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합 2:4-20)

첨부 1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합 2:4-20)

남아프리카에 있는 한 인쇄업체가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제조회사에 인쇄기 한 대를 주문했습니다. 상당히 비싼 인쇄기였습니다. 그런데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났습니다. 미국에 연락했더니 이렇게 저렇게 손을 보면 될 것이라는 답이 왔습니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쇄소는 미국 회사에 기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얼마 뒤에 한 명의 전문가가 도착했습니다. 

이때 공항에 마중나간 사람들은 인쇄기를 고치러 온 사람을 보고 당황했습니다. 파견되어 나온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이가 한 스무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너무나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쇄소는 저런 젊은이로는 숙련된 전문가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미국에 팩스를 보냈습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련한 전문가를 다시 보내주십시오.> 

이 연락을 받은 미국의 제조회사는 단 세 줄로 답을 보냈습니다. <당신네들이 보기에 너무 어려 도저히 그 기계를 고치지 못할 것 같은 젊은이가 바로 그 기계를 설계한 장본인입니다. 아무 말씀 마시고 그 분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라주십시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일이 생겼을 때 그런 일을 처리하고 판단할 때는 통상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는 이성적 방법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 지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지식, 의견,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상황을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성의 방식에 따르는 문제는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그런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이성의 방법을 가리켜서 불신앙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믿음의 방식입니다. 믿음의 방식은 이성의 방식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있을 때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인 판단기준 근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방식의 문제는 종종 이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참으로 무모하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너무도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방식일 수가 있습니다. 

예들 든다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야했습니다. 홍해를 건너갈 때에는 먼저 홍해를 갈라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갈라진 그 사이로 지나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지나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요단강 물이 넘쳐서 흐르는데 거기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의 소설을 읽는 듯이 보거나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로 실전적으로 접해볼 때는 그것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나의 문제로 접할 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의문도 생기고 회의도 생기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가끔씩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맨 처음 여리고 성과 전쟁할 때는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가나안에서 하는 첫 전쟁인데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일곱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마치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보면 쉽게 볼 수 있겠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방식을 주셨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 방식을 택할 것인가? 이런 방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나는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더합니다. 그는 하나님 백성도 아닌 이방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나아보겠다는 맘으로 이스라엘에 있는 대단한 사람을 찾아가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한 말이 얼마나 타당한 말이고 합리적인지 보십시오. ‘우리나라에는 몸 씻을 곳이 없어서 이 멀리까지 와서 여기서 몸을 씻어야하느냐? 나는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방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이기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믿음의 방식입니다 

믿음과 합리가 충돌할 때, 믿음과 이성, 논리가 충돌할 때 더구나 말도 안 되는 방식 그것을 믿음의 방식,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되면 쉽게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할 수 있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나의 문제가 되면 달라집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식, 믿음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언젠가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것 같은데 믿음이 없다, 진짜 믿음의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4절 뒷부분에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합리가 아니고, 논리가 아니고, 이성이 아니고, 지식이 아니고, 경험이 아니고 믿음으로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은 어떻게 하든 간에, 소위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의 사람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산다는 대주제를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믿음의 장으로 알려진 히브리서 11장 전체는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11:1) 라고 시작합니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2절에서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정받았다고 말씀합니다. 3절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언제 세상이 지어졌습니까? 수천 년, 수만 년, 수백만 년 전에 지어졌다고 과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지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셨으므로 그냥 ‘아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안다고 해도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 지은 기간이 얼마입니까? 120년입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본인 자신도 회의를 가진 적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0년 동안 노아는 배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8절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무모한 일입니다. 어디로 가라고 하면 가서 알아보고 조사하고 좀 살아보고 난 뒤에 살아야하는데 그냥 나갔다고 합니다. 보이지 아니하고 알 수도 없고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먼 곳입니다. 아직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그냥 가라는 그 말씀만 믿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최근 아직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외국 나라들에 ‘조금 살아보고 결혼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 제법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미리 다 확인해보고 결혼을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내 아내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내 남편이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죽고 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더 이집트에 있었습니까? 전체 기간을 430년 이라고 하므로 요셉이 좀 더 있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그 기간은 근 400년입니다. 400년 후의 일을 요셉은 미리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나안으로 다시 돌려보내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그냥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내 시체는 땅에 묻지 말고 보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뼈를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할 때 그 뼈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의 믿음의 선배들도 그렇게 살았고, 그 믿음으로 우리 조국 한국을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데도 대한민국은 우뚝 솟아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30절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참 무모하고 바보같은 일입니다. 31절은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기생 라합은 그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 나라에는 소망이 없고 어차피 망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망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일을, 문제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성경의 빛, 신앙의 빛으로 비추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을 골라보면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성경의 빛으로 비추어볼 때, 신앙으로 바라볼 때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일이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그냥은 알지 못합니다. 똑똑하다고 한들 그게 그것입니다. 잘나보아야 그게 그것입니다. 배우면 얼마나 배웠겠습니까? 우주만한 세상에서 손톱만큼 배웠을 뿐입니다.배웠다, 경험했다고 하는데 경험했으면 얼마나 경험했으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역사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시는가? 내 가정을, 나의 인생을,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알 수가 있고 그제야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도대체 내 인생이 왜 이런 지, 내 집이 왜 이렇고 내 사업이 왜 이런 지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빛으로 볼 때 비로소 이것을 수긍할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73편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는데 그것이 아닌 것 같아 당혹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73:1-8).. 

