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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 6: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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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 6:60-71)


요즘 우리나라 정치계는 총선 때나 대선 때나 할 것 없이 딱 한 가지 화두에만 좌우되고 있는데, 바로 '복지(福祉)'입니다. 
사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역시 더 나은 복지사회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복지' 앞에 '무상(無償)'이라는 말을 붙이면서 발생합니다. 
  
'없을 무(無)'에 '갚을 상(償)'이니까 이 두 글자를 '복지'에다 더하면 문자 그대로 '되갚을 필요가 없이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 노력할 필요도 없고 나중에 갚을 의무도 없이 그냥 복을 나누어 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선거철만 되면 이제는 여당이고 야당이고 할 것 없이 '무상 급식',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등등 온갖 무상복지 시리즈 일색의 플래카드들을 큰 사거리마다 내걸어 놓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그런 선거공약들을 보면 무릎을 치면서 감탄(?)을 합니다. 
'어이구, 이제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우리나라는 잘 살게 되겠구나! 이렇게 쉽고도 간단하게 온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이전의 정치가들은 얼마나 멍청했기에 이렇게 좋은 방법을 놔두고 경제성장이니 수출증대니 뭐니 하면서 그동안 쓸데없이 국민들 고생만 시켰을까?'라고 말입니다. 
어떤가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물론 제가 '감탄'했다고 한 것은 반어법입니다. 
정말이지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공짜로 주어지는 복'이라는 것은 그 말 자체부터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조금만 눈을 돌려 살펴보아도 '전 인민에게 모든 것을 다 공짜로 제공해 준다.'고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완벽한 무상복지'를 자랑하는 북한이 지금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자본주의 국가로 출발했다가도 사회주의적 복지국가의 환상에 빠졌던 유럽이나 남미의 국가들이 지금 어떤 악순환에 빠져 있는지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곁에 있는 일본의 현 집권당만 해도 몇 년 전에 자기네 국민에게 그런 '무상복지 공약'을 했던 것을 이제 와서는 솔직하게 사과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이다.'라고 반대했던 전 서울시장이 그 때문에 시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제는 그래도 보수적이라고 하던 정당까지도 이전에 종북좌파들의 전매특허와 같았던 '무상복지 시리즈'를 똑같이 흉내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순전히 표를 얻기 위한 '선동정치'요 다수 대중의 어리석음이 주도하는 전형적인 '중우정치'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깨달을 줄 아는 '기본양식'이 있는 사람은 정치계나 일반사회에서나 워낙 소수에 불과하니 저는 정말 우리나라의 미래가 점점 더 암담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포퓰리즘'은 영적 세계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요 6:1-13) 저 유명한 사건 직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유대인들 역시 '무상급식'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직후에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 즉 '우리가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요 6:14-15).

그러니 예수님으로서는 오늘날 '대권'을 꿈꾸는 후보자라면 그 꿈이 그야말로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처럼 저절로 찾아온 격이며, 아니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는 정치인이라면 결코 거부할 수도 없는 입장에 서신 셈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정치가라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그 호기에 과연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것은 대다수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반전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왜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가 항상 '다수'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는 오직 '소수'에 불과한지 그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떡'만 기대하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는 '다수의 불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본문 60절부터 66절에 기록하기를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디베랴 언덕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군중들이 당신을 왕으로 옹위하려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자리를 피하신 후 그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무리"는 거기까지 기어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 디베랴의 대중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당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표적'(증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공짜 떡'만 더 얻어먹으려고 당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저 유명한 '생명의 떡'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설교의 결론이 본문 바로 앞의 문단에 기록된 것으로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4-58)는 실로 위대한 '영생복음'의 선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멋진 설교에 대하여 대중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본문의 첫머리인 60절에 나오는 대로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제자"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따라다니던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이며, 그래서 "여럿이"라고 번역된 단어도 '많이'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어야 너희가 영생할 수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다를 건너서까지 따라온 '무리'뿐 아니라 여태껏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따라다니던 자들에게까지 '깨달음'(enlightenment)을 주는 대신에 오히려 받아들이기에 아주 어려운 "걸림"(trouble)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떡을 먹고 배불렀던' 사건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 무리'와 '제자 중 여럿'은 예수님을 자기네 왕으로 뽑아 놓으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무상 급식'을 받으면서 백성 모두가 다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는 기대에 가득 차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천만뜻밖에도 "나는 너희에게 그런 공짜 떡을 주려고 온 사람이 아니다. 
