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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을 지킬 수 없었을 때 (롬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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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킬 수 없었을 때 (롬 5:5-8)


왜?
우리의 삶에 참 혼란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맺은 언약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불순한 동기로 맺은 언약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서약을 깨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약할 때 가졌던 기대가 깨어졌기 때문에, 내가 가졌던 기대만큼 만족을 주지 못할 때이지 않습니까?
사실 서약이라는 것이 참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수없이 약속하고, 계약하고, 서원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남편과의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남편 때문에 당하는 경제적 고통이 너무 크기에. 너무 착한 남편이 보증을 선 것 때문에 명퇴하며 받은 돈이 빚을 갚는데 다 들어가고, 이제는 같이 사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게 생각되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90이 넘은 친정 노모를 모시는 일로 남편과 의논을 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쉽게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야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혼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졌다고요. 너무나 착한 남편이라고요.

또 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를 잘 정리하고 살아야 할 때, 남편이 사업에 실패를 했습니다. 아니 동업자가 도망을 가는 바람에 수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재산을 조금씩 쓰면서 말년에 대한 두려움도 생기고, 남편이 원망스럽고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결혼할 때 예수 믿기로 한 남편할 같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니 결혼을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어려워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는군요.
“당신은 이 어려운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도 하지만 나는 누구한테도 하소연할 수가 없어. 적어도 권사인 당신은 나를 받아줄 줄 알았고, 나를 위로해 줄줄 알았어.”
그 순간 그 권사님의 마음이 너무 아팠답니다. 너무 힘들었을 남편을 생각하니 매우 미안하고 말입니다. 
결국, 당신이 삶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깨어질 언약의 조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한 분의 이야기를 더 나눠볼까요?
이분은 독특하게 집에서 닭을 키우는데 아마도 먹으려고 키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닭이 너무 멋지게 생겨서 자랑인 분이죠. 그런데 이 닭이 새벽 3시 반만 되면 여지없이 우는데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놈의 닭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것, 
남편이 그렇게 좋아하는 닭이 미워져서 새벽에 남편하고 싸웠답니다. 남편이 키우는 닭이 너무 밉고, 닭을 키우는 남편이 닭띠인데, 두 닭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너무 고달프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 싸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이 성령님과 멀어져 있었고 매사가 불만족스러워져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음 후에 다시 닭을 생각하니 잘 생겼고, 닭소리에 잠도 깨지 않고 너무나 평안하게 잠을 잔다고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삶에서 깨어진 관계와 서약을 지키지 못하는 문제란, 대부분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때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죠?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준다면, 그 사람이 신실하다면 서약이 깨어질 수 없다는 것이죠. 또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아주 큰 도전을 줍니다. 

본문 5절 말씀이 “소망”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소망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보면 절대로 언약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경건함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니 죄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언약은 우리가 경건할 때만 지켜진 것이 아니라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언약 말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임을 전가하기로 작정하는 순간 보아야 할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책임 전가”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회피하려는 태도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 먹고 말씀을 거역한 아담을 하나님께서 질책하자 그가 궁색하게 답변하지요.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죄의 특징은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가 하나님께 있고 하와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여인을 주시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와를 허락하신 선한 동기를 다 잊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주 재미있는 책을 읽었습니다. 허태균 씨가 쓴 [가끔은 제정신]에 나오는 글인데, 사람들은 절대로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저자의 아내와 둘째 아들 순영이의 대화입니다. 성적표를 받아 온 날.
아내는 성적표를 보자마자 물어본다.
“너희 반 1등은 누구니? 몇 점이니?”
순영이보다 평소에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몇 점인지도 물어본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순영의 대답은 한결같다.
“우리 반 꼴등이 요번에 아무개야” “누구는 수학에서 40점 받았대” “이번 시험이 모두 이상하데, 문제가 거지 같아.”
아내와 순영이가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은 ‘사오정 놀이’처럼 엉뚱하지만, 인간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자신을 돋보이려고 누군가의 단점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잘못의 동기를 상대방에게서 찾아야 위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인간 최초의 살인도 같은 동기에서부터 찾아온 것이죠.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었던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물만 받으시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거부당하자 그 원인을 아벨에게서 찾습니다. 마치 아벨의 제물 때문에 자신의 제물이 거부당한 것처럼. 순간 가인에게서 분노가 시작됩니다. 관계가 깨어집니다. 급기야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어떤 깨어진 관계도 바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결혼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결혼의 문제는 서약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 그러한 결과로 너무 쉽게 서약을 저버린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결혼예식’이 아니라 ‘결혼 예배’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회복의 하나님을 붙들라]에서 아주 중요한 구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서약은 조건을 내포하고 있는 약속과 다르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에서 만나 커피 마시자!”라고 말한 다음 도중에 자동차 사고가 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럴 때 상대방이 나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다니 넌 믿을 사람이 못 돼!”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사실 스타벅스에서 만나자는 그 말은 “아프거나 급한 일이 없으면 스타벅스에서 만나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조건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서약이란 더 엄격한 수준의 약속으로써 맹세와 동등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서약이나 맹세를 매우 엄격하게 받아들이신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전도서 5:4-6)

