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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과 진리 (요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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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 (요 4:23-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in spirit)과 진리(in truth)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유대인들에게 오순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됨을 기억하는 날이며,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로 주신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뜻 깊은 절기인 오순절에 성도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오순절은 성령 강림절이 되었고, 초대 교회가 탄생되었기에 신약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과 바람의 모습으로 다가온 성령이 기도에 힘쓰던 120명의 무리에게 임하는 순간 그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2000년이란 세월은 지났으나 성령께서 변함없이 교회를 주관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사라진 설교는 강연이고, 성령의 역사가 없는 예배는 단지 종교의식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당은 성전이 아니라 건물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사라진 삶은 탈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우리에게 전략이 필요하고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성령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찬양을 부르면서 전율을 느끼고 하나님과 내가 마주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설교가 가슴 깊이 파고 들어오며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로 나에게 직접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 적이 있습니까? 성령은 우리 인간의 모든 부족함과 실패를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벌써 예배 시리즈를 시작한지 7주가 됩니다. 그동안 다룬 법칙이 무엇입니까? 기다림(예배의 깊이와 질은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에 달려 있음), 드림(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 자신을 깨뜨리고 작의 모든 것을 드림), 반응(받은 은혜를 인하여 노래, 감사, 회개, 결단, 헌신으로 반응), 경외(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이 복합된 경외감으로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십자가와 보혈의 신비를 묵상해야 합니다), 

친밀(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의 손대신 얼굴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 오늘 다루는 ‘영과 진리’는 7가지 예배 주제 중 가장 중요한 두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과연 어떤 예배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성을 찾아가십니다. 우물곁에 앉으시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옵니다. 그 여인이 너무 더워 사람들이 다니지 앉는 대낮에 물을 길러 오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이기에 같은 사마리아인들에게조차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은 사마리아 인들이라는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서, 죄인과 접촉하지 않으려는 사회적인 장벽을 넘어서서 여인에게 접근합니다. 남의 눈을 피하여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온 여인이지만 처음 보는 유대인 남자와 대화하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며 대화에 끌려 들어갑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어떻게 하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참된 예배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1) 예배장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동안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만 드리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각각 예배를 드려왔다. 다른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어디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2) 예배자의 자격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유일한 구원은 오직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예수님을 통하여만 가능하기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3) 예배자의 태도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진리에 바로 서서 예배를 드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소외된 여인,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이 여겨지던 여인, 고통과 공허함을 가진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냉수 한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었다. 더 이상 쓸모없는 여인이 아니라 그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인간으로서의 가치 회복이었다. 주님을 만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던 여인이 자기를 직접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경험하고 무엇보다도 예배자가 되었다. 

남자를 여섯 번이나 바꾸었어도 만족을 찾을 수 없었던 여인이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고 나니 가지고 온 물동이를 던져버릴 수 있었다. 보다 귀한 것, 보다 가치있는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니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게 되고 수가성을 복음화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스토리를 배경으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살펴봅니다. 


영으로 예배하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in spirit)과 진리(in truth)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 말씀은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입니다. ‘영’을 그저 성령으로 바꾸어 말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맞지만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의미적 해석 이전에 먼저 문자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영’이란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성령보다 훨씬 더 포괄적입니다. ‘영’은 헬라어 명사로 ‘프뉴마’인데 ‘바람’, ‘숨이나 호흡이나 생기’, ‘영’, ‘성령’의 뜻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23절에 나오는 ‘영’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프뉴마’의 뜻 중의 하나가 바람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힘을 얻으면 움직임이 거세지고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뉴욕과 뉴저지를 포함한 동해안을 강타한 superstorm인 Sandy로 인하여 100명이 넘는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수십조 달러의 재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바람이 얼마나 강력한지 나무와 집을 쓰러뜨리고 큰 배까지 육지로 움직여 놓았습니다.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습니다. 존재조차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활동하기 시작하면 놀라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인간도 영적인 능력으로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육이 사람을 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에 온통 마음을 쏟습니다. 몸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육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영’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 즉, 예수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어 있는 문자가 아니라 생명력이 있는 영입니다. 영으로서의 말씀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영과 더불어 일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면 거룩과 생명에 속한 일, 사랑의 사귐, 존중과 이해, 용서와 용납, 성장과 성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의 영에 자기의 영으로 반응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빌 3:3)하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성령의 충동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시면 죽어있던 영이 깨어나고, 무감각했던 영이 지각을 회복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에 대해 반응하는 어떤 것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누스’는 헬라 철학에서 세계와 존재를 이해하는 사고 기관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마음을 ‘이성’으로 번역했습니다. 영은 인간의 인지대상이 아닙니다. 그 영이 인간의 마음(이성)과 연합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할 때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 마음으로 찬양하고 ‘영’으로도 찬양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또한 ‘방언’과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즉 방언은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영으로만 하는 찬양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영과 이성, 영과 마음이 하나 된 기도와 찬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의 잠자는 영을 충동할 때 우리의 전인격이 깨어납니다. 영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길을 열어줍니다.


