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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목자 (요 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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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요 10:7-21)


어떤 부인이 스위스를 여행하다가 어느 날 양무리가 있는 한 목장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목장 안을 거닐다가 그 부인은 목자가 양무리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자 옆의 건초더미 위에는 병이 난 듯한 양 한 마리가 누워 있었습니다. 궁금하게 여긴 부인이 가까이 가서 보니 양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양이 매우 불쌍하게 생각되어서 어떻게 하다가 양의 다리가 부러졌는지 목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부러뜨렸습니다”라고 목자는 슬픈 표정으로 말하면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제 소유의 양떼 중에, 이놈이 가장 속을 썩이는 양이었지요. 이 녀석은 제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고 양떼를 이끌고 갈 때에도 따라 오지를 않았어요. 몇 번인가 위험한 벼랑 끝까지 가서 헤매고 있길래 구해온 적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자기만 불순종할 뿐 아니라 다른 양들까지도 길을 잃게 만들지 뭡니까? 저는 이런 양을 많이 겪어봐서 압니다만, 다른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놈의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먹이를 주려고 하니까 이놈이 날 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 2, 3일 혼자 누워 있게 내버려 두었다가 찾아가 보니 녀석의 태도가 아주 달라져 있었어요. 이 녀석은 열심히 먹이를 먹을 뿐 아니라 내 손을 핥으면서 복종하고 사랑한다는 표시를 했답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이제 이 양이 건강해지면 모든 양떼 중에서 최고로 모범적인 양이 될 것입니다. 전에는 다른 양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는 헌신과 순종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이 망나니 양의 삶이 완전히 변화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 양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된 겁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한 남자가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서 양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만약 양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면, 따라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믿음에서 병들고 약해지면, 그들을 찾아오는 아무 선생이나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어려운 일들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배의 자리에 오기까지 통과한 문이 몇 개나 되십니까?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나왔을 것이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고, 아침을 먹고 이를 닦기 위해 화장실 문을 들어갔다 나왔을 것이고 교회에 오기 위해 문을 나왔을 것이고 자동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차문을 열고 닫았을 것이고 교회의 문을 통과하고 예배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은 최소한 10번 이상 문을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문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때는 “쉼”과 “안전” 그리고 “보호”의 입구가 됩니다. 반대로,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새로운 출발”과 “시작”이라는 설렘과 함께 “위험”에 노출이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문은 들어가고 싶은 문이고 어떤 문은 들어가고 싶지 않은 문이 있습니다. 어떤 문은 들어가야 하고 어떤 문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문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을 드나드십니까?
주님은 거듭해서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것은 양에게 생명을 주시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문이 되어주실 때만 강도와 절도로부터 안전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에게 생명이 보장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누구에게 생명이 있습니까? 이 껍데기 속에 있는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은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마치 산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개가 있듯이 하늘나라 가는 길도 여럿이 있을 줄로 생각하고 그렇게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일은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바 그것도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그 문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양의 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건물에는 여러 출입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출입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 문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누구도 예수님을 제치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생명을 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요 예수님도 기도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주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 문이 바로 유일한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이미 주어져 있는 고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요 동시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여 우리로 하여금 꼴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그저 단순하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문을 열어 이 땅에 쌓을 수 없을 정도로 채워주신다고 하셨고 또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보다도 먼저 온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 절도요 강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헤치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만히 옵니다. 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담을 넘습니다. 
도적은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도적은 양을 정당하게 소유하지 않고 훔칩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도적에게는 양을 위한 목적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챙길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양떼를 죽이고 맙니다. 오늘도 도적같이 가만히 들어오는 이단들 그리고 이제는 아주 당당하게 큰 소리 치며 교회를 몰아붙이는 강도와 같은 이단들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우리들 앞에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분별의 영이 없이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 해서 따라 갔다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오 그것도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시며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게 하시는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신명기 기자는 우리들에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의 문이 되시며 우리의 모든 삶의 주관자요 공급자가 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충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십니다.
다음과 같은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의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의 편에 서 계신다.
나는 숫자를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신다.
나는 의로운 군중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 편에 서 계신다.
나는 죄를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신다.

나는 어른의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편에 서 계신다.
나는 부자의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
나는 재물을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신다.
나는 삯꾼 목자의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편에 서 계신다.
나는 직분을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신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생각을 닮아가기를 추구합니다. 주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영혼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시각으로 다른 이들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지 않는 영혼을 바라볼 때 주님의 마음이 느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나서 그것을 찾으려고 고생한 경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급히 외출해야 하는데 잠깐 벗어놓은 시계를 찾을 수 없다든지, 중요한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필요한 서류를 찾지 못해서 곤란했던, 그런 경험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장소가, 마치 우리가 찾고 있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본 곳인 듯한 느낌이 들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곳에서는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꼭 있어야 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무엇을 찾아야 할 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다급해지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언제나 무엇을 찾으십니다. 
쉬지 않고 그분이 지켜야 할 것을 찾고 다닙니다. 사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무엇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마치 거친 들판에 풀어놓은 양떼를 지키는 목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양떼를 지키던 목자가, 무리 중에서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양떼를 지키는 것이 목자의 일이라면, 잃은 양을 찾아오는 것도 목자의 일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목자의 뒤를 따라왔더라면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았을,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기 위해, 목자는 잃은 양이 안전하게 돌아올 때까지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가 그분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때까지, 쉬지 않으십니다. 그 주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십시오. 

