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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젊은 사제 루터의 절규 (욥 42:1-6,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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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제 루터의 절규 (욥 42:1-6, 히 11:1-3)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던 시기에 모든 신앙인들은 이 말씀으로 그 시대의 난국을 이기고 승리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렸고 믿음으로 모세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며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옮겨졌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기독교의 최고의 가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곧 주님이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이 믿음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중심은 말씀이고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시대가 흐르면서 흐려지기 시작하고 증발되고 얕아지고 가벼워졌습니다. 날마다 내 삶을 개혁해 나가지 않으면 이 믿음은 사라지게 되고 결국 오래되면 껍데기만 나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여 이 땅에 기독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사후 30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고난과 핍박과 로마의 압제로 동굴 속에서 300년간을 지냈습니다. 그 시대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빛났고 강력했고 힘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 힘으로 기원 325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로마교회는 정신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까지 행사하게 되어 마침내 교회는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습니다. 

종교가 권한이 생기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사후 잘 나가던 기독교는 마침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중세 기독교가 얼마나 타락하였는가 하면 성직을 매매하고 마침내 면죄부까지 팔기에 이르렀습니다. 가톨릭에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러면 신부가 듣고 그냥 용서를 선언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 죄의 경미에 따라 용서의 의미로 찬송을 부르게 하기도 하고 시편을 낭송하게도 하고 단식하게도 하고 로마 순례를 하라고도 하고 노동을 시키기도 합니다. 

기독교 타락 

그러다가 교황 레오 10세 때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게 되는데 건축비용이 부족하자 비용 마련을 위해 고해성사 때 면죄부를 사라고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면죄부를 공식적으로 팔기도 했습니다. 면죄부 판매 담당 수도승이었던 테첼이라는 신부는 “면죄부를 산 돈이 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 본인은 물론이고 그 부모와 친지의 영혼까지 연옥의 불바다에서 튀어나와 천국에 이른다”고 선전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갓 신부된 마틴 루터가 “이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기득권 종교를 향하여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광부로 엄격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합니다. 어느 날 루터는 친구와 산길을 거닐던 도중 천둥번개가 치며 내리치던 벼락에 의해 함께 길을 거닐던 친구가 그 자리에서 죽는 모습을 보면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루터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루터는 그때부터 깊은 고민을 시작합니다.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루터는 그때부터 죄와 죽음의 문제로 고민을 합니다. 

삶에 어떤 계기 주어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고민을 한다는 것도 중요한 은혜입니다. 루터는 고민하던 중 그 고민이 해결되지 않자 학업을 중단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1507년에 신부가 됩니다. 루터의 충격은 마침내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루터로 하여금 신학을 공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루터는 그 후에도 여전히 내안에 있는 죄 문제 때문에 몸부림을 치며 고민합니다. 그는 로마로 갑니다. 로마에서 선행과 공로를 쌓으면 죄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 선행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답답해 옴을 느끼고 포기합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스칼라 산타(scala santa)라는 거룩한 계단을 맨 무릎으로 올라가면 가장 큰 공로를 쌓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무릎에서 피가 나도록 기어 올라갑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풀리지 않고 고민은 더 깊어져 갔습니다. 루터는 어느 날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루터는 그 순간 영적으로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때 굳게 결심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나의 길을 가겠다, 세상의 길이 아닌 예수의 길을 가겠노라”고 각오합니다.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그 계명을 따라 사랑의 길로 가기로 작정합니다. 그때 루터가 그토록 고민하던 내안의 죄 문제가 풀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루터는 비로소 길을 찾은 것입니다. 길은 예수께 가야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곧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루터는 너무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예수를 찾으면서 길을 찾게 됩니다. 길을 찾으니까 모든 일이 술술 풀리게 되었습니다. 

끝없는 질문

루터는 그때부터 또 다른 고민을 시작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질문에 부딪혔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은총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루터로 하여금 고민과 갈등의 기도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는 마침내 2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게 접근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무서운 율법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하시며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점입니다. 그때 루터가 동시에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하여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마침내 1517년10월31일 면죄부와 연옥사상과 교회의 교황주의를 비판하는 내용 95개를 써서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이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자보를 붙인 것입니다. 이 날이 그 유명한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자 교황청은 루터의 사제직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어디라고 까부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개신교는 10월 31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게 되었는데 금년 10월 마지막 주일이 495주년의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종교개혁의 목표는 “원시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옛날 그 순수했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더 정확하게 정리하자면 “교회를 교회답게 하자”는 뜻에서 “오직 은혜”를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하고 말씀을 회복하자”는 뜻에서 “오직 믿음”을 회복하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오직 성경”을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이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한 결과 오늘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랬다고 해서 루터는 종교재판에 회부됩니다. 1517년12월 마인츠 지역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루터를 고발합니다. 그리고 1520년6월24일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경고장을 받습니다. 당시 파문은 법 밖으로 내 몰리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 경고 파문장을 불태워 버립니다. 그래서 1521년1월3일 결국 루터는 파문을 당합니다. 이제부터 루터의 생명은 언제 누구의 칼에 맞아 죽을지 모릅니다. 1521년 3월6일 신성로마제국 칼 5세 황제가 보름스 국회에서 나와 변호하라고 기회를 줍니다. 그고 신변 보장을 약속하는 초청장을 보내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가는 동안 죽을 수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지만 루터는 만류를 뿌리치고 국회로 가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보름스 국회의사당 안에 마귀가 지붕의 기왓장만큼이나 많아도 나는 가서 증언하겠다” 죽기를 각오하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마디마다 사람을 쓰십니다. 그 때는 삼엄한 때였고 역사가 뒤틀리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불러 쓰시겠습니까. 루터같은 사람을 쓰실 것입니다. 모두 겁나 숨는 사람은 쓰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그런 일을 해 낸 것입니다. 

