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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하나님의 종교개혁 (요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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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교개혁 (요 21:1-7)

 
내 용 

오늘은 495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의 문제를 취급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문제를 사람이 어떻게 개혁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개혁”이라는 말 자체는 본래 우리들 생활 주변에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5천년 동안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주택의 개혁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5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남자의 90퍼센트는 두루마기를 입고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오신 분이 한 분도 안계십니다. 의상 개혁입니다. 지주가 소작인을 많이 두고 농사를 지었는데 그렇지 못하게 바꾸어버렸습니다. 토지개혁입니다. 내각제 하다가 유신헌법으로 바꾸고 다시 민주화로 갔습니다. 정치개혁입니다. “Form”이라고 하는 말은 “다시 만들어진다”라는 말로써 이 세상의 일은 날마다 “Reform”되어져야 합니다. 개혁의 과정을 통해서 인류는 발전해왔고 윤택한 삶을 누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도 개혁이 필요한가? ‘성경에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엇을 개혁하고 무엇을 바꾼단 말인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개혁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우리 인간의 위치를 정해야 말이 됩니다. 성경이 정해주는 인간의 자리가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향하여 대표적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자기 정의를 내린 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하나님 마음에 기뻤느냐 하면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윗도 자기 정의를 내릴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죄인입니다.” 다윗이 자기 정의를 내린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다음으로 훌륭했습니다. 그런데도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도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객관성 있게 표현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말들을 정리하면 “인간의 위치는 불완전한 죄인의 존재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장소는 교회일지라도 얼마든지 잘못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고 그 잘못되어진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을 개혁이라고 우리가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들을 복음서에서 우리가 기억하는데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개혁을 일으키셨는지 그 개혁 때문에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종교 의식의 개혁입니다. 그리고 다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엇이냐고 하면 종교의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세례가 없었습니다. 할례만 받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자기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막 와서 따졌습니다. “안식일에 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면 어때? 안식일의 주인이 나인데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완전히 뒤집어엎는 개혁을 일으키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즐겨 읽는 시편 성경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앉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회에서 가장 죄인이라고 취급하는 그런 사람들과 제일 친하게 돌아다니셨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또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너희 선생은 선지자라고 하면서 왜 저런 죄인들과 다니며 먹느냐?” 예수님은 “먹으면 어때? 내 마음이지?” 완전히 그 당시의 전통적 종교 의식을 다 뒤집어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 아느냐? 완전하게 하러 왔노라. 너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내가 개혁하는 것이다.” 고정화된 관념적 신앙의 파괴가 너무 심하다고 지도자들이 판단을 해서 이런 놈은 살려두면 큰일 나겠다고 십자가에 끌고 가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근거로 해서 판단할 때 신앙은 가졌다고 하는데 제일 나쁜 성격의 신앙이 뭔가? 자기 신앙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겸손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주장은 절대 완전하다.” 교만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성격은 자기를 보호하고 남을 죽이는 절대 자기 위주의 신앙 형태를 가졌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기는 죽고 남은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그 거룩한 진리를 지금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인간이 타락시킬 수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마귀의 세력이 들어온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독일의 루터나 제네바의 칼뱅만 개혁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러분도 저도 가톨릭도 장로교회도 계속해서 교회는 리폼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종교개혁의 이유가 그 당시에 무엇인가를 우리가 한번 종교개혁주일에 살펴봅시다. 교회가 세상 권력과 재물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교회가 명령해서 국회를 소집하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명령을 내리니까 국회가 꼼짝 없이 교회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 합법적인 결정으로 마틴 루터를 죽이라고 교회가 명령해서 한 일입니다. 

