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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 (행 15:1-35)

첨부 1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 (행 15:1-35)


오늘날 기독교회의 형태 중에 '독립교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 교단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어떤 상회 즉 노회나 총회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교회의 조직이나 권위가 그 한 교회 자체 내에만 한정되어 있는, 그야말로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교단이나 총회 하면 왠지 권위주의적인 냄새부터 먼저 풍기는 데 비하여, 그런 것들을 완전히 배격하는 독립교회는 무언가 훨씬 더 순수한 것처럼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런 독립교회를 강력히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회는 성경에 있지만 교단은 성경에 없다.'라는 식의 논리를 펼 것입니다.
하지만 특정 단어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성경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얕은 논리입니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없지만 삼위일체의 내용은 곳곳에 가득 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교단'이라는 단어는 없을지라도 그런 개념은 성경 속에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 어떤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가 개회되는 장면인 4절에 보면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이라는 표현이 있고, 그 회의가 폐회되는 22절에도 순서는 바뀌어 있지만 역시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예루살렘 공회'라고 부르는데, 그 성격이나 구성원들을 볼 때 오늘날의 '교단 총회'와 똑같은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즉 신약 교회에 나타나는 제1차 교단 총회가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루살렘 총회는 과연 무엇 때문에 모였으며 어떤 일을 처리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오늘 종교개혁 제495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과연 바른 교단의 존재 의의가 무엇이며 총회가 지교회(支敎會)의 발전과 보전에 얼마나 요긴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루살렘 총회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교리'를 선포한 공회였습니다.

본문 1절로 5절에 기록하기를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일취월장하고 있던 안디옥교회에 그야말로 평지풍파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교인들이 반드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안디옥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었습니다.
5절에 있는 대로 이런 자들은 바로 "바리새파 중에 믿는" 자들로서 아직도 '율법을 완전히 준행하는 것이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원 문제를 '인간의 행위'와 결부시킨 것으로서 곧 '이행득구'(以行得救) 교리의 최초 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 내에 분열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과 책임은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자들의 소위 '고집'이나 '독선적 언행'이 결코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처럼 '비진리'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단'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디옥교회에서 그런 율법주의 이단에 의하여 교리에 대한 변론이 발생하게 되자 그들은 그것이 자체 내에서 해결하기는 너무 어렵고 또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그 문제를 상회에 보고하여 확실한 자문을 구하기로 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위시한 몇 사람의 대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파송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6절부터 11절의 말씀에 "6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안디옥교회로부터 상정된 그 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일종의 총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많은 변론"이 있었다는 것은 그 교리가 초대교회 시절부터 기독교 교리 논쟁의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 오랜 토론은 사도 베드로의 증거를 통하여 간단하게 결론이 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공회에서 자기가 이방인들을 전도할 때 체험했던 사실을 회상하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증했습니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고, 즉 '오직 믿음'만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무 차별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공통적인 길인 것을 천명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바리새파의 최고 모토인 '율법 준수에 의한 구원 교리'는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솔직히 못 박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원은 오직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 것, 즉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게 되는 것일 뿐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행득구'는 사도 베드로부터가 '하나님을 시험하며 사람의 목에 멍에를 거는' 이단 교리라고 명백히 거부했던 교리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행득구의 교리를 따른다면 천주교에서 초대 교황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도 베드로조차도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니 이 얼마나 자가당착의 모순이겠습니까?

사람의 행위로는 베드로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을 길이 없지만 오직 믿음만으로 확실히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이신득구 교리는 기독교 구원론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이 교리가 안디옥교회를 바로 서게 했으며, 이 교리가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를 진정 영적으로 '하나의 우주적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회가 확정하고 공포했던 이 이신득구의 교리가 오늘 본문의 사건 이후에도 신약 성경에서 가장 자주 반복하여 언급되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종교개혁자들 역시 이 '이신득구의 교리'는 곧 "교회의 존속이 걸려 있는 교리"이며 "그리스도의 신인성론과 삼위일체론에 맞먹는 3대 중요 교리 중에 하나"라고 천명했던 것입니다.
신약교회의 첫 총회였던 예루살렘 공회가 보여 준 것처럼 바른 교단은 이단으로부터 '바른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루살렘 총회는 '성경 말씀의 권위'만을 높인 공회였습니다.

