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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대한 믿음 (살전 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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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믿음 (살전 2:9-13)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또, 신도 여러분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이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증언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증언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우리는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경고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 위임받은 자로 살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는 10월 31일이 되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95주년을 맞습니다. 칼빈의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들은 스스로를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라고 주장하지만 루터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들은 스스로를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라고 말합니다. 사실 교회 개혁은 늘 현재진행형이어야지 어느 한 시기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파란 구리 거울을 손으로 발로 닦고 또 닦는 사람처럼(윤동주, <참회록>), 우리 전통에 내려앉은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지속적으로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교개혁의 매뉴얼은 성경입니다. 루터는 깊이 있는 성서 연구를 통해 중세 가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을 확연히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황이나 교회 전통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성경임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낡고 타락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성경은 여러 가지 책 중의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레그 그랜트는 <소설 마틴 루터>라는 책에서 루터는 은혜가 없던 시대에 은혜를 위해 싸웠다면서, 그가 온갖 회유와 협박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인상 깊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온갖 거래에 대한 제의와 타협의 달콤한 목소리들이 이제 그만 돌아서라고 유혹할 때도 성경의 돛대에 자신을 묶고 진로를 고수했다.” 참으로 결연한 신앙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자신의 데살로니가 전도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가톨릭 성경은 이것을 ‘주께서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했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대로’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그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듣기 좋게 꾸미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만한 것을 걸러내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현혹해 자기를 추종하도록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검열을 하곤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유력한 이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거칠거칠하고 날카로운 것들을 잘라내고 갈아내 매끌매끌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그 순간 삶을 변화시키고, 생명의 불꽃을 점화시키는 파워를 잃어버립니다. 진실을 말하기보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에 굴복할 때 말씀은 침묵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망치처럼 둔중하고 묵직하게 우리의 어긋난 삶을 두드리고, 때로는 얼음을 깨는 도낏날처럼 예리하게 우리의 위선과 나태함을 파고들어야 할 말씀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말처럼 지금은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거나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굶주린 시대입니다(암8:11).

• 책임적 존재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참 말씀은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복음을 전파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고전6:4-5). 물질적 보상이나 세상의 영광을 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왜 그런 길을 택했을까요? ‘복음의 빚진 자'라는 말 속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은총을 가슴 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곧 하나님의 의의 체험이 그를 새로운 존재로 빚어주었던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은총은 율법주의의 사슬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마18:21-35). 그 순간부터 그는 값없이 받은 은총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경제적인 이득이나 사회적인 명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의 삶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사도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특권조차 포기했습니다.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신앙의 본이 되기 위해 애썼습니다. “신도 여러분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이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증언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증언하십니다.”(10) 위선적으로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조심스럽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때로는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 유순하게 처신했고(살전2:7), 때로는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대했습니다(2:11). 더 나아가서 그는 자기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을 품고 살았습니다(2:8). 너나할 것 없이 사람은 다 이기적이게 마련인데, 바울의 이 말은 참 낯설게 들립니다. 다른 이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할 각오를 하는 사람, 그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하려는 확고한 지향과 결의가 없다면 아직 우리는 예수와 깊이 접속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필요를 알아차리고 그의 결핍을 채워주려는 마음이 천국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곤경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도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다면서 그 까닭을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이제 우리가 살아있는 셈이기 때문”(살전3:8)이라고 말합니다.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일을 자기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성도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경고하는 일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해 실망할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많은 죄를 탕감받은 종임을 알았기에 다른 이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로로 삼아 당신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은총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발원하여 우리에게로 흘러온 그 은총이 우리를 통해 필요한 이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끊임없는 운동입니다. 기독교인은 자기 속에 유폐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이웃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사람의 말, 하나님의 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기가 전한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행복한 설교자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설교자들의 책임도 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회중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블레이크라는 이에게 “당신의 삶을 신문이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43쪽)라고 권고합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신문에 더 큰 영향을 받는 현실을 개탄합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자기 삶을 새롭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말을 건네시는 방법은 참 다양합니다.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듣는 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 세상에 이미 가득 차 있지만 듣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항상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잘 듣지 못합니다. 삶의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어 서야 비로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신명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늘에 오르거나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신30:14)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관습적인 삶을 깨뜨립니다. 자기의 행복에 집중하던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행복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안락을 추구하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들은 주인이 맡긴 돈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그것을 땅에 묻어두는 종처럼 살지 않습니다. 때로는 실수할 수도 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마틴 루터는 벗인 멜랑히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용감하게 죄를 지으라 Pecca fortiter’. 조금 당황스러우신가요? 하지만 이 말은 제멋대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과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입니다. 이 말과 짝을 이루는 말은 ‘더욱 용감하게 신뢰하라 sed fide fortius’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뢰의 대상은 죽음과 죄와 악마를 이기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선하냐 악하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지 여부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이에게 선하게 살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자신의 가능성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진보의 비결입니다. 

무릎을 굽히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고는 그분의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교황으로 꼽히는 요한 23세는 자기 일기에 “인간은 무릎 꿇고 있을 때 가장 위대하다”고 적었습니다.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우리는 그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함과 능력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가끔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 때문에 좌절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삶의 형편이 달라지면 세계관도 바뀝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참 수줍음이 많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초심을 잃었습니다. 그가 선 자리가 그의 생각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도 인생의 절정기에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는 순간 유혹자의 올가미가 우리 목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단체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도들을 이르는 말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입니다. 항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는 교회와 전통에 대해서 항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체제에 온 몸으로 부딪혀나감으로 파란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들은 기복주의적 신앙에 깊이 물들어 있고, 목회자들은 안일에 빠져 있습니다. 성도들은 사회 변혁을 위해 나와 함께 일하자는 주님의 초대를 외면하고 있고, 교권주의에 물든 목회자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교단 총회에서 가스총을 들고 설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기 위해 편법을 동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목회자들의 성추문 사건도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이겠지요. 지금 이 땅의 교회들은 중세의 가톨릭 못지않게 혼탁합니다. 

얼마 전 주간지인 <시사인>은 한국 종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천주교라고 응답한 이들은 61.8%였고, 불교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이들은 55.1%였습니다. 그에 비해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이들은 28.1%였습니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어느 사이엔가 하나님의 복음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지 않고 왜곡되어 선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결과 교회는 우리 삶의 현실과 점점 괴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과 눈물의 땅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당부를 우리는 잊고 말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척박하다 해도 말씀의 쟁깃날로 우리 마음 밭을 갈아엎고,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복음의 씨앗을 다시 뿌려야 합니다. 성경이라는 돛대에 자신을 묶고 진로를 고수했던 마틴 루터처럼 우리도 담대한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물론 우리 삶은 고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보다 우리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길은 없습니다. 그 길 위에 서는 순간 삶의 비애는 줄어듭니다. 나의 일에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우리 삶을 봉헌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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