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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 (왕하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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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 (왕하 2:1-15)

역사歷史(history)는 인류사회에 시간과 공간에 일어난 사건과 변천의 과정 또는 그것에 대한 일체의 기록을 말합니다. 역사상歷史上(historical)이라고 할 때는 역사에 나타나 있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적歷史的(historic)이라고 할 때는 역사나 역사상의 정의와는 사뭇 다르게 인류사회에 기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일체의 사건 가운데 상당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을 역사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은 각자의 견해와 시대마다 나타나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함수 관계에 따라 통일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사관史觀의 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관의 차이 때문에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들끼리 논쟁이 불가피하게 되고 집단과 나아가 국가 간의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의 실패한 역사에 대해 비겁하게도 역사를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로 역사의 가치를 차별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정사와 야사의 정확한 구분은 정사는 관찬官撰이고 야사는 사찬私撰으로 구분지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역사책만이 정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야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정사는 야사에 비해 월등한 객관적 가치가 부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사가 정사보다 훨씬 더 정확한 역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러한 사관의 차이 때문에 역사신학 가운데 역사사관歷史史觀 학과를 만드는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도 사관의 차이는 민감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의 역사주권은 불행하게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세속적 힘의 균형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되는 참혹한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사건은 인간 사회에 일어난 시간과 공간의 일체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은 성경만이 그 해석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성경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들의 세속적 사관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진실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가질 수 없는 역사에 대한 매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하는 무대에서 찬란한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의미 있는 한 역사적 사건을 순례하게 됩니다.

Ⅰ. 승천을 앞 둔 엘리야의 역사입니다.

본문 2장 1절에 『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라고 한 말씀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예측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1) 엘리야의 전부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열왕기상 17장 2절에 『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길르앗의 디셉 사람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일찌기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으리라고 예언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을 때 여호와께서 까마귀로 하여금 조석으로 식물을 물어다 먹게 했습니다(왕상 17:1-7).

사르밧 과부 집에 유숙하는 중에 한 줌의 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여러 날 먹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고 그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왕상 17:8-24; 눅 4:26).

2) 엘리야의 전부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인한 응답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7-38절에 『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고 했습니다.

아합왕 때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불로 응답하시므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때 거짓 선지자들을 하나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기손 시냇가로 끌고 내려가서 모두 다 죽였습니다(왕상 18:40).

3) 엘리야의 전부는 하나님께서 명한 사명 수행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9절에 『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3절에 『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선봉장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야 모세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등불 사무엘을 부르실 때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했습니다(삼상 3:10).

얼마 후 살기등등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자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천사가 주고 간 숯불의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먹고 다시 누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그 식물에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호렙산 굴에 도착했습니다(왕상 19:1-8).

지진과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아니하시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왕상 19:12). 그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굴 어귀에 서 있을 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소리가 들렸습니다(왕상 19:13).

그 소리는 다멕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합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왕상 19:15-16).

실로 엘리야에게는 즐풍목우(櫛風沐雨)라는 말이 해당됩니다. 이 말은 옛날 우宇나라 임금이 강물과 하천을 소통시키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온 몸을 다 바쳤다는 말로 장단지에는 살점이 안보이고 정강이에는 털이 다 빠지고 바람으로 머리 빗고 빗물로 목욕한 것을 말합니다.


Ⅱ. 자신에게 닥쳐온 임박한 시간적 한계를 하나님 의 말씀에 의지하여 대처하는 엘리야입니다.

본문 2장 1절에 『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뿐만 아니라 엘리사와 선지자 생도들도 이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1) 처음부터 신의에 기초한 승계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6절에 『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엘리사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사는 요단 계곡 아벨므홀라 출신인 잇사갈 지파 사밧의 아들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9-20절에 『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로 하여금 그 후계자가 되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 그의 자의에 맡겼습니다. 여기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라는 말씀은 그가 엘리사로 하여금 그의 제자가 되도록 강요한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소 한겨리를 잡고 백성들과 연회를 베푼 뒤에 엘리야를 따라 나섰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님을 따른 데서 취한 행동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눅 5:27-29).

2) 후계자 엘리사를 연단시키는 엘리야입니다.

(1) 엘리야는 엘리사를 벧엘로 데려갔습니다.
본문 2장 2절에 『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라고 했습니다.

(2) 엘리야는 엘리사를 여리고로 데려갔습니다.
본문 2장 4절에 『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라고 했습니다.