"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면서 "그 대신에 너희로 하여금 내 살을 먹여서 영생하게 해 주려고 왔다."라고 하시니 그들로서는 정말 실망천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다수'의 우중(愚衆)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화육강세한 성자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나 '당신의 살과 피가 곧 죄인도 영생할 수 있게 해 주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은 사실 인간적으로는 '어려운 말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그 모든 말씀이 진실임을 확증해 주기에 그야말로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았던 '제자'들 역시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이후에 비로소 그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은 '영생구원'은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육" 즉 '공짜 떡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욕구에만 집착하는 것은 결국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말씀"을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해 믿는 자만이 그 놀라운 진짜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런 영생복음은 무슨 '이해'하거나 '동의'해야 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믿음'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열두 제자' 중에서까지 나중에 당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자기를 팔 자"가 나올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계셨듯이, 이런 예수님을 '믿는 자'보다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항상 더 많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결과는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부터 당장 나타났습니다. 
"이러므로" 즉 '이때부터' 혹은 '이 일 때문에' "제자 중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는 즉각적인 반응이 따라왔던 것이었습니다. 
참 어처구니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만 해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 단연 '부동의 지지율 1위'를 차지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공짜 떡을 먹여 주려고 온 정치적 군주가 아니라, 너희로 하여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게 해서 영생 구원을 받게 해 주려고 온 메시아다."라고 설교 한번 하시니까 그처럼 들끓고 있던 열기가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마치 요즘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던 연예인이 무슨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면 트위터의 팔로워들이나 홈피의 일촌 팬들이 순식간에 급감하듯이, 당대 인기 최절정의 랍비였던 예수님이 그 많던 '열성적인 팬 무리'와 '측근의 팔로워'들을 겨우 열두 명만 남기고 하루아침에 몽땅 다 잃어 버리셨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복음은 결코 '싸구려 공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수의 표심'에 영합하기 위하여 눈이 벌게진 정치가들처럼 어떤 '포퓰리즘의 선동'으로써 인기를 얻기에 급급한 메시아가 절대로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께로부터 무슨 '공짜 떡'이나 얻으려고 교회에 한번 나와 보는 사람은 반드시 '물러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우리 교회의 어느 청년이 페이스북에 "오늘 X 밟았다."라는 제목의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내막을 살펴보니, 그 청년이 인터넷의 무슨 채팅방에서 '교회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는데, 무려 열 명의 반대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교회는 사회정의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는 반론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청년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토론의 공방을 펼쳤겠지만 워낙 중과부적이었는지라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면서 그런 글을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청년의 글을 읽으면서 똑같이 '통분'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지만, 아마 그 청년이 그 토론을 계속했더라면 1대 10 정도가 아니라 1대 100까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오늘날 역시 '죄인 구원'과 '천당 영생'의 복음이란 '현대의 지성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입니다. 
비단 '불신자 무리'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대중'은 현대교회가 그따위 '구시대의 케케묵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불신자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정의'의 복음, 북한의 독재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빈민구제'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고' '수긍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다 해도 사실상 '불신앙인'이나 진배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떡'만 기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먹고 죽을 떡'만 나누어 주는 것이 전도라고 생각하는 '영적 포퓰리즘'에 빠져 있는 자는 불신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불신앙의 다수'에 불과함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에게서 '영생의 복음'을 발견하는 사람만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소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67절 이하 71절에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정말 멋진 설교,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설교를 하신 후에 대다수의 추종자를 한순간에 잃게 된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실망스러운 때에 주님께서 당신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곁에 남아 있는 "열두 제자"에게 하신다는 말씀이 "너희도 가려느냐"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유머감각도 참 대단하시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 열두 제자들만큼은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나를 좋다고 하면서 따라다니던 저 큰 무리와 대다수의 제자들이 이제는 다 나를 떠나 버렸는데, 그래, 너희들도 갈래?"라고 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반어법적인 유머'가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하신 그 말씀에 대하여 베드로가 역시 수제자답게 멋진 대답을 해 드렸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에게 영생을 주는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놀라운 영생구원의 복음을 선포해 주시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독생자'이심을 믿는다는 실로 '멋지고도 완벽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도대체 베드로는 어떻게 해서 그 '절대다수'가 '어렵다'고만 생각했던 사실을 '깨닫고 믿고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앞서 65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신앙고백은 결코 베드로 자신의 '양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나온 것이 절대로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소명'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결과일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자'에게서만 나타나게 되는 실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절대다수의 불신자들에게는 단연코 '믿기 어려운' 사실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해 주신 자에게는 아주 간단하게 '믿고 알 수 있는'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앙이 좋은 신자'라 할지라도 그 신앙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특별한 '지각'이나 '양심' 때문에 생긴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때문에 절로 따라오게 된 '선물'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택하심을 입은 신자'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많던 '무리'와 '제자'들 중에 겨우 남은 "열둘"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마저 "마귀"였으니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무리'와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기까지 했던 '제자 중'에서도 겨우 열한 명만 '영생의 복음'을 깨닫고 '성자 예수님'을 믿었으니 그 이후 2천 년이나 지난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어떻겠습니까?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어떤 코미디언이 비행기 탑승 후 이륙 직전에 승무원들이 일러 주는 '비상착륙시의 요령'을 두고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요령 가운데 '비행기가 불시착을 하게 되면 뒤로 젖혀 놓았던 좌석 등받이를 정위치로 돌려놓으세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코미디언은 "아니 지금 1만 미터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판인데 좌석을 10도 뒤로 젖혀 놓으면 '사망'이고 10도 앞으로 바로 세워 놓으면 '생존'이 된다고요?"라고 하면서 청중들을 웃겼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코미디언은 그 '10도 차이'라는 것이 실제로 '사망'과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불시착했을 때 승객들은 촌각을 다투면서 탈출해야 하는데, 만약 모든 좌석이 다 10도 뒤로 젖혀져 있으면 승객들이 좌석 사이의 좁은 틈을 빠져나가느라고 최소한 몇 초씩은 더 지체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백 명의 승객들이 한 사람 당 '몇 초'씩 늦어지게 되면 그 합계는 몇 십분 이상 될 것이며 그 사이에 화재나 침수가 발생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많이 죽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불시착 시에 좌석의 등받이를 정위치로 돌려놓으라'는 승무원의 말은 그야말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대한 지시입니다. 
