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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하시는 일 (고전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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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하시는 일 (고전 12:1-11)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그들을 권면하기를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자유를 얻었지만 개인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고,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는 일이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교회의 평안을 위하여 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함으로써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이 교회 안에서 최고, 최우선의 가치를 지니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은사>라는 새로운 주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가 목적하는 것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공동의 유익과 하나 됨이라고 하는 데 있어서 앞서 쓴 바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고 다양하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본문 4-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은사도 여러 가지이고 직분도 여러 가지라고 말합니다. 또 8-10절에서는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받은 이 다양한 은사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사를 과도하게 남용하는가 하면, 여러 가지 은사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크고 중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며 그것을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까지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그것이 그가 줄곧 강조해온 교회의 덕 세움과 하나 됨에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성령의 은사의 문제에 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말이 본문의 서두인 1-3절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신자들 각자가 받은 은사가 무엇이든 간에 어떤 특정 은사도 그것을 받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성령의 역사 아래 있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시금석이 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즉 어떤 특정한 은사를 받았든 안 받았든 상관없이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 아래 있다고 인정받게 하는 유일한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고백임을 밝힌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시라고 하는 모든 사람은 다 성령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감동과 설득이 아니고서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나사렛 사람을 온 인류의 주님이시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 영적인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 바울의 핵심주장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니던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게 되었겠느냐고 되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성령에 이끌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는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 신앙에 있어서 누가 더 뛰어나고 말고 할 것도 없고 서로 편 가르기 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은사를 우리들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려고 하는 두 번째 요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4-6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하지 않습니까? 

또 8-10절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한 후 11절에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한 성령으로부터 그의 뜻을 따라 각각 다르게 받은 것인데 어떻게 무엇이 더 크다 작다 할 수 있으며 내가 받은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남이 받은 것을 부인하거나 서로 나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인들이 받은 다양한 은사를 말하면서도 성령과 주와 하나님의 하나이심을 밝히면서 강조한 세 번째 점은 공동체의 유익입니다. 그는 본문 7절에서 쓰기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것은 그것이 각각 그 사람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며 또한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들이고 전체를 위해서 다 유익한 것들이라면 사람들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며 다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주된 일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일으키고 신자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교회 전체에 유익이 되게 하시는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같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교인들 사이에서 서로 간의 다양한 은사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합력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고 일치를 이루어야 할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이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할 줄 모르거나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거나 교회 전체의 유익을 추구할 줄 모르며 분쟁을 일삼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반하는 증거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신자들이 성령의 은사의 문제를 가지고 혼란스러워한 때가 있었습니다. 일부 교단에서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그들의 전유물로 삼으며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고 방언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와 믿음과 구원의 유일한 증거로 주장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가 성령도 받지 못했고 믿음도 없으며 따라서 구원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가지거나 불안해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 방언 훈련시키는 학원까지 등장하는 웃지 못 할 일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오순절 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셨을 때 제자들이 유대 밖 온 지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던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그들이 각 각 자기 지방의 말로 다 알아들을 수 있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을 전한 사실을 가리키는 방언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것처럼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특별한 언어입니다.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방언 등의 특별한 은사를 의심하거나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은사는 오직 사도시대에만 국한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전하는 성령의 역사를 부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방언처럼 들리는 것이라고 다 성령으로부터 온 은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혼란시키기 위해 마귀가 일으키는 방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방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방언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들은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몇 가지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믿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믿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을 리가 없고 그런 자가 성령의 방언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기준은 성경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쓰기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0-21) 했는데 한 성령께서 한편으로는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을 부인하게 하실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준은 방언을 한다는 사람이 보이는 행실입니다. 방언의 은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 했습니다(갈5:22-23).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 하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진정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방언 등 특별한 성령의 은사는 오직 사도시대에만 국한된 것이었다는 주장을 우리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시대적으로 제한할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은사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일어나는 성령의 은사의 놀라운 일들을 근거 없이 부인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특이한 현상을 무분별하게 믿고 쫓아가려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위에 제시한 몇 가지 기준들을 잘 적용시켜 가며 분별력 있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곧 뒤따라 보겠지만 성령의 은사는 다양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 따라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믿음이 없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 아닙니다. 특별한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주신 이가 성령이시며 어떤 은사를 주신 데는 그 책임과 사명이 따른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가장 크고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어야 할 은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다른 은사는 없어도 되지만 이 믿음, 소망, 사랑은 모든 신자들이 다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성령, 한 주님,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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