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대하 20:1-4, 12; 눅 18:1-8)

첨부 1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대하 20:1-4, 12; 눅 18:1-8)

5만 번의기도 응답으로 유명한 조지 뮬러 목사님이 초청 받은 한 강연회에서 강연을 끝냈습니다. 그 때 한 신학생이 일어나서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수가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조지 뮬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 그 의자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의자 위에 두 손을 깍지 끼고 앉은 채 잠시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일어나서 “여보게 이게 바로 비결일세. 비결은 이것 밖에 없어!”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이 그렇게 능력 있는 사역을 하시고 수많은 고아들을 양육한 그 원천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바로 늘 무릎 꿇고 기도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능력 있는 신앙의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기도하는 사람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기도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로 사는 사람은 다른 거예요. 우리도 보통 하루 세끼 밥 먹을 때마다 기도합니다.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의 삶이 기도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왜 기도로 살지 못하느냐?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중단하고 마느냐? 그것은 기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에게 한 번 인사하시죠. “기도로 사는 인생이 됩시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루 세 번 식사할 때만 기도하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누가복음 18장 예수님의 말씀은 기도를 중단하는 이들을 향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의 말씀을 자막으로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뭐예요? 항상 기도해야 하는데 항상 기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하다가 중단해서는 안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해서 중단했다는 것입니다. 낙심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왜? 기도해도 빨리 응답이 안 되고 뭔가 이루어지지 않고 답답하고 그러니까 힘들어서 지쳐서 낙심에 빠지고 기도를 포기하는 일들이 속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여기에 대해서 교훈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응답이 안 되면 ‘하나님이 바쁘신데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쓰시겠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무가치한 사람에게 까지 신경 쓰실 수가 있겠어’, ‘아냐 하나님이 너무 바쁘신가봐?’ 스스로 합리화를 삼고 기도를 중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서 오늘 이러한 비유를 주고 계십니다.

이 간단한 비유에는 주인공이 둘이 나옵니다. 과부와 재판관입니다. 자 특별히 이 홀로된 여인, 이 과부된 여인의 삶은 아마 힘들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고아, 과부 이런 비유는 이런 것을 연상하시면 돼요. 굉장히 가난하고 힘도 없고 직장도 없고 누가 도와 줄 사람도 없는 참 그래서 살기 어려운 그런 분들을 표현 할 때 흔히 ‘과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어요. 

아마 예수님의 비유가 실제 어떤 일에 홀로 사는 여인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니면 그 당시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여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그 여인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요. 원수예요. 원수!! 아마 이 원수가 그 여인에게서 자식을 빼앗아 갔는지 아니면 농토를 강탈해 갔는지 모르겠어요. 이 여인은 지금 너무 힘들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해요. 그런데 이 여인은 백도 없고 권력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요. 어디가 호소할 데도 없어요. 그래서 그 여인은 생각을 하다가 우리 도시에 재판관이 있는데 그 재판관이라면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거야? 그래서 그 재판관에게 가서 그 문제를 호소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그 재판관이 공의로운 재판관이고 요즘 말하는 정의로운 재판관이고 인권 재판관이라면 문제가 없어요.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귀를 기울이는 그런 재판관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이 사람이 골치 아픈 사람이에요. 우리 한 번 읽어 보시죠. 2, 3절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아멘!! 

이 재판관이 하필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이예요. 이 건방진 사람이죠. 거기다가 사람을 무시해!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대개 힘없고 백 없는 사람들은 더 무시하는 거예요.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무시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사람을 무시하는 것 이예요. 아마 권력자가 오면 재판관이 그러지 못했겠죠. 돈 많은 사람이 왔다면 무시하지 못했겠죠. 

그런데 이 사람은 일반적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었다는 것 이예요. 그러니까 이런 재판관이 힘없는 여인의 호소에 귀나 기울이겠어요? 신경이나 쓰겠어요? 아마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다음 재판이 바쁘다고 아마 만나주지도 않았을 거예요. 호소에 외면해 버렸을 거예요. 아마 뭐 가끔 이렇게 개그 콘서트에 보면 ‘저거 치워’ 그러듯이 말 이예요. 사람을 물질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어요. 

