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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4)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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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4) (엡 5:15-21)
 
지난주 화요일에 새벽 제단에서 주일 설교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하나의 장면이 있었습니다. 물과 밀가루로 반죽을 하는 장면입니다. 물이 담긴 그릇과 밀가루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이 장면이 마음에 그려지면서 물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밀가루는 나를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물과 나을 상징하는 밀가루가 따로 따로 놓여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을 밀가루에 부었습니다. 물이 밀가루에 부어졌지만 물과 밀가루가 섞이지 않은 상태로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자아가 너무 강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과 밀가루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물과 밀가루가 엉겨 붙어 어수선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분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삶의 자리에 충돌과 갈등이 일어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고 나름 생각하지만 믿음의 영향력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물을 조금 더 넣고 밀가루를 치대면 물과 밀가루가 엉겨 붙었던 어수선한 상태에서 벗어나 물과 밀가루가 하나가 되어 한 덩어리의 윤기가 나는 반죽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반죽이 완성된 것처럼 보여 반죽을 떼어 속을 펼쳐 보면 아직도 부분적으로 작은 생밀가루가 덩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으로 음식을 만들기는 해도 생밀가루 덩어리로 인해 음식이 제대로 맛과 모양을 낼 수가 없습니다. 이 상태는 내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죽지 않은 부분이 있어 어느 순간에 불순종으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부분적인 갈등이 있는 믿음의 상태입니다.

물을 조금 더 넣고 반죽을 골고루 더 치댑니다. 겉만이 아니라 속에 있는 생밀가루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치댑니다. 그러면 온전한 반죽이 됩니다. 온전한 반죽으로는 어떤 음식이든지 모양을 만들고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이 상태는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완전히 변화된 삶입니다. 나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를 이렇게 변화시키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쓰시고 싶은 곳에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준비된 모습입니다. 내가 주 안에 주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상태입니다.

이런 장면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지금의 내 믿음은 어떤 상태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과 밀가루가 따로인 모습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밀가루 위에 물이 부어진 상태인가? 물과 밀가루가 뒤섞인 상태인가? 반죽이 제대로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려고 할 때 그 안에 생밀가루가 그대로 있는 모습일까? 완전하게 반죽된 모습일까? 저는 물과 밀가루가 뒤섞인 상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 더 후하게 점수를 주면 뒤섞인 상태와 약간의 생밀가루가 있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는 어떤 상태인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새롭게 빚으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의 반죽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온전한 믿음의 반죽이 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영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가 감사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나를 연결하는 믿음의 고리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지혜 있는 자와 같이 살라고 말씀하시면서 지혜 있는 자의 삶은 감사하는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일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일 겁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치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감사하라는 말 앞에 ‘범사’나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큰 부담을 느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범사라는 뜻을 잘 압니다. ‘범사’란 말 그대로 모든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내가 어떤 일을 당하여도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란 말은 ‘언제나 늘’이란 뜻입니다. ‘항상 감사하라’는 말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을 가르치며 설교하는 제가 가장 많은 가책이 됩니다. 사실 저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살지는 못합니다. 물론 감사하려고 노력은 합니다. 의식적으로 감사하려고 애쓰긴 합니다. 하지만 말씀이 요구하는 수준인 ‘범사에 감사’, ‘항상 감사’에는 채 미치지 못합니다. 말씀을 전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스럽고 여러분에게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제 허물을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한 결 편하기는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입을 떼지 않고 있으니까 다들 범사에, 항상 감사하며 사는 의인인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도 ‘범사에 감사’ ‘항상 감사’라는 말씀의 저울에 달리면 미달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감사하라’ 말하기는 쉽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구를 암송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라’ 는 주제로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범사에 감사하기는 어렵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살기는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의 일화입니다.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 프로그램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버나드 쇼가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 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비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듀카키스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자들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남에게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원칙에 있어서 자유로워지려고 합니다. 부모가 어려운 이유가 그렇고 목회자가 어려운 이유가 그렇습니다. 교회 중직자들이 어려운 이유가 그렇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가는 남편을 보며 부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으로 누워있는 시어머니를 보고 며느리가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는 장애아들을 보고 엄마가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한 가장이 실직에 위기에 있으면서 감사할 수 있을까요? 청년들이 취업을 수년 동안 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며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한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볼 때 ‘범사에 감사’ ‘항상 감사’는 현실성이 없는 말씀입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에 불과한 말씀입니다. 그럼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굳이 왜 하셨는지 모르겠다며 대충 넘어가도 괜찮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 또 왜 항상 감사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범사에’라는 말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항상’이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신약 245면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찬송하라 감사하라는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밀가루가 반죽되는 과정에서 물과 밀가루가 뒤섞이게 됩니다. 그 자체를 본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모습입니다. 도리어 더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럽고 힘든 과정이 지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온전한 반죽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알면 그 힘들고 어려운 과정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일들 가운데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을진대 우리는 좋은 일에서만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열 명의 문둥병자가 찾아와서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중에 한 명만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했습니다. 유대인 아홉 명은 그대로 가고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습관에 젖은 신앙인들이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사랑의 내용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진대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평의 체질에서 감사의 체질로 변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감사의 체질로 세워지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 매순간 감사의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불평의 체질에서 벗어나 감사의 체질로 변하는 삶이 지혜 있는 자의 삶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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