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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엡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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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엡 1:23) 

 
오늘은 우리 교회의 창립 16주년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이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주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를 말합니다. 

처음에 몇 명의 성도들로 시작한 목양제일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열여섯 해를 지나오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이 성장해 왔습니다. 이 말은 다른 교회들과 비교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인수가 많고 예배당이 크고 아름답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그 많은 교인과 웅장한 예배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영광을 차지한다면, 살았다는 이름은 있어도 실상은 죽은 교회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교회로서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첫 번째로, 우리 교회는 주님과 연합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의 생명체에 비유합니다. 바울 서신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에, 교회를 그의 몸에, 성도들을 몸의 지체들에 비유하였습니다. 머리와 몸과 지체들의 관계는 분리할 수 없는 생명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며 교회의 중심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며, 지체들인 성도들은 몸의 각 마디를 통해서 내려오는 머리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몸의 지체들도 서로 충돌하거나 다투는 일이 없듯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다툼이 없이 하나로 화합해야 합니다.

16년을 회고해 볼 때,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이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개척 당시부터 지금까지 온 성도님들이 믿음 안에서 연합해 온 사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툼과 반목이 없이 화목한 가운데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지 않고 담임 목사를 비롯해서 온 성도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받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도 신자들도 다 연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때로 오해도 하고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중심으로한 연합을 우선시하고 개인의 주장을 고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주님과 연합한 것은 곧 교회와 연합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몸에 속한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속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머리와 연합한 지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권리를 내세우기 전에 먼저 교회를 생각하고, 믿음의 형제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명하기를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고 했습니다. 나의 정당한 권리라고 할지라도 교회에 유익하지 않다면 양보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해서 다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 전체에 덕을 세우기 위해 나 개인의 권리를 보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정당한 권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포기하셨는지 말씀해 줍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저와 성도님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뒤로 하시고 낮고 천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은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주님을 생각하고, 우리 각자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교회 안에서 무슨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파당을 짓고 다투는 교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의 교회였던 것이 깨어져서 두 교회, 세 교회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신자들이 편을 갈라 법정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모양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성경은 성도들에게 교회 안의 일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판단할 성도가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의 일을 판단하는 것을 세상 법정에 맡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주님과의 연합을 온전히 이루려면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득세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나 자신의 유익보다 먼저 교회의 유익을 구하고, 믿음의 형제들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이루어온 주님과의 연합을 더욱 온전히 해 나가고 믿음의 형제들 간에 하나 됨을 견고하게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연륜이 더해 갈수록 더 한층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을 우리는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부르는데,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친교와 자선과 구제, 장학사업 등, 선한 일을 많이 할지라도 복음 전파에 무관심하다면 교회의 사명을 망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맺어야 할 열매가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전도의 열매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4)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보내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전도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러면 교회가 전도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교회의 지체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탐스런 열매를 주렁주렁 맺듯이, 우리는 저마다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 보면, 입으로 예수님을 전해야만 전도냐, 진실한 삶을 통해서 무언의 전도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느냐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불신 이웃들에게 선한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말과 행위에 흠이 없는 성숙한 인격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만 전도를 한다면, 과연 그럴 신자가 몇 명이나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전도를 기피하는 변명에 불과합니다. 성도들은 비록 완전한 인격자가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얼마든지 새롭게 변화된 삶의 모습을 불신 이웃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을 보면서 비록 메달을 따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박수를 보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진실하게 살려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초대교회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도는 먼저 믿은 성도들의 입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처럼 문명이 발달하고 세련된 시대에 교회가 구태의연하게 전도의 방법을 고수하다니,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전도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로 21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말씀과 같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미련하다고 여기는 겸손한 자들을 구원하는 방편으로 전도를 택하신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은 말로써 복음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얼마나 절박한 외침입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을 믿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아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도의 대상을 성인들에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들로부터 초등학생들, 청소년들, 청년들, 성인들 모두를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은 한 살이라도 더 어릴 적에 갖는 바람직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족과 친지들을 전도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가족 구원이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거부와 비난에 낙심하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기필코 전도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할 수 있는 대로 선교사들을 돕는 데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였는데, 최초로 바나바와 바울을 택하여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나바와 바울로 인해 소아시아와 유럽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단독 선교사를 파송하지 못했으나 나름대로 몇 분의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앞으로 선교사들을 후원하는데 더 한층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분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교회가 단독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 교회는 영적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교회들이었으나 저마다 영적인 수준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아직 미숙한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 나무의 모종을 심으면 한 두 달 만에 아름드리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가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성숙한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퇴보하지 아니하고 나날이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부족함이 있더라도 내일은 좀 더 성숙한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 교회는 예배 공동체로서 성숙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교회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배 시간을 엄수해야 합니다. 예배가 시작된 후에 헐레벌떡 들어오지 말고 적어도 10분 전에는 미리 와서 기도와 찬송으로 마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신앙생활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잘하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운동선수들을 보세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땀 흘려 훈련하는지 모릅니다. 음악이든, 무용이든, 학문이든, 기술이든, 어느 분야이간 간에 어느 경지에 다다르려면 부단한 연습과 훈련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이는 신앙의 영역에서도 통용되는 원칙입니다. 그러기에 디모데전서 4장에 이르기를 “7)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갓난아기와 같던 신자가 시일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자라서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각 사람이 신앙의 성숙을 소망하면서 기꺼이 영적인 훈련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저야 합니다. 이 때 성숙한 신자들이 어린 신자들을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 성숙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이르기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 10:17). 주님의 말씀을 자주 들을 때 구원의 진리를 밝히 알게 되고 우리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성도들에게 주신 위대한 특권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주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소통을 나눌 수 있다면 그 보다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을 받아 우리의 심령이 강해져서 어떤 시험도 능히 물리치게 됩니다.

그리고 성숙한 성도가 되려면 봉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집에서 보면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형이나 언니가 동생들을 보살핍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성숙한 신자들이 어린 신자들을 섬기고 봉사합니다. 봉사는 영적 성숙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봉사를 잘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어려운 봉사도 너끈히 하게 됩니다. 이처럼 온 성도가 영적 성숙을 이루어나갈 때 우리 교회의 영적인 차원도 한 단계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 교회는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영적 소속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한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법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의 종교단체에 해당하므로 우리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국법 이전에 주님의 명령에 근거해서 우리 사회에 유익을 끼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 사회를 개선해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늘날 교회가 세인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는 현실을 통해서 우리는 그 동안 교회가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얼마나 잘 해 왔는지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일로, 또는 의로운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면 기쁨으로 감당할 것이나, 교회와 신자들의 흠으로 인해 비난을 받는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교회는 이 민족을 선도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채 낙심한 우리 민족을 일깨워서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운 사람들은 대부분이 외국 선교사들이나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 와서는 과거와 같은 참신한 영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살펴서 교회의 본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교회 창립 16주년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그것은 1)주님과 연합한 교회가 되는 것이요 2)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요 3)영적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요 4)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 이 네 가지를 명심하고 열과 성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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