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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분을 높이는 마음 (시 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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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을 높이는 마음 (시 110:1-7)                                  

오늘은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꽃』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꽃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꽃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꽃을 귀찮게 여깁니다. 꽃은 알아보고 좋아해주는 사람에게만 빛을 발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홍길동이 아무리 뛰어나고 인격이 출중해도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홍길동을 사모하는 사람이 그를 부를 때 홍길동은 그에게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불러주기 전까지 그는 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을 주님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다가오셔서 꽃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첨예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는 문제에서 생겨났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입장은 예수님을 백성을 현혹하는 형편없는 선생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인 백성의 장로들,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볼품없는 시골뜨기 정도로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러한 비방은 복음이 로마로 들어간 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당시 유력한 인물 중 하나인 셀서스(Celsus)란 사람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참 말씀, 알레데이아 로고스>란 책에서 예수님을 로마병사 판텔라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는 이집트에서 마술을 배워왔다>거나, <무능해서 십자가형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무시한 일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의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열광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견제하여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망신을 주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묻기도 하고,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시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비와 올무도 예수님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당하기만 하신 게 아닙니다. 나중에는 유대 지도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질문으로 오히려 반격을 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반격을 가하시는 질문이 나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의 대답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보내 주실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왕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도 있는데,  이사야서 11장 1절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줄기>란 말을 바꾸면 <다윗의 자손>이란 뜻이고,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올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한 대답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자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한 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은 그들이 꼼짝 못할 결정적 질문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3-45절을 보면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하실 때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6절을 보면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토록 구약 성경에 대해 통달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시편 110편 1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110편 1절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자, 이제 바리새인도 이해할 수 없었던 이 말씀을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시편 110편 1절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실까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아멘. 이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란 대목입니다. 아까 읽은 마태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주께서 내 주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주이시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란 구절을 <주께서 내 주께>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나오는 <주>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고 할 때, 여호와께서 <주>이신데, 그 분이 또 다른 <주>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주는 누구입니까? 그 분은 다름 아닌 장차 오실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령에 충만하여 이 시를 지은 다윗왕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헷갈렸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했는데, 다윗은 이 시에서 그를 <내 주>라고 부르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엎드려 <주>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어떻게 천 년 후에 올 자기 자손에게 <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시면서 <너희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조상인 다윗이 자손인 그리스도에게 주라고 부를 수 있느냐? 이래도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 대답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다윗의 자손인데, 어떻게 조상인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시편 110편 1절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아주 쉬운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이심은 모두 알고 믿고 계시지요? 그렇다면 <두 번째 주>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두 번째 주는 오실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분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이렇게 부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사야서 11장 1절에서는 <이새의 줄기>, 즉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을까요? 여러분,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다윗의 자손이라는 형식>을 빌려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은 남들이 볼 때는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아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니까 예수님도 다윗의 자손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형식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때 처녀로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성령으로 임신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요셉은 화가 나고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랑하는 여인이 임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장 20-21절에 나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방금 읽은 말씀이 요셉에게 주신 말씀이라면 누가복음 1장 30-35절은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아멘.  

여러분, 분명하지요?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즉 겉으로는 요셉의 아들, 즉 다윗의 후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줄기에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형식만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아무리 위대한 왕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주>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은 <성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얼마나 위대한 분일까요? 그 분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1절을 다시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또 메시아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규>란 왕의 지휘봉을 말합니다. 또 그 분은 세상에 오셔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십자가라는 제단 위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삼아 우리 죄를 씻기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장차 예수님은 온 세상을 왕으로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5-6절을 보세요.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해 오셨습니까?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해도 좋을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일 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 받으실 왕이십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정없이 비방하는 와중에서도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형편없는 선생으로 경멸하는 와중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신앙을 가졌기에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주 그리스도>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인일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로 믿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한없이 높이고 찬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잘 생각해주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대 성인 정도로 생각합니다. <훌륭한 분이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좀 뛰어난 사람 정도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분, 장차 만왕의 왕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분입니다. 그 분은 둘도 없는 위대한 분이십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우리가 최고로 감사해야 할 조건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셨어야 할 그 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그 영광을 다 버리고, 이 세상의 냄새나는 마구간에 탄생하신 것, 그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어주신 것, 그리고 다시 살아나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것, 우리로 하여금 이 엄청난 축복을 누리고 구원을 받게 하신 것,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감사 조건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 분을 주님으로 높여 부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당신을 이렇게 믿고 고백하고 높이는 이들에게 다가와 생명의 향기를 주시는 꽃이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화병에 예수님이 꽃으로 계시길 기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 분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 분은 지극히 존귀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다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세 
예수는 주,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드리리> 
  
이것이 우리 평생의 찬양이 되길 원합니다. 주 예수님을 영원히 믿고 높이고 찬송하면서 따르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가득한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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