12절로부터 21절에 "12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3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16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 그때까지 온갖 '변론'으로 설왕설래하던 예루살렘 총회는 조용해졌고, "바나바와 바울"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전도를 통하여 이방인들을 어떻게 부르셨는지를 간증했습니다.
이어서 발언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교회 지도자였으며 아마 장로 직분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는 "시므온이 고한 것" 즉 지금 막 사도 베드로가 선언한 진리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간증한 체험들을 구약 성경 아모스 9장 11절과 12절을 인용하여 재차 확증해 주었습니다. 

그 아모스의 말씀은 재건된 "다윗의 장막"으로 상징된 신약 교회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과 함께 구성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는 것은 이방인 구원은 일찍부터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다윗 장막' 즉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라,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 즉 "주를 찾는 것"만으로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이미 분명히 구원을 얻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또 다른 구원의 조건을 하나 더 얹어 준다는 것은 오직 그들을 "괴롭게" 만드는 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야고보는 단정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어서 제시한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 하라"는 네 가지 금지 조항은 어떤 '구원의 조건'으로 내건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마땅히 따라와야 할 '기본적 생활윤리'를 밝혔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선포하고 바울이 간증하고 야고보가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확증했을 때, 그 예루살렘 총회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 이상 토론할 여지도 없이 그야말로 간단명료하게 만장일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려운 교리 문제가 상정되었던 예루살렘 총회는 결국 성경 말씀이 증거한 것만을 확인하고 성경 말씀이 지시한 것만을 따라감으로써 오늘날까지 모든 지교회와 교단 총회 역시 오로지 '성경 중심'으로만 세워져야 함을 명백히 보여 주는 귀감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개혁주의 기독교 역시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유일한 규범'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유일한'이라는 표현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다른 그 어떤 비교의 대상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규범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천주교에서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제일의 규범'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제일'이라는 말은 '제이, 제삼'이 계속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추기경 공회에서 선포하는 '법령'이나 교황이 내리는 '교황령' 따위가 천주교에서는 '신앙과 행위에 대한 다른 규범들'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그저 예의상 '성경이 제일 규범'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적으로 천주교에서는 '교황령이 제일 규범'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총회는 그런 식으로 '교회가 성경 위에 군림'하는 공회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첫 총회가 보여 준 것처럼, 바른 교단은 오로지 성경의 권위만을 최고로 높이며 성경만이 신자와 교회가 지키고 따라가야 할 유일무이한 절대적 규범임을 천명해야 할 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표어와 함께 또한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 역시 내걸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어디까지나 성경 말씀에 의하여 세워졌으니 당연히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는 존재이며, 그래서 오늘날도 참된 개혁주의 교회라면 교단의 헌법이나 강단의 설교에 이르기까지 당연히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절대규범'으로 높이고 따라야 함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루살렘 총회는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지켜 준 공회였습니다.

22절 이하 29절에 기록하기를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25-26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27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는 그 결의된 사항을 안디옥교회에 서신으로 알리면서 그 서두에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이 "이방인 형제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권위의식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어디까지나 '형제 대 형제'로서의 겸손하고도 친근한 자세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재 안디옥교회에 발생한 사건을 두고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 없이... 너희를 괴롭게 하고 혹하게 한다 하기로"라고 함으로써, 그 문제는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으로 교회를 어지럽힌 자'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 후에 "성령과 우리는"이라고 서두를 시작함으로써 그 예루살렘 총회의 가결 사항은 '공회의 결정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권위'에 따른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당연히 안디옥교회가 순종해야 할 사실인 것도 명백히 했습니다.
실로 예루살렘 총회는 산하의 지교회에 대하여 '형제를 겸손히 대하는 자세'와 동시에 '성령의 뜻을 따른 엄중한 치리'를 동시에 발휘했던, 실로 모범적인 공회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예루살렘 총회는 "요긴한 것들" 몇 가지만을 명하고 그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로 결정한다고 안디옥교회에 통보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이란 우상 제사에 참예하고 그 제물을 먹는 것을 가리키는데 기독신자라면 당연히 금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금한 것은 생명의 상징인 피를 그대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특히 유대인 출신 기독신자로서는 거의 생활화되어 있는 기본적인 윤리였습니다.
"음행"은 그 당시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이방인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대표적인 죄였던 까닭에 안디옥교회와 같은 이방인 지역의 교회에 특히 강조되어야 할 금기사항이었습니다.

