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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에도 길은 있습니다! (눅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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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도 길은 있습니다! (눅 4:1-13)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장애물들도 있고, 해결할 수 없는 장애물들 앞에 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게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장애물에 걸리게 되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를 못합니다.  비록 그 마음의 장애물의 높이가 한 계단의 높이도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장애물에 걸리면 아무 것도 하지를 못합니다.  분노의 장애물, 미움의 장애물, 자기 속에 있는 상처의 장애물, 의심의 장애물....  똑같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어려운 환경도 잘 넘어가는데 어떤 때는 훨씬 더 좋은 환경도 못 넘어갑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내 마음이 그렇게 반응하게 만드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마음의 장애물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무서운 장애물은 마음의 장애물입니다.  이 마음의 장애물에 걸리면 사람과의 관계도 다 깨어지고 맙니다.  마음 한 번 잘 먹으면 천리 길을 가볍게 갈 수 있지만, 마음 한 번 잘못 먹으면 한 걸음도 못 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그 마음에 장벽의 울타리를 치면 안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큰 산과 같은 마음의 장벽을 평지가 되게 하는 작업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의 마음 속에 어떤 장애물의 울타리를 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큰 산과 같은 마음의 울타리를 평지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마음의 장벽을 제거하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새로워지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과 인간의 차이점은 결국 그 마음의 태도에서 결정이 됩니다.  마음의 태도가 인생의 경쟁력입니다.  마음의 태도가 결국에는 자신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모든 인생은 그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 내면의 깊은 곳에는 절대자를 향한 마음이 다 있습니다.  영원한 본향을 향한 거룩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이 영원을 향한 마음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의 것을 다 가져도 그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인생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영혼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육신의 문제도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고, 먹고, 잠을 자는 육신의 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모든 문제들도 해결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보십시오.  오늘 우리의 시대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단군 이래로 가장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은 풍족해서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빈곤을 넘어서 아사 직전에 이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양식이 없어서 자살하지 않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길거리의 거지나 노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먹고, 입고, 육신으로는 살만한 사람들이 극단의 삶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잘 되라는 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잘 믿으라는 말입니다.  잘 믿으십시오.  정말 잘 믿으십시오.  옛날에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종종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이놈아, 배워서 남 주나?"  사실 잘 배운 사람은 남을 유익하게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믿음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정과 그 가문을 복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잘 믿으십시오.  후회 없이 믿으십시오.  자녀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믿으십시오.  제발 자기 믿음 하나도 제대로 못 지켜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면서 허우적거리는 그런 못난 사람이 되지는 마십시오.

가끔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죽는다.  그렇다면 죽은 이후에 나는 내가 그렇게 증거하고 외쳤던 나의 주님 앞에 설 수가 있을까?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아신다고 인정하시고 나를 맞아 주실까?"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곧 죽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 여러분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갈 것 같습니까, 아니면 지옥에 갈 것 같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잘 믿으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구원을 이루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그래서 요식상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잘 믿으십시오.  잘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해야 잘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라.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산같이 버티고 있고 때로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수많은 인생의 시험 앞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슬퍼하고 애통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아직 기회와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온함과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무장하십시오.  그래서 모든 시험도 시련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일단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이니 시련은 일단은 이겨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이 마귀의 시험이라고 하면 마귀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마귀를 신사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마귀 앞에 담대히 맞서십시오!  주님께서 "꾸짖으시고" 그랬습니다.  "야단을 치시고" 그랬습니다.  "호통하시고" 그랬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마귀를 신사적으로 대하라 그러면 피하리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둠의 세력과는 피 터지게 싸우십시오.  권모술수와 거짓과 비난과 악행 앞에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강하게 야단을 치십시오.  성경에 보면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과 타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거짓과 불의와 비난과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모든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생존 경쟁의 현장에 뛰어 들었을 때에 수많은 강요된 선택들 앞에서 우리는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선택의 원칙이 분명하면 괴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갈등하지도 않습니다.  원칙이 무너지니까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원칙을 붙잡으면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괴로워하거나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일어난 일보다 그 일에 대해서 겨우 그렇게 밖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자기 반응입니다.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선택에 대한 끝없는 후회 앞에 우리는 늘 안타까워합니다.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때 내가 그렇게 나약하게 행동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내면에는 지금도 힘의 대결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내 내면에는 끝없는 그런 대결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 속에는 자신의 더 아름다운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특징보다 낮은 인간의 만족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그런 유혹의 악마적인 힘이 줄기차게 대결하고 있습니다.  "아니야! 나는 선하게 살 수 있어"  "아니야! 나는 더 귀하게 살수 있어"라고 하는 내 안에 숨겨진 자아를 실현하려는 투쟁과 "뭐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라고 하는 낮은 인생에 만족하도록 유혹하는 악마적인 힘이 줄기차게 대결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성숙에는 언제나 어떤 통일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성숙을 어떻게 정의하든 거기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통일적인 어떤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사탄에 대항하는 우리 예수님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시험이든 예수님은 어떻게 대항했을까?  어떻게 대적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사명을 인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거룩한 찔림이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 삶의 떡으로만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기를"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떡 이전에 말씀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물론 인생에서 먹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에덴 동산의 첫 시험도 하와에게 먹는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따먹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이겼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먹지 말라고 그랬다."  사탄이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더냐?"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시험 앞에 이기려면 적어도 세 번 정도는 내 마음속에 확신을 해야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실 3번을 외치면 넘을 수 있습니다.  대개는 외칠 시간과 선포할 시간도 없이 타협하거나 그냥 넘어지거나 생각해보거나 그러다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탄의 제일 첫 번째 시험의 영적 의미는 눈앞의 감각적인 욕구를 우선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 때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욕구에 자기의 삶을 걸고 싶어합니다.  자기 보존을 위한 육체적인 욕구와 삶의 쾌락 원리에 다른 모든 우선 원리들을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최고지, 이것이 최고지" 라고 하면서 인간이 사회적 환경의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요?  눈의 유혹, 인간의 힘으로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환경결정론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환경이, 여건이, 상황이…."  그래서 결국은 사람은 배웠던 못 배웠던, 잘났던 못났던, 환경이 그 인간을 결정한다.  쾌락과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쾌락과 돈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사람은 떡으로만 살수 없습니다.  떡보다 귀한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떡보다 귀한 것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만일 떡이 생명의 모든 척도가 된다고 하면 얼마나 불행입니까?  정말 먹는 것이 모든 인간의 척도가 될까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랑하시는 여러분!  떡의 문제가 해결됐거든 떡으로 주지 못하는 삶의 의미, 사명을 붙드십시오.  떡의 문제에만 집착하게 되면 인간은 허망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떡의 문제가 해결된 오늘의 시대에 정신병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붙드십시오.  떡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사람은 사명을 붙잡게 됩니다.  다시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명을 붙드십시오.  사명이 없는 돈은 공허합니다.  돈이 없는 사명도 허무합니다.  "하나님! 사명을 붙들었으니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떡도 주시옵소서.  주여, 떡을 받았으니 주의 사명을 감당케 하시옵소서."