자 이 여인은 몇 번이나 거절을 당했어요. 만날 수도 없어요. 그러나 이 여인은 다른 방법이 없어요. 자기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이라곤 재판장이 풀어주는 것 밖에 없으니까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밤낮으로 가서 재판관의 집 앞에 가서 부르짖고 그는 소리칩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도 견디다 견디다 못해 결국은 항복해 버립니다. ‘아이고 내가 빨리 저 여자의 문제를 해결해줘야지. 내가 잠을 못 자겠다. 아침저녁으로 찾아오니까 지겨워서 못 살겠어. 내가 정신병에 걸리겠어!’ 그러면서 이 못된 재판관이 결국은 이 여인의 집요한 호소 앞에 항복을 하고 그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하는 그런 예수님의 비유에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까? 우리에게 기도의 동기를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 왜냐하면 많은 분들이 기도하다가 응답 안 되니까 그만 둬 버리거든요. 새벽 기도 나오다가 어떤 때 열심히 기도하다가 ‘에이 응답도 안 되고 피곤해 죽겠고 졸음만 오고 에이 그만둬야겠다. 집에서 기도하지’ 그래 집에서 기도하다가는 안 되거든요. 

어떤 분은 한 달 일 년 씩 기도하다가 포기하는 분들도 있어요. 기도 자체를 중단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저 현실적인 기도만을 할 뿐입니다. 참 안타깝죠. 오늘 여기까지 주신 말씀이라면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해주시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세상에 어떤 것도 정말 강렬한 열정을 가지고 원하고 청원하고 조르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요. 종종 아이들도 장난감을 갖고 싶으면 엄마를 계속 조르잖아요. 시장 갈 때마다 장난감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저것을 사고 싶다고 조르고 치마를 붙들고 엄마가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사주는 경우도 있지요. 아마 이런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재판관과 하나님을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겠느냐?! 이 여인이 조르니까 이 재판관은 결국 손을 들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하나님도 우리가 그냥 조르고 바지 가랑이를 잡아당기고 애쓰면 하나님도 결국 우리에게 항복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그런데 이 비유의 의미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재판관과 하나님을 동등한 선에서 볼 수는 없어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나님은 재판관과 같지 않으신 분이다. 재판관은 불의한 자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이지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우리의 세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다. 이 재판관은 건방져요. 웬만한 사람의 말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듣지도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시편 34편 8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너희는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103편 8절에 보니까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결코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소원을 갖고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미한 소리도 들으시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이 불쌍한 과부와 성도들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아이 이 과부도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고 백도 없고 우리 성도들도 가진 것도 없고 백도 없고 그러니까 가서 조르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분 그런데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오늘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의도는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너희는 과부와 같다? 같지 않다? 뭐가 정답 이예요? 성가대? 같다? 같지 않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뭐래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누구예요? 하나님의 자녀들이예요.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녀들의 원한을 조속한 시간 내에 풀어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얘기예요? 이렇게 백도 없고 힘도 없는 과부된 여인도 못된 재판관 앞에 가서 하도 조르니까 결국은 재판관도 해결해 주었는데 너희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이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가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어찌 너희에게 응답하시지 않겠느냐? 그 얘기예요.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세상의 못 된 아버지도 아들이 계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하물며 선하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 불의한 재판장과 다른 분이에요. 또 여기 과부와 성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의 기도를 듣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이기 때문에. 여러분 대통령이 국사에 바빠서 누구든지 만날 수 없어요. 대통령을 만나려면 쉽지 않고 또 보통 사람은 만나 주지도 않을 거예요. 또 만날 수도 없지요. 어떻게 다 만나고 대통령이 언제 일하겠어요. 언제 잠자구요. 그러나 대통령이 아무리 바빠도 대통령 아들이 가면 만나줘요? 안 만나줘요? 만나주지요. 우선적으로 만나 주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귀담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나는 너희에게 응답할 선한 하나님이다. 너희는 나의 택한 자녀들이고 너희는 낙심하지 말고 내게 기도하면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응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한 가난한 과부의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고 계십니다. 

자 그런가 하면 우리가 역대하 20장에 또 하나의 사건을 읽었습니다. 그 개요를 설명하자면 그래요. 남왕국 유다를 통치하는 여호사밧이라는 훌륭한 왕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이 모압과 암몬, 마온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가지고 갑자기 이 남왕국 유다를 공격해 왔어요. 이 왕도 당황했죠. 이스라엘은 그만한 국방력이 준비 되지 않았어요. 큰일 났어요. 싸우면 지는 거예요. 왕도 당황했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렸어요. 