이렇게 큰 권력을 가지고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국가를 교회가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주교단에서 명령하는 것을 국가가 절대 순종했습니다. 1500년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어서 정치를 교회 마음대로 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이 될 때는 주교단에서 허락해야만 왕이 되었습니다. 웬만한 유럽의 국가들은 국가재산보다 교회 재산이 더 많았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황청의 권위는 온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 권력이 되었고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절대화 하는 일을 교회가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황 무오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황은 죄가 없다고 교회에서 정한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황 무오설은 성경과 정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때는 교회가 얼마나 권력을 휘둘렀느냐 하면 고난주간에 고기 먹는 사람은 다 사형시켰습니다. “고난주간에 왜 고기를 먹느냐?” 고기를 먹지 말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고기를 먹었으면 볼 것도 없습니다. “너 고난주간에 고기 먹었지?” 죽여 버렸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소박하고 경건하게 살자는 신앙운동은 좋습니다. 우리도 지금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 좀 먹었다고 사람을 죽여 버렸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실 것인가? 이런 절대 권력으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저 여자 이상하다고 마귀가 쓰인 거 같다 합니다.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20만 명의 여자를 죽였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이건 교회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500년 전에 개신교회가 생겼지 않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을 보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프랑스에서만도 7만 명의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교회가 죽였습니다. 중남미 지역에서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마귀라고 생각해서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종교의 진리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을 그렇게 많이 죽여야 되었느냐? 이게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현실입니다. 

현재 로마 교황의 베네딕트 16세는 지난해 이 문제에 대해서 성명 발표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흘러온 역사 속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이 행해졌던 것이 사실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큰 수치감을 가지고 인정하며 이는 분명히 기독교 신앙의 남용이며 기독교의 진정한 성격에 명백히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발표를 했습니다. 베네딕트 직전 교황 고 요한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회의 잘못은 크게 5가지라고 명문화했습니다. 첫째가 갈릴레오 재판입니다. 사실 갈릴레오는 최초의 망원경을 발견해서 태양이 흑점이나 달의 반점을 제일 먼저 증명한 사람이고 우주 천체의 움직임을 발견해서 그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던 과학자입니다.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지구가 왜 움직인다고 말하느냐?” 불경죄로 재판에 회보해서 지동설 포기명령을 받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거 아닙니까? 진리를 덮어버리는 과거를 범했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20만 명의 마녀 사냥을 해서 죄도 없는 여인들을 그렇게 많이 피 흘리게 한 죄와 필요치 않은 십자군 전쟁을 200년 동안이나 교회가 앞장서서 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학살, 개신교 탄압 이렇게 5가지 죄목에 대해서 사과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은 속죄권 판매에서 왔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연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 지옥에 가있는 가족일지라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만들어서 헌금을 거두게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대대적으로 했습니다. 1476년 교황 식스투스 4세 때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다 안하고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당시 마틴 루터는 교회 잘못을 95개 항목으로 적어서 교회에 붙였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오래 전에 갔다 왔습니다. 저는 루터의 무덤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도 이 루터처럼 살 수 없겠나이까?” 눈물 흘리며 감격해서 그 무덤을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루터 한 사람 때문에 국회가 소집되었습니다. “루터를 소환하고 1521년 5월 26일 날 루터의 그의 추종자들을 다 외국으로 추방하라. 그리고 그가 기록한 모든 문서를 불태워버리라.” 그렇게 국회가 결정했습니다. 교회가 명령해서 한 것입니다. 사형당해야 할 운명이 되었지만 진리를 밝히는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서 그가 밝힌 십자가의 진리성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마침내 가톨릭교회도 새로워지고 그 종교 개혁 운동에 의해서 개신교회라고 하는 지금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이런 교회들이 그때부터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생각이 가능합니다. 면죄부 판매라는 것이 내가 세상에서 면죄부를 돈 주고 사면 내가 지정하는 영혼이 지옥에 있던지 연옥에 있던지 구원을 받아서 천국으로 간다는 말에 대해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 봅시다. ‘그때 사람들도 이성과 판단이 있었을 터인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고 돈을 주고 면죄부를 그렇게 많이 샀느냐?’ 그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한번 보시면 넉넉히 이해가 됩니다. 지금은 그 시절보다 확실히 사람들도 이성적으로 더 발달을 했고 공부도 그때보다 훨씬 많이 해서 지식의 향상도 많이 되었고 과학적인 교육을 받아서 미신 같은 것은 모두 추방한 21세기 첨단 과학시대, 첨단 지능 발달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지금 온 세상의 이데올로기는 다 똑같아졌습니다. 합리적인 과학주의로 갑니다. 그런 똑똑한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사이비 종교에 떼로 몰려가 말도 안 되는 비진리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영적으로 세계 모든 교회보다 앞서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단도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얼마 전 장례식을 치룬 통일교 문선명 교주를 보십시오. 그에 대한 통일교 신자들의 신앙 고백이 5대 신문에 모두 성명서로 발표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5가지로 나왔습니다. “그는 구세주이시며 메시야이시며 재림주이시며 참 부모님이요 평화의 왕이시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판단을 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은 심판주로 온 세상에 종말적 사건으로 재림하신다고 했는데 재림하신 주님이 무슨 결혼을 하셔서 그렇게 많은 자녀를 출산하고 그렇게 많은 기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버시고 5조원의 개인 재산을 만들어놓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재림주가 그런 것을 하러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대학교수들, 언론인, 정치인, 기업인, 지식인들 할 것 없이 거기 다 있지 않습니까? 옛날보다 더 합니다. 한 가지 옳은 소리가 이번에 나왔습니다. 문선명의 큰 아들 문현진의 성명 발표는 옳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인간과 다른 수준에 올려놓고 신격화 하지 말라. 우리 아버지는 신격화될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거기서 왕따를 당하는 것입니다. 첨단 과학 문명시대에도 이런 일이 이렇게 장엄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중세기 시절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그래서 교회가 다 부패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잘못 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일어난 행동이 종교개혁입니다. 모든 이단 교주들이 가는 길이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요 예수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언하셨습니다.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리라. 