결혼 서약은 모든 서약과 맹세 중 가장 신성한 것이다. 그 서약을 파기할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에게 헌신하기로 약속할 때 두 사람은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어길 수 없음을 서로 확인한다.
결혼 생활에 어려움이 생긴다 해도 그 서약은 절대 무효화될 수 없다.
서약을 저버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분은 우리가 약속한 일에 관해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신실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조건이 아닌 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신실하셨습니다.
신실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향한 소망을 놓지 않으셨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신기하지요? 사랑하는 한 소망을 놓을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가정과 결혼 생활에서 서약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상황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이유에서든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나 깨어진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서약한 것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언약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있다!
누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하며 결혼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결혼을 하는 목적이 어떤 조건에 의해 시작될 때 혹은, 아주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할 때, 하나님 없는 결혼을 경험하게 되지요.

간혹 죄책감이 없는 성관계를 위해 결혼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간혹 결혼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동기도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는 것인데, 이 언약 자체가 이미 진리를 벗어난 경우가 있죠. 잘못된 동기는 잘못된 결과를 낳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나눈 '어쩔 수 없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아주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자의적인 결정이 있습니다.

언약과 연결된 불행한 사건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일어납니다. 
신명기 7장 1-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국경 내의 어떤 민족과도 언약을 맺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언약으로 올무가 될까 염려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호수아 9장에 보면, 어느 날 한 무리의 유목민들이 여호수아를 찾아옵니다. 신분을 속이고 화친 조약을 맺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하나님께 뜻을 물었던 여호수아가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했다.”(수 9: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그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 그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순간에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속았기 때문에 이 약속은 무효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부분에 대하여 서약을 깨기보다는 어리석은 결과를 감당하기로 합니다. 분명히 이들과 맺은 언약이 올바른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결과를 인도하셨습니다.

첫째는, 싸움과 죽음을 피하려고 거짓으로 찾아와 화친을 맺은 기브온 족속을 멸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옆구리에 박힌 가시와 같은 존재였지만, 느헤미야 7장에 근거해 보면 수 백 년 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성전에서 일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던 것을 봅니다. 

둘째는, 이들과 화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도시국가의 왕들이 연합하여 기브온을 공격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어쩔 수 없이 전쟁에 개입해야 했지만, 성경의 아주 놀라운 기적을 접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연합군을 완전히 쳐서 멸할 때까지 해와 달이 하늘에 멈추어 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0장 1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놀라운 기적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속아서 한 언약이라고,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고 파기했더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기적과 축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언약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안다면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 “우리의 말이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하지요.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다윗은 시편 15편 1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해로울지라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을 지키는 자”라고 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기로 작정하시므로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사랑의 확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어떻게 그 언약이 지켜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차원이 다르죠.

본문 7절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We can understand someone dying for a person worth dying for, and we can understand how 
someone good and noble could inspire us to selfless sacrifice."