성경에 보니까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더라.”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어.’ 하고 성전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이 놀라운 거예요.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우리도 같이 기도합시다. 금식을 선포하고 온 백성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럴 때 하나님이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거예요. 또한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누구도 감히 우리 하나님을 맞설 자가 없나이다.” 

그렇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누가 감히 어느 나라가 우리 하나님을 맞서 싸울 자가 있느냐? 그러니까 내가 기도하는 대상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그는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하는 거예요. 또 그는 역대하 20장에 보면 우리 조상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봉헌식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기근을 당할 때 전쟁 때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래서 여호사밧은 그 약속을 믿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근거는 약속 이예요.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어요. 너희가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면 내가 눈을 들어 너희를 볼 것이고, 너희의 기도에 응답할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사밧은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역대하 20장 12절 말씀 우리 한번 자막으로 볼까요? 

역대하 20장 12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아멘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겁니다. 우리에겐 저들을 대적할 능력이 없어요. 우리는 무능하다는 거예요. 무능하다. 이게 여호사밧 왕의 고백 이예요. 

저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또 어떻게 할 줄도 모르겠어요. 그 무지한 거예요.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오직 우리는 주만 바라보나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어찌보면 우리는 여호사밧 왕 같아요. 우리는 이 불쌍한 과부 같아요. 우리는 능력도 없고, 방법도 모르고, 길도 몰라요. 그 어떻게 해야 돼요? 오직 주님만 바라봐야 되요. 우리 옆에 분들과 인사합시다. “오직 주님만 바라봅시다.” 시작. “오직 주님만 바라봅시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건 뭘 의미해요? 주님만 의지한다는 거예요. 주님께만 기도한다는 거예요. 주님께만 소망을 두는 거예요. 그게 오직 주만 바라보는거예요. 여호사밧 왕은 위대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들을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제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때, 온 백성이 그렇게 기도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때 레위인 중에 야하시엘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어요. 그리고 야하시엘에게 말씀하세요. 너희는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는 반드시 전쟁에 이길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신뢰하라. 너희가 견고히 설 것이다. 

너희는 이 예언자를 신뢰하라. 너희가 형통할 것이다. 이게 뭔 얘기예요?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했으면 하나님만 의지하면 실패하지 않는단 얘기예요. 또 야하시엘이라는 선지자를 너희들이 신뢰해라. 그러면 너희가 형통할 것이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선포했어요. 하나님의 방법은 뭐예요?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곧 나에게 속한 것이다. 너희가 내일 이맘때쯤 성가대원들 다 복장을 입히고 전쟁터에 나가서 모압 암몬 연합군을 앞에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라. 그러면 천사들이 와서 그들을 쳐서 우리가 이기게 할 것이다. 결국 그대로 순종했어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찬양하고 나갔더니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와서 이 악한 대적들을 다 무찔렀어요.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서 그들이 남겨둔 전쟁의 노획물, 탈취물만 걷어도 어마어마한 수입을 거두게 되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사건은 각기 다른 얘기, 한 얘기는 아주 가난한 과부 얘기, 한 얘기는 위대한 왕의 얘기예요. 그러나 둘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함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거예요. 왕이나 가난한 여인이나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어요. 이 여인에게도 억울함을 풀 방법이 없어. 힘이 없어. 왕에게도 대적을 물리칠 힘이 없어. 그러나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왔더니 문제가 해결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걸 얘기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하나님이나 왕이나 가난한 여인이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우리는 한사람도 기도 안 해도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우리에겐 다 기도가 필요한 거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또,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한 나라의 왕의 기도이든, 가난한 여인의 기도이든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동일하게 응답하시고 귀담아 들으신다는 겁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기도의 제목. 한 나라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고, 한 여인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그 문제가 크고 작고 아무상관 없어요. 왜?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여러분 이 전능하신 하나님, 이 좋으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종종 그런 얘기 드리지요? 어떤 사람이 심각한 병이 났어요. 암도 뭐 보통 암이 아니예요. 그래서 어떤 좋은 병원에 가서 최고의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게 됐는데 그 병원에는 수술할 수 있는 딱 두 사람의 의사가 있어요. 한 사람은 아주 실력 있는, 실력이 짱짱하고 빵빵해요. 아주 그냥. 10명 수술하면 10명 다 고쳐 그 사람은. 근데 이 사람은 성격이 아주 못돼먹었어. 그냥. 환자들 오면 말도 막하고 반말하고 막 기분 나쁘게 하고 무시하고 이런 의사예요. 그러나 실력은 아주 빵빵해. 

