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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어주는 사랑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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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주는 사랑 (고전 13:4-7)

복음과 율법과 철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 차이를 사랑을 주제로 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이것은 율법이고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은 철학입니다. 그럼 복음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 아닙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을 인간의 의무로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그것을 하나님의 행위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사랑을 실천하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실천해야 되는 의무로서 사랑을 생각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사랑을 생각하면 내가 왜 사랑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자녀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은 사랑으로 그들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일수록 이후에 인격이 발달하고 남을 사랑하는 능력을 가질 가능성이 많아지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아이들은 심성이 비뚤어지고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도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소위 사랑장은 우리가 실천해야 될 사랑의 조건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도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도 오래 참는 사랑이고 온유한 사랑, 투기하지 않는 사랑, 자랑하지 않는 사랑, 교만하지 않는 사랑,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 성내지 않는 사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 모든 것을 참는 사랑, 모든 것을 믿는 사랑,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도 어렵지만 하나님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교만하시거나 무례하시거나 불의를 기뻐하실 리가 없지만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야 될 것을 하나님에게 요구한다는 것을 상상하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내가 너를 참는다.(부드럽게)’라고 말하실 때보다는 ‘내가 너를 참는다.(경직되게)’ 

이렇게 말씀하실 가능성이 더 많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내가 너를 참는다.(부드럽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하나님도 그럴 리가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과 비례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 중에 나는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사랑을 안 하고 살아도 됩니다. 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밖에 느껴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사랑을 조금만 하고 사셔도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이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모두 자기 자식을 사랑할 줄 알고 가족을 사랑할 줄 알고 친구를 사랑할 줄 압니다. 이미 우리는 어느 정도 사랑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숨을 쉬지만 내가 얼만큼 숨을 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본인도 알지 못한 채 엄청난 양의 산소를 들이쉬면서 삽니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지만 나는 얼마만큼 물을 마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목마를 때마다 엄청난 양의 물을 당연하게 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만큼의 사랑을 받는다고 계수해서는 알 수 없는 만큼의 상당한 분량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내가 얼마만큼의 사랑을 받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됩니다. 신앙이 필요합니다.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하도록 만드는 면도 있지만 신앙이 있어야 내가 얼마만큼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면도 있습니다. 

성인용 영화를 19금이라고 하지요. 이건 14금과는 다릅니다. 14금은 14k, 금을 부를 때 쓰는 말이지만 19금이라는 말은 만 19세 이상만 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랑은 어른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면 첫째로 어른이 되어야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철이 든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도 커서 자식을 낳아보면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는 게 그런 것입니다. 철이 들어야 하나님의 사랑이든 부모의 사랑이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어른이 되어야 사랑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사랑, 인격적인 사랑을 받을 준비가 어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 미성년자는 사랑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냐. 물론 애정은 많이 받지만 인격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자식이 아직 어릴 때는 부모가 그 자식을 100 신뢰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천 원을 주고 심부름을 시킬 수는 있지만 백만 원짜리 심부름을 자식에게 시키지는 않습니다. 강아지를 맡겨주고 돌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갓난아기를 아이한테 맡기지는 않습니다. 그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가수 싸이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부모님의 허락 없이 대학을 옮겼다고 하지요. 그래서 부모님이 모를 줄 알았는데 새로 옮긴 학교에서 학부모 행사에 대한 통지서를 부모에게 보내는 바람에 탄로가 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학교가 학생의 손에 맡겨서 성적표를 부모에게 전달하게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직접 부모에게 보내야 됩니다. 편지로 보내는 것도 위험합니다. 아이가 우체통에서 먼저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직접 문자로 보내든지 이메일로 보내야 됩니다. 그게 학생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아직 그럴만한 나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직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도 부모가 될 것이고 언젠가는 자기 가정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그 아이들도 부모의 마음을 갖고 자식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만 사랑이 믿음을 낳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랑이 믿음을 낳는다는 말은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허물이 많고 문제가 많이 있는 줄 알지만 그럼에도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도 우리가 허물이 많은 줄 아시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믿고 신뢰하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요.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성숙함을 갖춰야 되고, 인류의 역사가 어떤 방향을 향하여 흘러가느냐. 성경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역사가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성숙함을 향한 여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구약시대보다는 신약시대가, 원시시대보다는 문명사회가 인간을 더 성숙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신뢰할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쪽으로 인류의 역사가 흘러간다는 얘기입니다. 

