 독수리가 자기 부리를 바위에 쪼아 없앰으로 튼튼하고 새로운 부리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창조적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선구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그 선구자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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