첫째,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려는 열심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둘째,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기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셋째,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아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힘들어 하며 방황할 때 그런 나를 주님이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목자라는 말씀입니다. 양들을 살리기 위해 양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양을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누가 억지로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늘의 천사들 열두 영도 더 동원하실 수 있는 능력자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허리에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무엇을 다 이루었습니까?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나를 위해 죽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형제가, 내 친구가, 내 이웃이, 아니 내 부모가 나 때문에 혹시 죽어줬다고 하면 그것도 우리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감격이요 기쁨일 텐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정말 보잘 것 없는 벌레 같은 우리들 위하여 이 땅위에 오셔서 숱한 고난을 당하시고 머리에 가시관, 손발에 못, 옆구리에 창을 찔려 피와 땀과 진액을 다 쏟아 우리의 생명을 대신해서 죽어주시고 우리를 사망가운데 건져 주셨으니 그 은혜,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기의 아들조차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 간구하는 우리들의 간구를 들으실 때 어찌 구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 우리가 약해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 우리가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어서 홀로 눈물지을 때, 우리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 때. 내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에 사로잡혔을 때라 할지라도 결코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코 버려진 것도 아니고 잊혀진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의 형편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 가운데 곤란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 새벽 4시 경에 바다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것은 주께서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지켜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길이 답답하고 힘이 들어도 때로는 낙심하여 넘어질 때가 많아도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깊이 파묻혀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우리들을 위로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들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들을 붙잡아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지혜를 주실 것이요 그 사랑이 우리들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북돋아 주실 것입니다. 

더욱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문제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병상에 누웠을 때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우리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힘들어 할 때도 그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찾아오시고 말씀을 통하여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우리들의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그 주님이 함께 있는 곳에 참 안전이 있고 참 평강이 있습니다. 그곳에 풍요가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 글므로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 오늘도 순종함과 감사함으로 따라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목자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앤드류 보나(Andrew Bonar)박사는 스코틀랜드의 고산지대에서 양이 어떻게 바위틈에 끼어 못나오게 되는가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산지의 풀은 아주 달아서 양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들이 그 풀을 뜯어 먹기 위해 목자 없이 마음대로 10~12피트를 뛰어내리면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올라올 수 없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이 바위틈에 끼거나 절벽 밑에서 올라오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 우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더 이상 서있을 수 없을 만큼 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로프를 자신의 몸에 감고 내려가서 거의 죽음에 처한 양을 건져 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목자들은 양이 처음 빠졌을 때 내려가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그렇게 하면, 양들은 어리석어서 목자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을 다해 절벽으로 내닫다가 죽게 되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스스로 설 수 없는 한 마리 어린양과 같은 존재임을 자신의 삶 속에서 고백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좋으신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알면서도 그 목자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생활하다가 맹수에게 물리기도 하고 웅덩이에 빠지기도 합니다. 
옆의 친구가 짐승들에게 팔, 다리를 찢겨 죽어 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런 것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숙명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방황하는 존재, 그러면서도 자신의 목자가 되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는 불신앙, 그래서 마치 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이 어둠 속에서 자기의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도대체 누구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 줄 것이며, 또 그 사랑이 그의 인생의 불행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받는 모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오직 그 상처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상처와 고통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위해서는 목자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목자를 따라야 합니다. 양은 목자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 방어 수단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때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리양이 늑대들 틈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 선한 목자가 지켜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항상 목자 가까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칫 한 눈을 팔다가 목자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발을 헛디딜 수도 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꼼짝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양은 소리를 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깨어 있어 부르짖는 것이야 말로 목자의 돌보심의 손길이 항상 함께 하는 비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입을 열지 못하고 깨어 있지 못하고 부르짖지도 못하고 목자 가까이 나아오지도 않는 그런 생활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듯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목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려고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주님이 말씀을 하시는데도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잠만 자고 있을 것입니까? 힘들고 지칠수록 더욱 주님 앞에 부르짖어야 하는데도 우리는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내 형편을 보라고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이 우리의 모든 힘의 공급자 되심을 믿으십시오. 주님으로부터 멀찍이 머물면 다가오는 것은 시험이요 도적이요 강도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날마다 더욱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이요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양들이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살아온 사람들의 습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먼저 양은 앞을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종 구렁텅이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거나 장래의 유익을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의 또 다른 특징은 서로가 서로를 쫓아가는 습성입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잘못인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면 그것을 핑계 삼아 자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릇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사는데 뭐”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이익에 급급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기에 빨랐던 사람들의 삶의 태도는 결국 불행을 낳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된 것이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판 대가라고 선언합니다. 행복한 삶을 열망하며 앞도 안 보고 달려왔지만 그 결과는 터진 웅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혹 인생의 목마름으로 허덕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이토록 우리의 삶을 허망하게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거짓 목자에게 속았고, 또 유린당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버림받는 인생을 위하여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인생들을 심판하거나, 처벌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양들에게 참된 생명과 풍성한 삶을 공급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철저히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죄로 인해 상실한 인간들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심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 사이에 새로운 산 길이 되셨습니다. 죄로 잃어버린 인간의 참된 삶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참 행복은 스스로 목숨 버려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거짓되고 속이는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치고 새롭고 산 길이 되신 주님께로 날마다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풍성한 삶이 있기 때문이요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 항상 주님 앞에 깨어 있어 부르짖는 성도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 따르기 위해서 항상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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