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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해 받거나 비판 받을때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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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받거나 비판 받을때 (고전 4:1-5)
 
때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오해를 받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오해받고 비판받을 때’라는 오늘의 주제를 묵상하다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시조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옛사람도 남들의 비난과 험담으로 매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시조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개야미 개야미 불개야미 
등 부러진 불개야 
압발에 정종 나고 뒷발에 죵귀 난 불개야미 
광릉 재 너머드러 가람의 허리를 르 무러 추혀 들고 
북해를 건너닷 말이 이셔이다 
님아 님아, 온 놈이 온 말을 여도 님이 짐작 쇼셔 

세상을 살다보면, 터무니없는 모함으로 오해를 받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모함이 얼마나 허황되고 과장될 수 있는지 시조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개미 중에도 제일 작은 개미가 불개미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개미의 허리가 딱 부러졌습니다. 게다가 앞발과 뒷발에는 부스럼과 종기가 났습니다. 이런 불개미가 광릉 샘고개를 넘어 호랑이를 물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온’이란 100을 의미합니다. 즉, 이 시조를 읊은 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백 명의 사람이 백 가지 말을 한다 해도 님이 짐작해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님을 임금님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충성스러운 신하의 고백일 것입니다. 님을 애인이라고 생각하면 정절을 갖춘 애인의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고 님을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사랑스러운 성도의 기도일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렸던 인물인 다윗도 수많은 비난과 험담에 시달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쓴 시로 알려진 시편 41편 5절 이하에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 질까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시편 41:5~8) 

세상에 누가 이런 비난과 조롱, 험담을 받으며 살고 싶겠습니까?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혹시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비난이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 남아서 나를 찌르며 괴롭게 하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잘될 때는 괜찮은데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실패하는 것 같이 여겨질 때 나를 향했던 악담들이 떠오르지는 않습니까? 

제가 만났던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너는 왜 그렇게 지지리도 못났냐? 네 형 좀 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그 말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못난 자’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가슴 아프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내가 못나서 그렇지.’ 생각하며 자학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친구와 말다툼을 하다가 상대방이 지나가는 말로 “야, 너는 재수 없게 생겼어.”라고 툭 내뱉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흔 살이 넘은 지금까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때마다 ‘저 사람이 나를 재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아픔 없는 비판은 비난이 됩니다.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말로 인한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 더 깊고 더 오래 고통을 줍니다. 아문 후에도 그 자국이 너무 커서 지워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영 아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구약 외경의 집회서를 보면 말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매에 맞으면 매 자국이 나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 (집회서 28:17) 

얼마나 강력한 말입니까? 그만큼 말이 가진 힘이 크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이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잘못 건넨 말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갖는지 알고 있습니다. 남을 험담하는 것이 못된 것이라는 것을, 말로 주는 상처가 얼마나 상대에게 고통이 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것을 알면서도 남을 비난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 속에 이기적인 속물근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돌고 있는 유언비어와 여러 가지 뒷담화, 정보들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들으면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소문을 냅니다. 또는 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남을 험담합니다. 남을 깎아 내려야 내가 올라가는 것 같은 상대적 우월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또 남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겨우 한두 가지 지식으로 상대방의 인격을 폄하합니다. 

이렇듯 남을 험담하는 데에는,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아주 못된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어쩌면 험담을 하는 잠깐 동안은 스트레스가 풀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내 인격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깨닫게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에 입을 꾹 닫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 또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건강한 비판은 좋은 것입니다. 잘못과 위기를 바로 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비판하는 것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바로 그러한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 시대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시대의 위기 앞에서 아픈 가슴으로 등장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판이 예언자의 말이 되려면 말하는 이의 가슴에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비판은, 비판 받는 대상에 나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도 못된 것이고, 내게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비판은 곧 비난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 속에
긍휼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시니컬한 조롱과 미움이 들어있을 뿐입니다. 비판 받는 자가 더욱 나은 모습으로 고쳐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고쳐지지 않고 계속 비난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고 험담인 것입니다. 거기에 없는 말까지 덧붙이거나 침소봉대하는 것은 험담을 넘어서 악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파멸시키는 아주 못된 비판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험담을 살인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며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고 말합니다. 그 세 사람은, 험담하는 사람과 험담을 옆에서 묵묵히 듣는 사람, 그리고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 모두가 다 죽게 되는 것이 험담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험담이 신앙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 안까지 들어올 때 그것은 큰 위기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분파로 서로가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적대했습니다. 이렇게 적대감이 쌓일 때 생기는 것이 바로 남에 대한 비난과 조롱, 험담과 악담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험담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 파냐? 너는 시기와 욕심이 가득한 자가 아니냐?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이기적인 탐욕을 위해서 뛰는 것 아느냐?” 사도 바울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이 사실에 대해 변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서로에 대한 판단으로 서로를 비판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린도전서 4:1)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사람들이 바울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향해 “너 그리스도의 일꾼 아니지? 너 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하는 자지? 네 설교는 속임수가 가득하지? 교활한 말장난으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지? 네가 어디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거야?” 라고 말하며 그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오해와 비난을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명백한 자의식, 자존감,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자부심,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자부심, 사람들의 소리도 중요하지만 그 소리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3절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전서 4:3) 