성경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사명이 없는 소유, 그것은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역사는 실증하고 있습니다.  떡을 가진 사람보다도 사명을 가진 사람이 훨씬 더 귀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붙드십시오.  삶의 의미를 붙드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란 의미입니다.  삶의 의미를 붙드십시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이 교회에 출입을 하며 다녀야 하는지 그 의미를 붙드십시오.  그 의미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모든 생명은 신령한 양식,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됩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햇빛을 받아야 되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들이 바람을 맞아야 되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들이 하늘의 비를 받아야 되는 것처럼, 모든 생명은 생명의 떡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먹어야 됩니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다워집니다.

목회를 오래 하면서 보니까 사람이 잘 살 때보다도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 영혼이 훨씬 더 아름다워집니다.  사람이 고통과 시험 가운데 있을 때에 훨씬 더 진실하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런 점에서 시련과 시험은 인간을 성장시키는데 필요합니다.  시험은 삶의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라고 하는 주님의 제자의 생애를 생각할 때 안타까움을 많이 가집니다.  그는 인생의 무대에서 시험들 앞에 실패만을 거듭한 사람입니다.  어쩌다가 삶의 무대에서 크고 작은 유혹 앞에 무너지고 실패만을 거듭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결정적인 시험이었던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배신하리라"고 하는 너무도 정확하고 자세하게 가르쳐준 그 사실 앞에서 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장소에서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보시는 그 때 맥없이 넘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실패에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베드로는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삭막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신다고 하는 부활의 능력을 기억하시고 어떤 시험 앞에서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이 곤고한 광야 같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복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고 어떤 시련 앞에서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실수와 실패가 반복되어도 하나님은 그 실패와 실수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꾼들을 성장시키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업들을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정들을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도자들을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명을 붙잡으십시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한 두 번째는 절대적 권력 지향의 유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높아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자리에 한 번 앉아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번 지배해 보고 싶고, 한 번 통제해 보고 싶은 그런 야망과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타락한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바벨탑을 쌓아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사탄이 주님을 끌고 높은데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바라보게 하면서 "이 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권력 지향의 욕망과 유혹 앞에 우리는 때로 몸부림칩니다.  "나도 권력을 갖고 싶다.  나도 힘을 갖고 싶다.  나도 좀 통제하고 싶고, 나도 좀 지배하고 싶다."

