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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본질을 붙들면 살아난다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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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붙들면 살아난다 (계 2:1-7)

1.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기 이전에는 목회란 어려운 일이었고, 그 당시 신학교에 간다는 것은 굉장히 큰 결단이었습니다. 목사님이라고 하면 검정 양복 하나로 사계절을 입고 궁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목회적인 면에서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 땅에 교회를 세워가는 영광스러움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교회 간판만 달아 놓으면 사람들이 몰려왔고, 허름한 개척교회라도 어린아이들이 와글와글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목회는 순수함과 보람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많지 않을 때에는 신앙인들 안에서 민족의 지도자도 나왔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러나 경제도 성장하고 기독교가 다수가 된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반감도 늘었고 교회는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입니다. 지금은 개척 교회를 하면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목회 현장이나 목회 외적인 환경들이 많이 변했습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가정 안에서 신앙의 계승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질문 해보면, 크리스천 가정의 자녀들이 대학에 가면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수가 열 명 중 한 명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기가 끝난 것일까요? 

교회는 여전히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냉철한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이 시대와 통일, 그리고 세계 선교의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만 열심히 믿으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생각보다, 기독교 공동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을 한 지 495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되살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를 우리는 개혁 교회 혹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부르는데 로마 가톨릭에 도전장을 내고 개혁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에 속하고 개혁 신학을 강조하는 개혁 교단입니다. 개혁 신학과 신앙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오늘날 우리 개신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해서 존 칼빈의 종교개혁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우리가 종교개혁 주일을 지키고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혁(reformed)이라는 말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살피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잘 간다고 가지만 가다 보면 곁길로 빠져있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한국교회는 경제 성장과 함께 급성장하였습니다. 문제는 경제적 성장과 함께 세속화의 물결이 지금 한국 교회를 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화 신앙이란 세상에 있는 것이 들어와 우리와 세상 사이에서 구별점이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더 부러워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신자가 세상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요? 가치관의 차이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에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우리도 좋아하고 있다면 이미 세속화된 것입니다. 한미준이라는 한국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한국 갤럽에 의뢰하여 ‘신자와 비신자의 생활과 가치관’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신자와 비신자의 가치관이나 도덕성은 별다른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 윤리나 낙태에 있어서도 비슷했습니다. 세속화의 현상이 너무나 뚜렷하고 깊어진 것입니다. 

세속화된 신자의 삶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이 사회나 가정에서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굉장한 칭찬을 받고 헌신하지만,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비난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 물량주의의 힘이 거세게 밀고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교인 수를 자랑할 수 없는 것도 과연 그것이 허수가 아닌 실수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도로 무장된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되는가를 점검해 볼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와 군중은 다릅니다. 결국은 수나 힘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인가 군중인가가 문제입니다. 

군중은 아무리 많아도 영향력을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모였다 흩어지는 것 외에 의미가 없다면 허수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를 좇았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목적을 포기하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오늘날 참된 제자가 얼마나 있는가가 한국 교회에 주어진 질문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발단은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기금 마련을 하고자 면죄부를 강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끌어온 성당의 건축을 완공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교황 정치를 통한 문제와 비리들, 왜곡된 진리 등으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당시 젊은 사제였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개혁의 깃발을 들고 로마 가톨릭에 정면 도전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몇 가지만 해결하고자 시작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개혁의 불길이 치솟아 모든 문제가 돌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모한 싸움으로 보였지만 개혁운동이 들풀처럼 번져 나가 유럽 전역까지 확대되면서 역사적인 획을 긋는 종교개혁이 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시작했고 존 칼빈과 같은 개혁가들이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역사 속에서 다시 바르게 세워주시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입니다. 