입이 있다고 말을 마음대로 하고, 형편이 좋다고, 어떤 자리에 있다고 가리는 것 없이 아주 못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런 악한 사람들이 일이 잘된다고 먼저 말합니다. 

이어서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0-11절).. 

그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2-13절).. 하나님을 괜히 믿은 것은 아닌지 하나님이 계신지를 생각하는 그런 절망상태에 빠질 뻔했다고 합니다. 14절에서는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라고 합니다. 

그러다 15절입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드디어 바뀝니다. 깜빡 하면 넘어질 뻔했습니다.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믿음을 다 버릴 뻔 했습니다. 이어서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이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시73:16-19).. 

드디어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볼 때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미리 깨달을 수 있고 여기에 얻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평화를 얻고 행복을 얻습니다. 일이 잘 풀린다고, 넉넉하고 풍성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비밀을 알 때, 하나님의 흐름을 알 때, 세상의 흐름을 알 때 내 맘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저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건,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도 없고 예외적인 것들도 없습니다. 전부 다 이전에 있던 일이 그대로 다시 우리들에게 생겨나는 것밖에 없고, 우리 조상들이 경험한 것을 또 다시 경험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생전 처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고 나만 특별하게 이런 일을 당하고 예외적으로 나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어른들이 다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가끔 옛날 목사님들의 설교를 읽을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주제가 오늘날과 얼마나 같은지 모릅니다. 고민하신 그 고민이 오늘날 우리 목사들이 하는 고민과 똑 같습니다. 인생의 주제도 신자들에게 다가오는 유혹도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믿음도 똑같습니다. 2,000년 전에도 똑같았고 그 전에도 똑같았고, 100년 전에도 똑같았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인생은, 사람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보게 되면 세상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운행하시는지 그것도 알 수 있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먼저는 역사의 주인,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부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바벨론이 언젠가는 망한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호되게 당하는 것도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믿는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가 사업을 잘 하고 자식을 잘 키우고 건강한 것,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셨다, 무슨 뜻이 있는지 무슨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믿음이란 보이는 세상이나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들이나 합리와 논리 경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직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순전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박국이 이런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가능성이 없고 모든 학자들이 무슨 소리를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렇다고 하셨다면 그 하나님 말씀을 믿는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망한다, 저 나라는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면 망하는 것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잘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백 번, 천 번 생각해 보아도 가망성이 없는 사람이지만 믿는 것,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내 가정이 이렇게 초라하고 하는 일마다 잘 안 되지만, 그러나 어느 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시고 내 회사를 세워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 번째, 보통사람들은 두 번째까지는 그럭저럭 하지만 세 번째로는 잘 넘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기는 하지만 그 다음 중요한 단계인 그 말씀대로 믿고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좋습니다. 그러나 ‘아멘’만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 따라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예가 있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왕 때 막강한 이방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됩니다. 유다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하나님 그동안 제가 잘못한 바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 악한 연합군을 보내셨습니다. 제가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라고 회개하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보내셔서 말씀하십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대하20:17)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전부다 ‘아멘’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7절 마지막 말씀입니다,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하나님만 믿고 그냥 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믿음의 갈림길입니다. 이때, 여호사밧은 ‘아멘’ 하고 앉아서 가만히 있었습니까? 

20절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21절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시키신 그대로 했습니다. 그냥 앉아서 ‘아멘, 믿습니다’ 라고만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하면서 찬양대를 앞세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지만 시키신 대로 했다는 말씀입니다. 

결과를 보겠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햐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대하20:22-23) 바로 이것입니다. 그냥 믿고 믿음으로 준종하는 것입니다. 믿고 난 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행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았습니다. 인도의 어느 마을에서 낙타 페스티벌이 있어서 수 천 마리 낙타가 모였습니다. 낙타의 생김새는 착하게 생긴 낙타, 아주 우습게 생긴 낙타 등 참으로 여러 모양이었습니다. 낙타를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사람에게 PD가 어떻게 훈련시켰는지 물어봅니다. 낙타를 제대로 훈련시키면 앞에 벽이 있지만 돌진하라고 하면 머리가 터질지라도 앞으로 돌진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자기 주인을 그렇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가자고 하면 죽을 힘을 다해 간다는 것입니다. 죽을 곳도 주인이 가라고 하는 곳에는 죽음이 아니라 사는 길이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을 낙타가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믿음입니다. 세 번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넘어가야합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걸리고 넘어져서 능력과 권세를 받지 못합니다. 

네 번째, 우리 하나님은 악을 매우 싫어하시고 선을 대단히 사랑하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악한 사람들은, 악한 나라는 반드시 무너지고 멸망하고 선한 사람들은 반드시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좀 힘들어도 죽겠다고 징징거리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틀림없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는 오늘 큰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다 믿고 난 후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전부 다 맡기는 것입니다. 본문 하박국 2장 20절에서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너무 나서고 말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을 믿고 맡겼으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말이 너무 많고 너무 나섭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미련하십시오. 우둔하십시오. 못난 사람이 되십시오.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김태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