즉 그 승무원의 지시사항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넘겨 버리면 곧 '죽음'으로 직결되는 것이며, 그것을 '생명을 지키기 위한 유의사항'으로 잘 듣고 명심하는 사람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도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일 설교를 들어도 '건성'으로 듣는 교인, 교회에 출석은 하고 있었지만 성경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길'은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는 사람은 결정적인 '백보좌 심판대' 앞에 가서는 똑같이 '사망의 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라고 고백하면서 그 구원의 '구명대'를 확실하게 착용하고 그 '구원주'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의 말씀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듣고 믿고 지키는' 자만이 온 세상을 '불로 멸하시는'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그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새 예루살렘'으로 영광스럽게 입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리' 중에서 구별된 '제자', 그 '제자 중'에서도 '물러가고 다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한' 대다수와는 달리 끝까지 '주님 곁에 남은 소수의 제자'처럼 예수님 안에서 '먹고도 죽을 떡'이 아니라 '영생의 복음'을 꼭 발견하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름을 말씀 드리면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미국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최근에 어떤 책을 한 권 내셨는데 당장 수백만 달러의 판매액을 올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에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는 단어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토크쇼의 예리한 앵커가 그 점에 대하여 질문을 하자, 그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to motivate people' 즉 '사람들을 자극시켜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동기부여'라고요?
목사라는 사람이 설교하고 전도하고 책을 써야 할 주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도록 동기를 유발시켜 주는 것'이라고요?
그런 것은 굳이 목사가 아니라 세상의 심리학자나 카운슬러들이 훨씬 더 잘하는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은 그처럼 신자나 불신자에게나 공히 '유익한 조언'을 남겨 주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 수밖에 없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이나 사제도 다 동의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신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만이 깨닫고 믿고 고백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진리'를 선포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사업을 같이 한답시고 '수녀'와 사이좋게 나란히 사진을 찍고 있는 '목사'를 당신의 '제자'라고 인정해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먹고도 죽을 수밖에 없는 떡'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번 먹으면 절대로 죽지 않고 영생하는 생명의 떡'을 죄인들에게 나누어 먹여 주시려고 이 세상에까지 화육강세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생의 말씀'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둘로 쫙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확실히 나누며, '제자'와 '배반자'를 명백하게 구분시키며, '천당 구원을 받는 자'와 '지옥 영벌에 떨어질 자'를 그야말로 '칼 같이' 나누는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바라고 기다리는 '포퓰리즘의 복음'으로써 다수의 인기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로 오게 하신 소수의 택자'들만을 '영생의 복음'을 통하여 불러 모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은 이 인간사회를 유토피아로 바꾸어 주고 빈부의 격차를 없애 주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원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죄인을 천당으로 인도해 주는 진짜 '기쁜 소식'입니다. 
  
'십자가 구원'과 '천당'만을 설교하는 목사를 두고 "지금 당장 배고파서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런 말이 무슨 필요가 있나?", "요즘 같은 현대인들에게 저런 어려운 설교를 하면 누가 공감할 수 있느냐?"라고 '수군거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귀'의 소리일 뿐인 것입니다. 
실로 '다수의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삯군들이 온갖 '싸구려 복음'들을 점점 더 양산해 내고 있는 이 말세에 오직 우리 예수님의 이 '진짜 은혜, 참된 복지, 영원한 축복'의 복음만을 믿고 영접하면서 이 '영생의 말씀'에서 단 한 치도,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아니하는 '적은 무리'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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