오직 믿음(sola fide)은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가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당시 로마 가톨릭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행위를 강조했고 그 행위는 주로 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했지만, 믿음으로는 부족하여 무엇인가 덧붙여 구원을 얻는 것처럼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만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 다른 종교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문제는 모든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주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도 혼란이 와서 믿음에 행위가 더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율법주의가 들어와 있습니다. 행위에 근거한 구원론은 인간의 이성에 어울립니다. 인과응보적 원리에 익숙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 그리스도를 통한 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의 핵심교리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겉으로는 선하게 보여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선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인간은 소망이 없고, 행위나 의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가 그토록 이야기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오직 믿음’을 외치며 로마 가톨릭의 진리의 왜곡에 도전장을 낸 것입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강조했습니다. 종교개혁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기본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기본 중의 기본은 성경입니다. 중세기에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읽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학문적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신학을 전공한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마음 놓고 부패를 하게 된 요인이었습니다. 대중이 말씀을 모르니 판단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나침반이고,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고, 모든 것을 잴 수 있는 자와 같습니다. 루터가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성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학교나 수도원에서도 성경 경시 풍조가 있었는데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전통이 더 우위에 있고 교황무오설과 같은 오류들을 만들었습니다. 사료에 의하면 루터는 평소에 성경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수도원에서 성경을 읽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 어느 날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에서 루터의 가장 큰 공헌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반 신자들의 손에 성경이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혁명과도 같은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절대적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구원의 길을 찾고, 성경을 통해 신앙이 성숙해가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의 절대기준은 오직 성경입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붙잡고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갖는 것이 개혁 신앙입니다.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내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진 은혜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며 시작부터 끝까지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고, 구원 얻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셔야 구원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나의 노력이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도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은혜만을 붙잡아야 합니다. 교회가 타락할 때 혹은 우리 신앙에 문제가 생길 때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행위가 더 강조될 때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베푸신 것들을 깨달을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은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역을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져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좋은 설교는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설교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섬겨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나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보조자일 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아차 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나의 기념비를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은 늘 묻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종교개혁의 정신은 ‘만인제사장주의’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말씀은 개혁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가 교회의 중심에 있으면서 신의 대리자로, 죄를 신부에게 고하고 용서를 받습니다. 본래 고해제도는 최악의 궁지에 몰린 죄인을 극적으로 구조하기 위한 제도였는데 중세로 넘어오면서 교회가 개인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것처럼 변질 되었습니다. 고해하는 쪽이나 그것을 받는 교회의 편에서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신도와의 사이에 중보자로서 사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는 제도에서 자연히 성직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성경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신분상의 우열이 없습니다. 단지 교역자가 더 강조되어 보이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목양적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능적 차이이지 결코 직분상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때 ‘너희’는 베드로전서의 편지를 받는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 

믿음을 따라 흩어진 모든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한 소명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일부의 교역자만이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직업이 성직입니다. 교회당이라는 특정 장소만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성전이고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의 모든 직업이 성직이기 때문에 그 직업의 영역 속에 최선을 다하니까 경제적인 차이도 가톨릭 나라와 개신교 나라는 확연히 다릅니다. 

개혁주의의 신앙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직업이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낸다면 그 일은 거룩한 일이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곰탕을 만드는 식당의 주인이 충분히 우려낸 국물로 정성껏 손님들을 섬기는 일은 주일에 안내를 하는 일과 동일한 사역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역자입니다. 교역자들이 주의 일을 하고 일반 성도들은 그것을 응원하고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신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역자들만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종입니다. 목사님이 종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은 주의 종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돈벌이를 하는 세속적인 인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주 비성경적입니다. 사제주의는 특권층의 사람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의 대리자로 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것처럼 군림했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거룩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역 박람회를 열어 모든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재능과 직업, 경험 등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팀 사역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려고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마음껏 은사를 따라 사역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을 펼치고자 합니다. 

한 가지 이상의 사역에 모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잘하기 위해서 교역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목사를 세우신 이유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입니다. 우리는 부름 받은 동시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원리이고 성경적 원리입니다. 

우리 시대의 최고의 키워드가 있다면 ‘변화’입니다. 한 번의 변화가 아니라 계속적인 변화입니다.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교회적으로나 우리 개인의 신앙을 돌아보면서 변화에 대한 열망을 계속 가져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치우치고 본질을 벗어나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신앙이 변질되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좋은 제도도 낡아집니다. 영원한 기업도, 영원한 제국도, 절대 권력도, 영원한 부도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세대가 그토록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세웠던 교회가 백 년도 되기 전에 문을 닫고 상가로, 술집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100년 이상 영광스럽게 쓰임을 받았던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만 해도 불과 30~40년 전에 최고라고 했던 교회들이 지금은 힘을 잃은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앞선 세대의 신앙의 뜨거움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신앙의 전수가 우리에게서 희미해지면 다음 세대에서는 훨씬 더 옅어질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내 신앙은 손자 대에 가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손자에까지 그 신앙이 아름답게 계승된다면 명문가정이 됩니다. 그 가정에서 역사를 움직일 인물이 나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으면서 개혁주의의 신앙을 본받아 본질을 찾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리에서 벗어나 변질될 것을 두려워하며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능력을 갖추고, 날마다 속사람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날마다 자신을 개혁하는 신앙으로 살고자 결단한다면 한국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붙임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가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루터의 친구들이 피신할 것을 요청하고 만류하지만, 그는 웰매스 재판장으로 들어서며 당당히 이야기합니다. “웰매스의 지붕을 덮은 수만 장의 기왓장이 악마로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네 주장을 꺾으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성경이 네 주장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나는 당당히 내 목숨과 함께 이 재판장에 들어서리라” 

대단한 용기입니다. 이런 용기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바로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입니다. 진리에 목숨을 건 신앙, 부럽지 않습니까? 인생의 승패는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확신과 용기를 가졌는지, 만약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이고 성공한 인생입니다. 

날마다 나의 신앙을 점검하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몸부림과 결단이 계속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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