성령의 주무대가 되게 하라

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6)하는 표현을 8번이나 사용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귀 있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회중이 드리는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즉, 예배는 성령의 주 무대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에는 성령이 함께 하시며, 그 모임에는 하늘의 기쁨이 있고, 성령의 영감이 있고, 계시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예수님을 드러내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 성령의 역사보다 앞서나가서는 안 되겠기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권면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전에는 술 취하여 주정하며 헛된 노래를 주절거리고, 전에 거짓말하고, 분을 내고, 더러운 말을 하던 입술이 이제는 깨끗하게 되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합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세웁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차서 나를 즐겁게 하고 나 중심으로 살았던 옛사람이 변화를 받고 보니 이제는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함께 부르니 우리가 서로 눈으로 보게 되고 귀로 듣습니다. 결국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말하는 것에, 생각하는 것에, 행동하는 것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거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감각, 온몸 사지백체를 사용하게 되니 영육 간에 강건해집니다. 삶에 의욕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아름다운 모습들이 예배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은 성도가 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천상의 예배 모습에서도 나라와 족속,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모인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예배하는데 그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님이십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계 7:9-10). 


성령으로 예배하라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단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주일뿐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6일 동안에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매주 예배를 위해 멋진 음악과 잘 짜인 예배 프로그램, 쾌적한 예배 공간,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과 멀티미디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성령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까? 먼저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살펴봅니다. 

1)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예수님은 성도가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성도와 함께 하시는 존재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의 영, 즉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2)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보혜사란 직역하면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성령님보다 더 뛰어난 도우미는 없습니다.

3)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4) 기도를 도우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5) 치유, 참회, 사죄의 확신, 결단, 헌신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도우셔서 치유, 참회, 사죄의 확신, 결단, 헌신으로 이끄십니다. 상한 심령으로 목말라하며, 그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나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항상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가장 받고 싶으신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마음먹은 성도를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간구하십니다. 성령과 인격적으로 소통할 때 비로소 우리의 예배는 영원과 맞닿은 사건이 됩니다.


진리로 예배하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in spirit)과 진리(in truth)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여기서 진리는 헬라어로 ‘정직한 마음’, ‘어떤 행위나 사물, 사건의 근원적인 진실’, ‘하나님의 실체, 계시’라는 뜻을 가집니다. 다윗은 자신의 방패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에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생각과 감정을 다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울부짖는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불평과 고통, 고난, 환난의 상황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풀어놓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정직하게 따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에는 삶의 현장에서 터져 나온 현실의 영성이 배어 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는 변함없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 음성으로 받으라

신약의 설교자의 역할은 구약의 선지자와 비슷합니다. 선지자를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합니다. 이는 ‘대변자’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스스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서 그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17)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고집, 편견, 고집, 무식 때문에 잘못 전한다면 대언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회중에게 권위있게 선포하는 행위를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즉, 신적 명령을 받은 대리자가 신적 권위를 갖고 예배 참석한 회중을 향해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 내린 명령도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갖는데 하물며 왕 중의 왕이요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얼마나 더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듣는 청중에게는 당연히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말씀을 대면할 때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는 자세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란 우리를 향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회중과 시대적 상황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해주어야 회중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 항상 도전이 됩니다. 한국의 대선주자들이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는 생각지 않고 저마다 표심을 끌기 위하여 복지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설교자들도 동일한 유혹을 받습니다. 설교가 포퓰리즘에 사로잡히면 회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로 변질됩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와 연구 없이 회중이 듣기에 부담 없는 설교를 하려고만 한다면 강단의 타락과 오염이 생깁니다.

그런데 아무리 강력한 성령의 감동으로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이라도 듣는 자의 귀가 닫혀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귀가 있어도 정말로 들어야 할 영혼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을 귀”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2절의 “저희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해서 9절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로 마칩니다. ‘말씀하심’과 ‘들음’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비 요건입니다. 설교 시간마다 ‘들을 귀’가 열려야 합니다. 깨닫고 변화되는 반응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잔잔히 비같이 내리다가 영혼의 귀가 열릴 때 말씀의 집중호우가 쏟아집니다. 그럴 때 마음이 아프고 심령이 찔립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다가옵니다. 문제는 들을 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허탄한 세상 소식에 더 현혹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는 애통한 마음으로 유다 백성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7:23).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으며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불순종의 결과 하나님의 징계로 나라를 잃고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혹시 그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 속에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 자신을 직접 진리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분의 인격, 행위, 삶 자체가 진리이십니다. 진리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 진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예배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해야 합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예배하는 것을 “삶을 만지신 실재를 경험하는 것인데, 이는 모인 공동체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느끼며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복종했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하늘과 땅 위의 모든 피조물 위에 높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바로 예수님을 기리고, 그분이 남긴 말씀을 듣고, 그분의 체취를 맡으며, 그분의 숨결을 느끼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며 그분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눈앞에, 우리 귀에, 우리 입술에, 우리 두 손에 가득 존재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명제입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썩고 부패하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능력과 진리의 보이지 않는 영이심을 의미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땅의 성전의 실체이자 하늘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므로, 이제는 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참된 예배는 몸만 드리거나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함께 드려야 합니다. 그동안 드려졌던 예배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가지고 오는 하나님에 대한 실체적 예배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였습니다.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은 진실 되게 예배드려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성경말씀에 계시된 진리와 일치하게 행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리 중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라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예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높이고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성령과 말씀이 충만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결국 성령과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지휘자이신 성령님과 예배의 유일한 주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자 그분의 스토리인 말씀이 예배 속에서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자기를 철저히 낮추고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체험을 통하여 지혜와 능력을 받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 쓰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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