성적표를 책가방속에 숨기는 것은 성숙한 것이 아니지요. 자식이 어릴 때는 부모가 그를 100 믿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은 하는데 아직 100 신뢰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늘 염려합니다. 우물가에 데려다 놓은 아이처럼 자기 자식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늘 염려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간섭하고 또 잔소리를 하고 야단을 치셔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즐거운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즐거운 것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의 결과가 아닙니다. 

상상해 보세요. 부부의 관계가 늘 야단치고 잔소리하고 탓하는 관계라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늘 야단치고 잔소리 하는 관계라면 부모도 괴롭고 자식도 괴로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지시하시고 인도하시지만 늘 애처럼 간섭하거나 잔소리하거나 야단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되지 않고 우리에게도 은혜가 되지 않고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를 믿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지요.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만큼 당신이 위험을 감수하시고 또 얼마만큼 우리의 책임, 성숙함을 요구하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사랑은 어른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늘 경책하고 늘 채근하고 늘 야단을 쳐야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을만하다고 보실 때 그때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대체로 성도들에게 아이 됨을 장려하고 아이로 남을 것을 조장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의 설교시간을 보면 ‘오늘은 어떤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다 따라해 보세요.’ 설교제목을 처음부터 따라해 보래요. 이건 유치원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성도들의 수준을 어떻게 보고. 지금 제가 드는 예는 아주 작은 예입니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이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광고시간에 목사님이 십일조를 낸 성도들의 명단을 발표하는데 그것도 액수의 순서대로 발표한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많이 낸 사람부터 그 명단을 발표하는, 교인들이 십일조를 낸 사람도 당황하고 안 낸 사람도 당황하고 왜 그렇게 하느냐. 목사님의 지론은 그렇게 해야 성도들이 십일조를 낼 것이라는 얘기에요. 성도들의 수준을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몇 년 전에 주 5일 근무제에 대한 토론이 한창일 때 국내 어느 교회 목사님이 주요일간지에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주5일 근무제를 반대하는 내용이에요. 그분의 요지는 교인들이 토요일, 주일을 다 놀게 되면 놀러갈 것이기 때문에 주일성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5일 근무제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성도들의 수준을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그럼 중세시대처럼 주일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교회출석을 강요하자는 얘기입니까. 이런 식으로 성도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제도적으로 강요해서 교회를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게 하자는 얘기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시는 것보다도 목회자가 성도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여전히 그들을 아이로 보고 아이 취급을 하고 아이처럼 다루어야 된다는 얘기인데….

이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목사가 성도를 아이로 여기고 신뢰하지 못하는 것보다 성도들 자신이 자기를 아이로 여기고 아이처럼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하지 말아라, 저기 가지 말아라, 언제 와라, 몇 시까지 와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런 식으로 그들의 삶과 신앙을 다스리고 간섭하고 잔소리를 해주어야 신앙생활을 하려는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이에요. 

요즘에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숙제를 하고 스스로 아침에 일어나고 스스로 학교에 가고 그걸 가르치면서 신앙생활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성도들을 아이취급하고 아이처럼 간섭하고 성도들도 스스로 아이로 여기고 아이처럼 대우하기 전에는 자기가 알아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고, 그러면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여전히 율법시대에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여전히 율법적인 신앙을 가르치고 율법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얘기입니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것을 버렸느니라’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것을 장려하지 않고 성도들도 그것을 원하지 않고 주님은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기를 원하시지만 교회와 성도들은 여전히 율법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려고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고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은 과거보다 더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할 수 있고 과거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이해하고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뀌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바뀐 게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덜 사랑했다가 신약시대에 더 사랑한 게 아니에요. 

모세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오시면서 우리를 사랑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똑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분량이 변했다는 얘기입니다. 전반적으로 인류의 역사가 흐르는 방향이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인격체로 변화하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 또 힘 있는 사랑, 또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좌우되지 않는 내가 먼저 하는 사랑,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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