사도 바울에게는 판단 받음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은 가장 작은 것, 그 다음으로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그것보다 좀 더 큰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는 것은 가장 큰 것이라는 기준이었습니다.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살아가면서 판단과 비판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판단할 때 물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정말 내게 잘못이 있는가?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가? 내게 못된 것이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내 인생 전체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 다음 과정이 필요합니다. 바로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얇은 귀’를 갖게 되는 것은 자존감이 낮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건네는 비판 한 마디에 그냥 주저앉고 슬퍼합니다. 반대로 다른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면 우쭐대고 스스로를 최고라 여깁니다. 

남이 나를 칭찬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나, 남이 나를 비판할 때 가슴이 움츠러드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누군가의 칭찬이나 비판을 들었을 때 스스로를 바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양심의 비판이기도 하고, 이성적 비판이기도 하고, 감성적 비판이기도 합니다. ‘내가 정말 옳은 사람인가? 내가 가는 길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물으며 스스로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 말씀에 사도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린도전서 4:4)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정말 비난 받을 만한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나쁜 동기를 품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책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자책할 것이 없다고 그리스도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뜻은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결코 “하나님 눈에 완전히 맞았다. 나는 다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나를 판단할 때 이만큼 하면 됐다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판단할 줄 모르면 남의 소리에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인생 자체가 남의 말 한 마디에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입니다. 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가장 작은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다음, 내가 나를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일들을 참되게 감당하고 있는지 스스로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는 ‘하나님 앞에서’ 라는 그의 자의식입니다. 라틴어로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내 일거수일투족을 아시는 하나님, 내 속마음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내 생각과 동기까지 읽어보시는 하나님, 그 분 앞에 내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실 것이니,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내 길을 가겠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는 동안 듣게 되는 비난과 욕설, 조롱으로 우리는 억울해 합니다. 때로는 화가 나서 맞대응하고 싶기도 합니다.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또 어떤 때는, 그저 속에서 삭이려고도 하고, 도망치거나 무시해 버리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반응들은 결코 마음을 풀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마음을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뿐입니다. 하나님께 궁극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마음속에 맺혀진 것들이 풀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십시오. 

중국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네 말에 한 번 속았다면 그것은 속이는 너의 잘못이다. 그러나 내가 두 번 속는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들에 그냥 빨려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옳은가, 그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그른 것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다가온다 해도 단호히 거절해야 됩니다. 그 말이 내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내가 스스로를 보호해야 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내 자부심과 자존감을 세워야 됩니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오해와 비난 받음의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비난과 오해를 받을 때, 사도 바울의 생각을 품습니다. ‘하나님,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요? 제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요? 하지만 하나님, 사람들의 비난은 가장 작은 것임을 기억하겠습니다. 제가 저를 보겠습니다. 내 속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 없는지, 양심에 가책이 되는 것이 없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나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나야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야 다시 용기가 생기고, 주어진 삶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약합니다. 그 강한 사도 바울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림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실존을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심판 주라 여기며 가야할 길을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해와 비난을 받을 때 어떻게 그것을 이겨 나갈 것인지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비판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향한 비판을 이겨 나가는 것만큼 남에게 사랑 없는 비판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비판은 사람을 깨닫게 할 수는 있지만 살릴 수는 없습니다. 살리는 일은 긍휼과 사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긍휼과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세상의 소리에 너무 상처받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고 그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어 믿음으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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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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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2681 2016.09.03. 22:15
김지철 목사님, 귀한 설교 말씀 잘 읽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서 주시는 통찰력있고 현실적인 결론이 너무 명쾌하게 다가옵니다.

남의 비난도 잘 들어보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안에서 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라는 결론. 또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라는 교훈. 마지막으로 긍휼과 사랑을 마음에 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겠습니다. 목사님,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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