높아지려는 욕망, 다스리고 싶은 욕망….  자기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타인을 착취하고 싶은 어리석은 유혹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이 같은 고민을 하는 삶은 한 차원 높은 삶입니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천하보다 귀한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통제하고 싶은 어리석은 유혹….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더 많은 권력과 재산을 가지기 위해서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살았어도 마지막에는 다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그 계약을 내가 했어야 되는데, 그 돈을 내가 벌었어야 되는데, 그 사람을 내가 이겼어야 되는데"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다 내려놓고 그분 앞으로 가야 합니다.

억울하다, 분하다,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아닙니다.  다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 잊어버리고 용서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속도를 내는 일보다도 훨씬 귀한 일들이 있습니다.  인생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 앞에 서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 지향적인 사람은 결코 그 마지막의 영광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경쟁을 배웁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남다른 인정과 보호를 받기 위해서 끝없이 경쟁합니다.  경쟁 지향적인 인간, 나는 경쟁한다! 그런고로 존재한다.  그런데 사실은 왜 경쟁을 하느냐?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그럽니다.  왜 경쟁을 하느냐?  사람 속에서 어떤 찬사를 받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세상 것은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있다가 곧 사라질 아침의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십시오.  "내 사랑하는 딸이라. 내 기뻐하는 딸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타락한 인간 사회가 조장한 이 경쟁심리, 이 경쟁의 욕구로부터 자유 하십시오.  이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 마약 중독처럼 중독이 되어 가지고 밤낮없이 인정과 찬사의 욕구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여기에 걸려들면 가족도 친구도 없습니다.  오직 경쟁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져줄 필요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경쟁만이 존재한다면 인생은 너무 삭막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문화가 조장한 생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태계를 보십시오.  죄악에 물들지 않은 생태계를 보십시오.  여기에 어디 경쟁이 있습니까?  조화와 화합을 위한 자기 만들기가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경쟁으로 잘못 보고 있습니다.  조화와 화합을 위한 기틀 위에 자기 만들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사업을 하나 한다고 한다면 사업체의 이름을 이렇게 짓고 싶습니다.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가을의 산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산 속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새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바쁜 세상 속에서 권력 지향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아름다움을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하고 인사합시다.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그렇게 해요."

지금 우리의 시대를 창의력의 시대라고 합니다.  창의력이 살아남는 경쟁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의력은 고독과 혼돈과 자유에서 생성된 것입니다.  때로 깊은 고독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또 혼돈도 경험해야 됩니다.  혼돈 속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기 때문에 시험 속에 혼돈을 만나거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만 운행하면 비상구가 열리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새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무 혼돈도 없으면 그때서야 "나는 큰일 났구나." 망하는 줄을 아시고 정신을 차리십시오.

사실 인생에서 유일한 경쟁 상대자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남과 경쟁한다?  아닙니다.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기의 과거와 경쟁합니다.  자기의 어제와 경쟁합니다.  내 사고가 어제의 사고보다 더 성장했는가?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권력 지향적인 자신의 욕망을 태우기 위해서 경쟁하지 말고 더 풍요로운 자신의 내면의 평화를 위해서 경쟁하십시오.  

더 깊고 더 높은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경쟁하십시오.  더 아름다운 자신의 내면을 만들기 위해서 경쟁하십시오.  권력 지향적인 욕망을 불태우는 시험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 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만 그분을 섬기라!"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권력,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힘으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탄의 마지막 시험입니다.  시험마다 무엇이 붙어 있는지 아십니까?  "만일"이라고 했습니다.  조건적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더니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려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10층에 올라서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으니까 하나님이 저를 붙들어 주실까요, 안 붙들어 주실까요?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모든 불행의 결과는 하나님 탓이다.  나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  지금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지금 내가 이렇게 망한 것도, 지금 내가 이렇게 무너진 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 책임이다!"

사탄은 끝없이 그 시험을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고발해라!  하나님을 고발해라!  하나님을 고발해라!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끝없이 시험해 봐라!  시험해 보라!  그가 나를 지키는가 보리라!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자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헌신의 대상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대상자이십니다.  이 사실을 잃어버리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와 섬기는 대상이 아닌 허물과 비판과 판단의 대상으로 보려는 이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이 돕는가 안 돕는가 보리라.  하나님이 붙들어 주는가 안 붙들어 주는가 보리라.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는가 안 하는가 보리라!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한 마디로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봉사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헌신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사탄의 무리 앞에 맞서는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자신의 헌신의 도를 높이는데 신앙의 초점을 맞추십시오.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담대히 요구하십시오.

교회가 나를 사랑하는가 안 하는가?  교회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안 가지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헌신의 대상입니다.  섬김의 대상입니다.  교회를 흔들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던져 세우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건강과 자신의 재물과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삶 앞에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강력하게 자신에게 요구하십시오.  우리는 이 눈을 떠야 됩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이 눈을 떨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헌신되지 않은 채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나약한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바람이 불어와서 쉽게 흩어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헌신이 능력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극복할 힘을 생명마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생명들에게 모든 시련과 시험의 때마다 삶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여!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에도 길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씀을 붙잡고 사명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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