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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의 대헌장 (창 1:27-28, 갈 5: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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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대헌장 (창 1:27-28, 갈 5:1,13-15)
  

어느 날 20세 된 아들이 집이 답답하고 엄마 잔소리도 듣기도 싫어 ‘집을 나가 자유스럽게 살고 싶으니 말리지 말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이 현관 문 앞에 나갈 때 달려 나갔습니다. 아들이 제발 날 막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신발을 신으며 말했습니다. “누가 널 막는다고 그러냐? 어서 앞장서라 같이 떠나자.” 사람들은 모두 자유하고 싶어 합니다. 속박이나 구속받는 것을 답답하다고 싫어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결혼을 그리고 아이 낳는 것도 구속이라고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집안이 답답하다고 집을 떠났으면 합니다. 자유는 집을 떠나고 결혼안하고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 초등학교 교정의 울타리 없애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울타리를 허문 후에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지 않고 모두 교실로 모여들었습니다. 담장을 허무니까 아이들은 왠지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초등학교에 성추행범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사건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오해 때문에 발생한 해프닝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1장~4장인데 여기서는 복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라고 강조합니다. 지금은 복음시대인데도 율법주의자들이 자꾸만 율법을 강조하고 할례를 강조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점을 주의하라’로 강조합니다. 또 하나는 5장~6장으로 여기에서는 자유를 강조합니다. 5장13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기독교의 참 가치는 자유함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구원받음으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유한 존재로 창조 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27절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영성을 이어받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영혼이 자유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자유한 존재인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동산을 함께 거닐고 있습니다.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자유의 극치입니다. 2장은 천국 모습입니다. 그런데 3장에 넘어가면 갑자기 지옥이 펼쳐집니다. 선과 아름다움과 자유가 박탈됩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은 결과입니다.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고 하나님이 오실까봐 숨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습니다. 사람은 자유한 존재입니다. 자유 할 때가 가장 강할 때이고 빛날 때이고 사람다울 때입니다. 그래서 자유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본문은 주께서 우리에게 자유하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 사함 받음의 자유입니다. 내안에는 죄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원죄입니다. 이 원죄는 피를 통해 전수되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줍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장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줍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다 경찰차를 만나면 마음이 뜨끔해집니다. 모두 그런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죄지은 것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내안에 죄의 흔적이 남아서 그렇습니다. 

지명수배자라면 그 뜨끔함이 더욱 거셀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무리 숨겨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항에서 밀수 자를 색출하는데 모든 사람을 검색하지 않습니다. 걸음걸이를 보면 밀수 자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죄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고 마음도 부자연스러워집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가서 2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영적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과 틀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영적 히스테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윗을 증오하여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살아갑니다. 사울은 40년간 왕으로 있었지만 지옥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에 대한 질시 때문입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저녁이면 하나님이 오시고 함께 거닐고 대화하는 천국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오시지 않으면 기다려졌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후에는 그때부터 하나님이 오실까봐 저녁이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숲속에 숨었습니다. 사람은 영혼이 평안해야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러려면 죄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로마서 3장23절을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아래에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었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한때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절대 신조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덮고 지우고 용서하고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늘 고발하고 지적하고 심판합니다. 바울 시대는 복음의 시대가 시작되어 죄 사함 받고 용서받고 회복을 이루어 참 자유가 주어지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도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할례를 강조하고 복음을 희석시켰습니다. 

그래서 5장4절을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주의적 신앙은 잘 믿고 좋아 보이나 복음적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철저하였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타인에게도 엄격하였습니다. 덮고 치유하지 못하고 지적하고 흠을 발견하여 심판하곤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에게 엄격하였고 철저하게 11조 헌금과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에게도 강조하였고 나처럼 되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아이들 중에 정신질환을 가진 아이들과 자폐아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율법적 부모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류대를 졸업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너희는 최소한 모 대학은 가야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야 부모들이 체면이 서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아이들이 90점 맞은 시험지를 가져오면 이것도 시험이냐고 던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심각하게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그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학교 폭력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 강남이 최고라고 합니다. 그 부모들의 완벽주의 즉 율법주의적 사고가 아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선입니다. 바울은 회심 전 유대교인일 때 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들을 무작위로 핍박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1절을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게 대하여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독선입니다. 이런 독선적인 부모가 많고 신앙인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나 집안이나 공동체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화하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속박하고 그 삶이 피곤한 것입니다. 이 그릇된 자아를 하루 빨리 깨야합니다. 그래야 조화가 이루어지고 남을 인정하고 남을 배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유하게 됩니다. 

사랑 받음 

5장13절을 보면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또 14절을 보면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받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폐일언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든 사람의 사랑이든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언제나 건강하고 활발하고 자신감에 넘치고 자신 있게 살아갑니다. 사랑처럼 강한 희망적인 약이 없습니다. 사랑이 최고의 약입니다. 

