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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때를 위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에 4: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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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를 위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에 4:4-14)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손을 들지는 말고, 속으로 깊이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살아오면서 정말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이 한 생명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하나님, 내 가정을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그 일을 이루시옵소서."  "내 인생이 정말 하나님께 멋지게 쓰임을 받고 싶습니다."  정말 이런 간절한 기도를 해 본적이 있습니까?  오늘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이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되어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과 타락으로 지쳐버린 이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보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갈수록 인생은 실망과 좌절 밖에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오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불행이나 행복이라는 것도 사실은 관점의 차이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그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집은 방도 한 칸 없는 사람입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사람은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눈을 떠보면 그 사람은 좋은 차를 타고 있습니다.  큰집에 사는 사람입니다.  옷도 좋은 옷을 입었고, 자녀들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있으면 대궐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막상 눈을 떠보면 그 사람은 자기 집도 없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난전 시장에서 사 입은 별 볼일 없는 옷입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관점의 차이입니다.  입만 열면 불행의 관점입니다.  대안을 보지 못하고 불행한 관점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아내를 향하여, 남편을 향하여, 형제를 향하여 불행의 관점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없습니다.  언제나 문제를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불행한 관점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믿음이란 내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내 성격을 믿는 것도 아니고, 내 인격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나를 창조하신 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원망과 불평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거나 좌절이 자신의 삶에 어떤 새로운 일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 마음의 강퍅함과 좌절은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입술에서 모든 원망과 불평과 좌절의 그림자를 다 지워버리십시오.  그리고 이 시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안에 서십시오.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 안에는 길이 있습니다.  아직도 주님 안에는 뜻이 있습니다.  아직도 주님 안에는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뀌어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환경 때문에, 여건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진리는 환경도, 여건도 다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환경과 여건이 좋아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환경으로 말하자면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를 묻어 줄 땅 한 평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그럴만한 여건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가 있다.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의 입술을 통해 이간질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사탄의 방식은 언제나 일어난 사건보다 더 크게 문제화시킵니다.  그래서 더 원망하고 불평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좌절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오늘 이 말씀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능히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올 때의 발걸음과 갈 때의 발걸음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올 때의 표정과 갈 때의 표정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올 때의 마음가짐과 갈 때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말은 그저 말로만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가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 믿음의 사람다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 말투와 그 행동과 그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겉모습이 아니라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같은 적은 믿음이라도 여러분 안에 들어가서 올 때의 세상을 보는 방식과 갈 때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아내를 보던 방식과 남편을 보던 방식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자식을 보던 방식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보던 방식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이 달라지면 세상에서 느끼는 행복의 방정식도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다가 믿음이 들어가고 은혜가 들어가도 환경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금방 달라질 것입니다.

꿈과 비전이 그 인생을 이끌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비전을 그 마음에 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비전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실패하도록 내버려둔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하든 못하든 여러분의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여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은 결코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이 여러분들이 인정하든 않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가던 속에 여러분들은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비전을 위임받은 종들이 실패하도록 놔둔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의구심이 있다면 성경을 펴서 읽어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생애 속에 어떻게 간섭하셨는가 하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그 사람 속에 때마다 일마다 어떻게 묘한 방법으로 개입하시고 역사하셨는가 하는 생명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거룩한 비전이 있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저와 여러분들을 이곳 이 제단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망하거나 불평하면서 좌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정말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비전을 붙잡고, 그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기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하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캄캄한 흑암이 우리를 둘러싸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밝은 태양이 우리를 비추기도 합니다.  이것을 보편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보편적인 은혜는 온 우주에 편만하게 골고루 베풀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한 사람을 향한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 한 영혼을 향한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사람들 속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다시 붙드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라."  세상을 붙들지 말고 믿음을 붙드십시오.  믿음이 있으면 호랑이도 종이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종이쪽도 호랑이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나를 신뢰하고 있고,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마다 때마다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돈을 많이 번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실력을 가지거나 재능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물론 이런 사람들이 쓰임을 받으면 좀더 효과적으로 일을 감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정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 땅에 실현하는 데 생명을 걸고 미쳐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자신의 남은 삶의 한 토막을 하나님께 바치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부러운 사람이겠습니까?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부러운 사람이겠습니까?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까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부러운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쓰임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내가 쓰임을 받고 있다고 느껴질 때 자존감과 함께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기꾼에게 쓰임을 받는다면 사기를 당하거나 사기꾼 밖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폭 두목에게 쓰임을 받는다면 조폭의 졸개 밖에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다 끝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멋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한 생애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쓰임 받는 일에 생명을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자녀와 가정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기 위해 기도하시고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광활한 우주 가운데 한 점의 티도 되지 않는 나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쓰시기를 원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기쁨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시대마다 국가마다 국민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있습니다.  세계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닫는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위대한 제국이란 어쩌다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나라가 아닙니다.  100년이든 30년이든 한 시대의 인류를 책임지고 나아가는 선진국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다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국이 되어보지 못한 나라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무수한 잠재된 비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비밀은 국가를 이루려고 하는 거룩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시대마다 생명마다 국가마다 국민마다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꿈과 비전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꿈과 비전을 붙잡으십시오.  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붙잡으십시오.  내가 섬기는 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붙잡으십시오.  그 꿈과 비전을 붙잡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는 역사에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주는 비전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비전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왕궁을 박차고 나와야 했습니다.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편안하고 안전한 신분을 버려야 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그는 끝없는 불평과 원망의 백성들로 인하여 사막 한 가운데서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여기가 좋사오니, 이 짐을 내게서 벗겨주옵소서.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시옵소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비전을 받았을 때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일평생 모아 놓았던 모든 삶의 근거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가는 그 길에는 언제나 평탄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더 험하고 더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이제는 좀 쉬고 싶어요.  차라리 여기서 내가 그만 좀 할 수 있게 내버려주세요."