당시 교황은 절대 권력을 행사할 때입니다. 누구도 그의 뜻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때 루터는 당당히 맞섰습니다. 1521년4월17일 사람들은 재판정에 나오는 이 겁 없는 젊은 신부를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려 왔습니다. 루터가 행한 일은 화형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때 루터가 고백합니다. “기독교인은 면죄부와 같은 것에 의해서가 아니고 많은 고난을 통해 천국에 간다.” 교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오늘 이 종교재판정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날이 1521년 4월 17일입니다. 루터가 가는 길을 모두 염려하였습니다. “교황은 얀 후스에게 한 것처럼 당신도 화형시킬 것이다”, 100년 전에 얀 후스가 종교개혁을 외치다가 화형에 처해져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들이 내가 가는 길에 불을 질러 그 불꽃이 하늘에 닿을 지라도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나는 간다, 나는 맹수의 입안으로 들어가 그 이를 부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다, 마귀가 보름스국회 의사당 지붕의 기왓장만큼 많아도 나는 간다.”

루터가 재판정에 도착했을 때 모두 놀랐습니다. 루터가 그 죽음의 장소로 나올 줄은 아무도 예상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루터가 황제 칼 대제 앞에 섰습니다. 그 곁에 고관대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트리에르 대주교의 고문관이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하나는 루터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은 모두 자신이 쓴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고 또 한 가지는 책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취소할 용의는 없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 책의 내용은 믿음과 영혼구원과 말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취소하면 살아날 수는 있습니다. 곧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토록 강조하던 믿음이나 영혼구원이나 말씀은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 순간 한마디의 대답은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잠시 고민하다가 하루 시간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루 더 고민해도 답은 뻔합니다. 루터는 다음날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루터의 입만 바라봅니다. 루터 진중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성경의 증거와 내 이성에 비추어 잘못됨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믿음과 영혼구원과 말씀에 대해서 쓴 책 내용을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답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증언장으로 나옵니다.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루터는 그 후 이 주장들을 모두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고 후에 술회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의 아내 파계한 수녀출신의 아내가 용기를 주었다고 고박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혼자 싸우느라 피곤에 지치고 고뇌하며 외로움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1529년 어느 날 시편 46편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순간 가슴이 확 찔려 옴을 느꼈습니다. 그때 루터는 이 말씀에 큰 위로와 확신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시를 씁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 시가 나중에 찬송에 수록되게 되고 이 찬송이 유럽에서 최초로 대중이 함께 부르는 찬송이 되었고 오늘 찬송가 585장에 수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로마 가톨릭은 두 갈래로 갈라져 원래 가톨릭은 로마교회로 루터에 의해서 개혁노선을 걷는 교회는 루터교회에서 나중에는 개신교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기독교혁의 본질 

오늘 개신교는 이렇게 해서 태어났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것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씀 회복운동입니다. 그 당시는 성경은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고 일반인들에게는 허용되지 못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성경을 번역하였다고 해서 화형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은 성경이 무엇인지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갈 때입니다. 중세까지 천 5백 년 동안 말씀 중심종교가 중세기를 거치면서 의식 종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말씀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의식이나 형식에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제일 먼저 외친 것이 말씀회복 운동입니다.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성경을 일반인에게 나누어 읽고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강단에서 설교하게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성경을 설교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내용 중 가장 위대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말씀회복 운동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믿음회복 운동입니다. 본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실체를 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눈으로는 보이지는 않지만 믿음은 그 바라는 것들의 증거를 받는 세계입니다.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것은 유물론 신앙입니다. 영적 신앙의 세계는 믿음으로 보고 믿고 증거 받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적은 형식주의 입니다. 형식주의는 믿음의 영성을 죽입니다. 영감을 질식시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데 그 이유는 형식주의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도덕이나 수고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sola fide)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롬 1:17)고 강조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이신득의(justification by faith)라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는 은혜회복운동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집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디에서 주어집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도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루터는 이것을 “이신칭의”라고 했습니다. 개혁자들은 예수만이 구속주이고 중보자이시고 주님으로 높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게 이 믿음이 살아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질색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 때문입니다. 

형식주의는 내용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상태를 말합니다. 땅은 오래 놔두면 굳어버립니다. 딱딱해집니다. 그곳에 씨를 심어도 새들이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밭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신앙개혁은 오래되어 굳어버린 신앙을 갈아엎는 일입니다. 굳은살을 도려내는 일입니다. 배가 불러지면 말씀을 멀리하게 됩니다. 기도를 잊게 만듭니다. 기도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이 무감각이 가장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생생하게 회복시켜야 합니다. 생명력이 충만한 신앙으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계시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영감의 충만함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때 성령은 내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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