여기저기 재림 예수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너희를 미혹하리라.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다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언해 놓은 것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분명히 영적 혼란의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혼란 속에서 나중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란 본래의 것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입니다. 오늘 창세기 1장과 요한계시록 마지막으로 성경의 양 끝을 보았는데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너무나 좋아서 하나님 자신이 감격하셨습니다. 

그런데 1장의 그렇게 좋은 세상이 에덴동산이 3장에서 죄악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갑니까? 요한계시록까지 갑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악한 세상이 되어서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느냐? “내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겠다.” 그래서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창세기 1장에서 나옴과 똑같은 새로운 에덴동산을 만들고 거기에서는 너희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줄 것이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 본래 에덴동산의 모습을 내가 회복시켜 주겠다.”라고 성경이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 세계를 향해서 지금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악과 철학을 좋아하면서 법률가가 되려고 명문 대학을 다니던 루터가 어느 날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비를 피하기 위해서 나무 밑으로 피하는 순간 벼락이 그 나무 위에 떨어져서 그 친구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인생의 변화를 일으켜서 ‘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어서 로마서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다가 당시에 잘못 가고 있는 교회 모습을 진리로 재발견해서 종교개혁의 불을 켜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기회가 되었고 이러한 운동은 사회적 공헌으로 연결이 되어서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이 사회악에 대한 투쟁 운동으로 발전해서 사회가 깨끗해졌고 미국에서는 독립운동으로 연결이 되었고 제네바에서는 공화국이 탄생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형편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우리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이 이 세상의 마음을 도적질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 것만 너무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너무 무관심합니다.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교회는 사회악과 싸워야 하는데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교회 안에서 사회악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본질과 비본질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사건건 예수님의 생각과 반대 방향을 사도들이 갖습니다. 섬김의 종이 되라고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으나 제자들은 어떻게 갔습니까? 으뜸이 되려는 노력만 열심히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크냐?” 자리다툼만 했습니다. “예수님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을 것이냐?” 어느 날 초대를 받아서 누구 집에 갔는데 아무도 발을 씻기지 않아서 결국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는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데만 신경을 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교회에서 누가 으뜸이야? 우리 으뜸 되는 일 좀 하자. 그룹 만들어.”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명예 욕구 충족에 마음을 쓰는 비본질적 신앙으로 교회를 어렵게 했는데 중세기 교회 전체가 그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한 신앙인이 진리를 발견하고 “이게 뭐냐? 이 잘못 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내가 불을 켜야 되겠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불을 켠 것이 종교 개혁 운동으로 유럽 전체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495년 전에 일어난 일이 오늘의 이런 교회를 만들게 된 기초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종교개혁주일에 내 영혼을 내가 한번 진단하십시오. 내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비본질적인 곳에 마음을 쓰고 있지 않은가? 내 마음의 개혁을 이루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제자로 변화를 받아서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창세기 1장과 성경 마지막에서 새 하늘과 새 땅 창조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500년 전 일어난 종교운동의 개혁의 불씨를 저희들이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희들 마음을 영혼의 진단을 내려서 ‘나는 지금 훌륭하게 살고 있는 것인가? 어디에다 마음을 쓰고 교회를 다니는가?’ 생각해볼 수 있는 종교개혁주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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