사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길은 고독합니다.  어떤 때는 너무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 때가 있습니다.  미국의 라이트웨이 리서치에서 개신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조사 결과 절반이 훨씬 넘는 아주 많은 목회자들이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사역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니 목회자들이 무슨 상처를 받을 일이 있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목회자들도 교회와 교인들로부터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목회자들 가운데 불면증에 걸리거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간암이나 위암에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간에 지방이 쌓이고, 간경화가 오고, 간암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상처를 받으면 소화가 되지 않고 그래서 위경련과 위궤양에 걸리고, 그것이 위암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비전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위로를 경험하며 묵묵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과 어려움과 고독함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면 들을 것 같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정말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을 사람이 몇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인기 투표를 한다고 하면 예수님께 던질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명을 걸고 따를 것 같습니까?  아마 인기투표를 하면 예수님은 저보다 표가 안 나올 것입니다.

솔직히 세상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한없이 어리석고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왜 나보고 그것을 하라고 하느냐?"  이것은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사실들이 아닌가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에 우리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돈을 주고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재벌들이 다 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힘든 일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조금 더 쉬운 방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워서 그 짐을 벗어버리겠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4장 1절에서 우리는 견딜 수 없는 번민과 고뇌 가운데서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쓴 채로 성안에서 울부짖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이며 그가 있는 곳은 바사 나라의 성안입니다.  유대 사람인 모르드개가 어떻게 자기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 성안에서 그렇게 비통하게 울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이 사건의 전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다윗 왕 때 통일을 이룩했다가 솔로몬의 범죄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나중에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멸망하고 바사라는 나라가 일어나서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  특별히 바사 고레스왕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귀환을 하고 일부는 바사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친딸처럼 양육하는 삼촌의 딸 에스더라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어떤 특별한 동기로 당시 바사를 통치하던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 모르드개는 왕궁의 한 행정관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 때 아하수에로 왕을 대신해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하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미움을 사게 됩니다.  하만에게 있어서 모르드개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나중에 하만이 모르드개가 유대인임을 알게되자, 모르드개는 물론 바사에 남아 있는 모든 유대인을 학살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모르드개는 견딜 수 없는 번민과 고뇌 가운데서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 쓴 채로 성안으로 들어가서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모르드개의 그러한 장면에서 에스더의 결단을 요청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르드개가 당한 일이 왕후 에스더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에스더는 궁전 내시를 시켜 왜 모르드개가 그렇게 괴로워하는지를 알아오게 했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이 유대인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리고 에스더가 직접 어전에 나아가서 왕에게 자비를 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 민족을 살려 달라고 탄원하도록 내시에게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에스더는 임금이 부르지 않는데 안뜰로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는 자는 남자든지 여자든지 모두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되어 있는 법 때문에 현재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 모르드개에게 전합니다.  에스더는 바로 자기 앞에 있었던 왕후가 그래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아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지금의 현실 앞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에스더를 향해 분노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것이 본문 14절의 말씀입니다.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 전체에서 가장 중심 되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여기에서 '이 때'는 그로 하여금 왕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비전의 때를 말합니다.  물론 에스더는 이 때를 외면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앞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후에 유대민족이 모두 말살되더라도 자기는 거기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일어난 것은 모르드개라는 한 사람의 행동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구실이나 변명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았지만 이 때를 위해서 네가 해야 할 몫의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에게는 책임이 물어지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이 개인의 편안함과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고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너희 시대에 얼마만큼 부요하고 편안하게 잘 살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실 것입니다.  "너는 너희 시대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이 시대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 앞에서 얼마나 책임 있는 삶을 살았느냐?"

에스더는 자신이 왕후가 된 것이 '이 때'라는 민족적 위기의 때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결단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 때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는 결코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의 결단 앞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주실 뿐만 아니라 원수의 대적을 물리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우리 됨은 언제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 때를 위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드려 헌신할 이 때를 외면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때를 외면한 우리들에게는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이런 하소연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시다가 그 축복의 손길을 거두시는지 모르겠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다가 그 인도의 손길이 나를 떠나는 줄 모르겠다."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공급하시다가 떠나는 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합니다.  그 때는 하나님을 미치도록 신뢰했습니다.  시간 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은혜만 있으면 하나님 앞에 매달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첫 사랑도 첫 은혜도 다 떠났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 때를 위한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의 나에 대한 신뢰가 맞아 떨어져서 이 고약한 세상 가운데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신화를 계속 만드십시오.  줄기차게 만들어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이 때를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정을 주시고, 재물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이루기 위한 이 때를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비전을 받은 사람들은 천재적인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사람에게는 무슨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때를 위한 결단과 헌신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개인적인 야망을 포기하게 합니다.  이생의 자랑을 포기하게 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포기하게 합니다.  안목의 정욕도 다 포기하게 합니다.  이것이 살아나면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떠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에서 나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일에 우리들의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것이 나와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고, 나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나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만이 착하게 살면 된다는 일반적인 원칙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다른 헌신된 사람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이고, 나는 버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때를 위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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