그런데 또 한사람의 의사는 실력은 조금 못해. 한 10명 수술하면 한 3명은 죽어 그냥. 그러나 그렇게 착해 그냥. 부처 모습 같애 그냥 그렇게 착하고 남의 말 잘 듣고 환자들 오면 위로해주고 껴안아 주고 안부도 묻고 아주 이웃집 아저씨 같애. 자 두 명의 의사가 있으면 여러분들은 만약 그런 심각한 문제에 실력 있는 의사를 택합니까, 마음씨 좋은 의사를 택합니까? 물어 볼 것도 없지요. 이왕이면 까짓거 기분 좀 나빠도 실력 있는 의사한테 수술 받아야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근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예요? 하나님은 실력도 짱짱하시고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인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분 앞에 우리가 왜 기도를 중단하느냐는 말이예요. 많은 분들이 기도하다가 중단해 버렸어요. 이제 다시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계셔요. 어떤 분들은 하나님 왜 빨리 내 기도에 응답 하지 않냐고, 답답하다고.

제가 하나 말씀드릴게요. 어떤 부모하고 아이가 수영을 바다에서 하다가 애가 빠졌어요. 근데 부모는 수영을 못해요. 그 옆에 청년이 아주 수영을 잘하는 청년이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근데 애가 막 빠져서 꼴깍 꼴깍 죽어가는 데도 뛰어 들어가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어. 아 부모가 속이 죽겠어. 빨리 좀 들어가 구해줘야지 말이야. 근데 이 청년은 안 들어가요. 그러다가 물속에 꼬빡고빡 들어가서 사지가 쫙 펴지니까 그때 기어들어가서 끄집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끄집어내고 이제 인공호흡으로 살려냈어요. 아니 답답해서 아니 좀 펄떡펄떡 할 때 좀 살려내지 왜 이렇게 죽어서야 건져내냐고. “아주머니 모르는 소리 하지마세요. 살아있을 때 들어갔다간요 나도 같이 죽어요.” 그래서 힘 다 빠지면 그때 가서 끄집어 낸다는거예요. 

어찌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셔요. 아직도 우리 목에 기브스가 들어가 있거든. 아직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거든 우리가 힘 다 빼고 정말 주님만 온전히 바라볼 때 주여 나는 무능하고 무지합니다. 주님 외에는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분이 없습니다. 주님께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건져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빨리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은 때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기도 안하고 산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에요. 기도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기도 안하면서 잘 살고 있는 것이 기적이라니까요. 왜? 요즘 경제 지표를 보면 계속 바닥을 치지 않습니까? 요즘 사업하는 분들을 보면 다 그럽니다. 이 98년 금융위기 때 보다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요즘 보통 어려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영업자들이 부도나는 것이 부지기수예요. 어려운 때에요. 또 신문에 보니까 대학생 10명중의 1명은 도박 중독에 빠져 있대요. 취직도 힘들고 공부도 힘드니까 도박이나 해서 돈이나 벌어보자. 그래서 등록금 다 날려 버리고 등록도 못한 청년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예요. 도박 중독에 쉽게 버는 법, 세상이 어려우니까 쉽게 버는 법에 자꾸 유혹을 받는 다는 거예요. 또 그것만이 아니예요. 지난 주간도 보니까 부산에서 여학생 3명이 동반 자살을 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사이트에 ‘함께 갑시다.’하면 동반 자살을 하자는 권유라는 거예요. 참 젊고 피어나는 여학생들이 왜 그렇게 스스로 생명을 끊을까요? 세상이 그만큼 악하고 낙심하기 쉽고 절망이 찾아오기 쉽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어려울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세상의 파수꾼 된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누가 이 사회에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기도할 때예요. 여러분 가정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지금 기도해야 해요. 젊은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해요. 여러분 잠자는 자리에서 우리는 일어나야 해요. 주님은 말씀하세요.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새벽에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세요. 

시편 62편 8절에 보니까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랬어요. 

이사야 55장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기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너희가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너희의 죄를 사하고 너희의 땅을 고칠지라.” 너희의 상처를 내가 싸매어 주고 너희의 문제를 내가 치료할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나와 함께 대화하자. 나와 함께 교제하자. 너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라. 너의 억울함을 가지고 나와 내게 호소하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셔서 새벽을 깨우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간구하는 그리고 응답의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