그래요!
그 사람이 정말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을 위해 죽거나 희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지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니 먼저 언약을 깨뜨린 그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우리가 희생을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랑이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신 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게 가치 있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언약을 깨고 제 갈 길로 간 우리를 위하여, 누가 봐도 소망이 없을 것 같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언약을 깨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5월 찬양사역자 최덕신 씨의 콘서트에 간 적이 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십자가 은혜를 경험하고 정말 주옥같은 찬양을 작곡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가정이 깨어지고,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어려운 시간을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울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버려진 그를 “신뢰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나를 신뢰해도, 사람들이 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 .”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의 말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콘서트에서 있었던 솔직히 고백을 할까요?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습니다.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함께한 멤버들을 소개하는데, 정말 노래 잘하는 코러스 중의 하나가 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소개된 사람이 그의 아내입니다. 
최덕신 씨의 전 부인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가이가 엄마를 많이 닮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젊은 여인 때문에 가정이 깨어졌다는 소문들. 
분명히 이해가 되지만, 그의 고백을 들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분을 쓰실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부르신 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를 일으켜 세우시는 때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때인데 말입니다 .

이 말씀을 준비하던 때, 제가 페이스북에 계속해서 삶의 원칙을 묵상글로 쓰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중의 "삶을 사는 네 번째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묻더군요. 이 이야기가 계속될 거냐고.
예! 제 삶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주신 누군가의 인생이 풍성해지도록 계속하려 합니다.
제 삶에 네 번째 원칙은 "늦은 때란 없다!"라는 것입니다.

요즘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생각하는 숙제를 내줬습니다. 알고도 이기지 못하는 죄가 있는지, 말씀 앞에서 죄라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
말씀을 나누는 동안 많은 사람이 울더군요. 생각지도 못했던 죄 때문에. 
잠시 나눔을 멈추고 제가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죄에 대하여 나누는 것은 죄책감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난 죄에 대하여 자유함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죄를 드러내세요! 하지만 죄 가운데 머물지는 마세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은 과거의 상처를 부여잡고 후회하는 사람, 또 다른 사람은 과거의 상처를 멋진 흔적으로 만들어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 늘 후회할 일이 많았습니다.
"조금 만 더 일찍."이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는 달라지는 것이 없더군요.
우리 인생에서 달라지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어보셨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니 후회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더라고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누군가 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후회스럽지 않나요?"
아마 엉뚱한 대답을 할 것 같아요.
"아니요, 살아갈 날이 기대가 되네요."
우리 인생의 퍼즐이 다 맞춰지기까지 끝나지 않은 인생, 결국 과거의 모든 조각이 합쳐져 만들어가고 있다면, 지금 한 조각의 퍼즐이 인생의 그림을 바꿔 놓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시간이 후회하는 시간이 아니라 기대하는 시간으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를 잊고 있었을 뿐이지.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신이 고달플 때가 많지 않나요?
혹시 깨어진 관계 속에서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절대로 용납할 수도 용서할 수 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용서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잘못을 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용서받을 필요성도 자각하지 못하는데 용서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을 통해 내가 용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내가 용서하는 순간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가 생기는 것이죠. 이제 그 다리를 통해 건널 기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족 간에 성도들 간에 우리 민족의 깨어진 관계로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이 고통스러운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것 같지만,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심각한 이야기를 결론 내려보려고 합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 목사였던 제임스 프레이저는 악처를 두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저녁에 귀가를 하면 그의 아내가 있는 방을 피해 곧장 서재로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의 악담을 고스란히 듣고 저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죠. 또한, 램프 기름과 석탄을 관리한 아내가 그에게 불을 밝히고 몸을 덥힐 수 있는 기름을 주지 않아 그는 깜깜한 서재에서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손을 앞으로 쭉 뻗고 깜깜한 서재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곤 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밤에 그가 얼마나 벽을 쳐댔는지 벽 한쪽이 움푹 패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목사들이 자기 아내 자랑을 하면 그는 “내 아내는 자네 아내들보다 내게 훨씬 더 잘한다네,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거든. 그것은 아무 아내나 하는 일이 아니잖아!”
프레이저는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현명하게 감당했습니다. 올바로 반응한다면 어떤 어려움이든 유익함이 있다는 교훈을 깨달았죠.

시편 50편 14-15절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오늘 예배를 마치고 기회가 된다면 함께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네요.
“Fireproof"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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