당시 이방 지역에도 이미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었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 신자들뿐 아니라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도 역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 내에서 유대인 출신과 이방인 출신 교인들이 서로 형제 화목에 시험거리가 되지 않는 가운데 교회의 순결성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자들이 '함께 지켜야 할 어떤 기본적 윤리'가 설정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요긴한 것 네 가지'라고 예루살렘 총회가 판단했던 것이며, 한국 교회가 조상숭배 금지, 미신행위 금지 혹은 주초 금지 등을 전통적 윤리로 지키는 것도 바로 그와 똑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는 이처럼 '이신득구의 교리'와 동시에 '신자의 기본 윤리'에 대하여 "일치 가결"함으로써 교회의 진리와 순결을 보존하고 교인끼리의 질서와 화평까지 지키는 아주 중대한 책임을 다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야말로 유종지미였습니다.
30절부터 35절 말씀에 "30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5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한 것과 그 모든 "위로"와 "권면"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당시 최고로 급성장하던 교회였으므로 큰 핍박으로 인하여 교세가 많이 약해져 있었던 예루살렘교회보다 오히려 훨씬 더 큰 교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네 교회 내에 중대한 교리 문제가 발생했을 때 외부의 간섭 없이 자체적으로 처리하겠다고 '독립교회'식의 발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그 문제를 오직 예루살렘 총회에 상정함으로써 교회가 분열되는 일을 막았을 뿐 아니라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도 더욱 든든히 서게 되었습니다.
즉 초대교회 시절부터 지교회는 총회의 치리를 받음으로써 교리의 진리와 동시에 신행일치의 생활까지도 똑바로 지킬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단이라는 단체와 총회의 권위 때문에 지교회의 독립성이 억압을 당하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노회가 없으면 목사가 자기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목회하고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교회와 성도는 거룩하지만 교단과 총회는 권위주의와 교권주의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선입견일 뿐입니다.
  
오히려 교회 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독립교회들이 쉽게 분열되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야말로 그 교회가 상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그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성경중심의 치리' 대신에 '민주주의라는 미명으로 치장된 인본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처럼 교단의 노회나 총회와 같은 상회들은 목사의 독단이나 교인들의 다수결의 오류를 방지하여 지교회들의 질서와 화평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성경이 명하고 있는 필수적 영적 조직'인 것을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기독교이고, 교회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교단 따위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볍고도 위험한 속단입니다.
오직 정통 신앙을 지키고 있는 교단에 속한 교회가 되어야만 '기독교 비슷한 탈'을 쓰고 있는 이단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중심의 헌법을 가지고 지교회들을 세우고 지원해 주는 교단에 속한 교회가 되어야만 '인본주의'와 '교권주의'가 판을 치기 쉬운 이 지상교회들이 진정 '그리스도만을 지체들의 머리로 모신 교회, 예수님만을 목자장으로 따르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천주교야말로 교회라는 이름만 내걸고 있는 오늘날의 '바리새인 종교'임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들은 자기네 표현에 따르면 '제1대 교황'이라고 하는 베드로조차 '스스로 질 수 없다'고 천명했던 이행득구의 교리를 여전히 최고의 구원론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명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교회와 성도에게 짐 지울 수 없다.'라고 천명한 것과 정반대로, '교회가 성경을 결정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성경보다 더 높이는 주객전도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로마의 교황이 실로 무엄하게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면죄부'를 판매하고 '희년'을 선포하는 등의 독재적 권위를 남발하고 있으며, 추기경 회의의 '법령'이라는 것을 가지고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교리를 제멋대로 지어내는 가운데 교회와 신자 위에 군림하는 대표적인 교권주의 종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총회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총회는 각 신자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이신득구'의 바른 교리를 선포한 공회였습니다.
그 총회는 성경과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성경 권위만을 앞장세우고 지극히 높였던 '성경 중심'의 공회였습니다.
그 총회는 공회에게 주어진 책임과 권위를 오로지 '모든 성도를 형제처럼 대하며 모든 교회를 진리와 거룩으로 지키는' 데에만 두고 전심전력을 다했던 공회였습니다.

이런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의 총회, 바로 이것이 우리의 종교개혁자 선배들에 의하여 정확히 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 총회와 똑같이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만을 외쳤고 그 결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리는 참된 교회운동을 회복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사도'의 증거인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제정된 '장로교 헌법'을 준수하는 '교단'과 교회의 대표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 조직된 '노회'나 '총회'는 이처럼 지극히 성경적인 공동체임을 깨닫고, 비록 495년 전과 꼭 마찬가지로 지금도 소수에 불과하지만 역시 그때와 똑같은 '정통 개혁주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따르고 있는 우리 교단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서 이 진리운동에 함께 진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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