어려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려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문제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평생 문제의 소지를 안고 살아갑니다. 성장해서도 성격장애를 가질 수 있고 인간관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와이 카우마이 섬에는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이미 워너교수가 40년간 그 원인을 연구하였습니다. 이 섬 출생자 가운데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습니다. 왜 그럴까를 연구하였습니다. 연구하다 보니까 그중에 우수생도 간혹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적응자의 원인을 발견하려다가 우수한 사람이 발생된 원인이 더 궁금해서 우수생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연구결과 우수생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씩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유아 시 1-3세 때 예외 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준 사람이 한사람 이상씩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이든 형제든 조부모등 아니면 이웃집 아저씨든지를 불문하고 사랑을 받은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 부적응 자들에게도 공통점이 한 가지씩 있었는데 그 사랑의 대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흉악범들의 생애를 조사해 보니까 7-80%는 공통점이 어려서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 표본입니다. 인간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는 매사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나누고 사랑입니다. 13-14절을 보면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소중한 사랑은 나누고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받을 때도 행복하지만 그런데 줄때는 더 행복한 법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 사랑이 너무 지나칩니다. 얼굴 가꾸는 일에 미련 없이 지출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왜 사랑하라고 강조하시는가 하면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행복심리학이 개설되었는데 히트를 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심리학 교수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유쾌한 경험을 하라는 것과 섬기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구해도 행복해지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더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새로운 발견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서 누차에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자신 있게 자유하게 유쾌하게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또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명의식

5장16절을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22절을 보면 성령의 열매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9가지인데 모두 내면을 회복시키고 혁신시키고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고 섬기게 하고 기쁘게 일하도록 하는 자질을 주시는 자본들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혁신시킵니다. 내면의 환경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정신을 새롭게 하고 사명감을 동기를 이노베이션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행복한 사람은 사명감과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사는지를 알고 사는 사람, 이 일 하다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고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그 일을 할 때 최고의 자유함과 행복함과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성공한 분들을 보면 다 좋은 동기가 있습니다. 일찍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으로 살아갔습니다. 그 삶이 자유한 삶입니다. 동기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재적인 동기입니다. 왜 사업을 하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한다 그것이 외적 동기입니다. 다음은 내재적 동기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하는 것이 아니고 일이 좋아서 합니다. 100만 장자들 101명을 조사했는데 그중 100명은 일이 너무 좋아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100만 장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 벌려고 사업하게 되었다는 사람은 단 1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한명은 외재적 동기자이고 100명은 내재적 동기자입니다. 성공한 피아니스트들은 어려서부터 좋아서 피아노를 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모두 어머니가 윽박질러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외재적 동기입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열심히 치다 보니까 어느 지점에서 이 일이 참 좋다 전공으로 해야지 하는 내재적 동기가 발동한 것입니다. 그때 내재적 동기로 전환이 되면 유능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도 사업도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처음엔 목회를 강요되어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내재적 동기가 발로되어 오늘까지 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목회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것은 외적 동기에서 내재적 동기로 전환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점화적 동기입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동기가 발생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골프선수 박세리가 1998년도에 US 오픈에서 우승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골프가 아직 대중화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때 그 모습을 TV로 미국에서 크리스티나 김이라는 아이가 시청합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이렇게 인터뷰를 합니다. “나는 TV에서 박세리 선수를 보았어요, 그녀는 금발도 아니고 눈이 파랗지도 않았고 우리와 같은 피붙이였어요, 그때 저는 저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나라고 왜 못하겠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아이가 연습을 시작하였고 10년 후 그 아이가 골프 프로가 됩니다. 그 경우를 박세리 키즈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점화적 동기입니다. 1998년에는 여자 골프선수가 1명이었는데 그 후 14년이 흐른 오늘 미국에서 활동하는 여자 골프선수가 전체 120명중 우리나라 선수가 40여명으로 3분의 1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위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위인이 모두 우상이고 멘토입니다. 또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점화적 동기를 갖게 된다면 이것은 대단한 사명의 삶입니다. 사명을 발견한 사람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갑니다. 주어진 일을 할 때면 자유로움이 있고 행복함과 즐거움과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최후 승리 믿음

1장8절을 보면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가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확신을 가진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확신의 결여 시대입니다. 매사가 불확실의 시대입니다. 태도가 믿음이 주관이 복음이 흐립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불행과 불만과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최후 승리를 믿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별 수단을 다 구사하여도 결국은 내가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언제나 너그러웠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주어졌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 만만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럴수록 사울은 더 안달하고 더 미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비록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확신 때문에 바울이 미친 듯이 전도하였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고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보고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사명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유한 사람이고 강한 사람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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