(3) 엘리야는 엘리사를 요단으로 데려갔습니다.
본문 2장 6절에 『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하므로 엘리사로 하여금 동행을 포기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세 번씩이나 이렇게 한 것은 엘리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한편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야가 승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본문 2장 3절, 5절에 『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라고 했을 때 엘리사가 『 나도 아노니 잠잠하라 』고 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 오십 명은 멀리 서서 두 사람이 요단강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왕하 2:7).


Ⅲ.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잇는 엘리야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본문 2장 8절에 『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고 했습니다.

1)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엘리야에게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왕상 19:16).

엘리야는 밭을 가는 엘리사에게 찾아가서 겉옷을 그 위에 던진 일이 있습니다(왕상 19:19).
이것은 선지자직의 승계를 알리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2) 물이 갈라지는 것은 선지자직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나무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용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출 14:16, 21).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능력이 모세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엘리야의 겉옷 또한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하여 능력을 발하시니 요단강물이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단강물이 갈라지는 기적이 엘리야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62편 11절에 『 하나님이 한두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3) 엘리사가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은 스승의 뒤를 잇겠다는 결의에 찬 요구입니다.
본문 2장 9절에 『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 영감이 갑절 』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당신이 받은 영력 안에서 갑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직계 제자(맏아들에게는 갑절의 유산을 줌) 곧 후계자의 분깃을 청구한 것입니다.

여기 『 갑절 』은 양적 갑절이 아니라 엘리야의 후계자로서의 필요한 영력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의 두 배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종으로서 이러한 요구는 주인 앞에 겸손하지 못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4) 선지자적 승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장 10절에 『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말씀에 따라 소로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에게 겉옷을 던졌던 일이 있습니다(왕상 19:19). 엘리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자신의 후계자 임면권任免權이 엘리야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엘리사에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5) 선지자직의 승계는 내적증거에서 외적증거로 확정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장 10절에 『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적이 엘리사의 선지자적 직분을 계승하는 외적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승천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의 요청이 성취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선지자적 직분의 계승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1)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본문 2장 11절에 『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고 했습니다.

(2) 엘리야의 업적과 위상을 추앙推仰(높이 받들어 사모함)하는 엘리사의 고백입니다.
본문 2장 12절에 『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3) 엘리야와 이별하는 슬픔이 극에 달하여 옷을 찢는 절규입니다.
본문 2장 12절에 『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라고 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극에 달하는 슬픔의 표현입니다(왕하 5:7; 수 7:6; 레 10:6; 창 37:29; 민 14:6; 삿 11:35; 삼하 15:32; 에 4:1; 단 9:3; 왕하 5:7; 왕하 6:30; 11:14; 18;37; 19:1; 욥 1:20; 2:12). 또한 재를 뒤집어쓰는 것(욥 2:8), 얼굴과 가슴을 치는 것(눅 18:13),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베어 버리는 것(렘 7:29)등이 있습니다. .
옷을 찢는 것은 회개와 겸손의 의미도 있습니다(왕상 21:27; 왕하 22:11; 요일 2:13). 그 외에도 충격을 받을 때(사 36:22)도 옷을 찢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스승에 대한 지난날의 업적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그 사다리를 없애버리는 것과 같은 시대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상을 자신의 공로로 그 개연성蓋然性(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과거의 업적과 위상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과거의 업적과 위상을 타락한 현재의 잣대로 재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과거의 업적을 인정도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옛것을 익히고 미루어 새것을 앎)이니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에 의지하여 새것을 앎)이니 하는 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간의 한계 상황 앞에 물러나는 과거에 대해 옷을 찢는 놈이 없는 시대입니다. 찢는 놈을 들을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4)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칠 때 나타나는 스승의 권능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본문 2장 14절에 『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고 했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지위이자 신분이며 위상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를 향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갈 3:27).
엘리야의 겉옷에 무슨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권능이 겉옷이라고 하는 매체를 통해 엘리사에게 동일하게 계승된 것입니다.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직입니다.

엘리야의 겉옷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7장 24절에 『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준 사명입니다.

(5) 선지자의 생도들의 영접입니다.
본문 2장 15절에 『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내려와서 엘리사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했습니다(왕하 13:14).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을 슬퍼하며 한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김좌진 장군의 모친이 자기 손자 김두한을 가리켜 "아비의 정신을 이어가지 못하면 대를 이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아무리 겉옷을 가지고 돌아다녀도 승계에 대한 증거가 없으면 그 계승은 허위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엘리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인구 5,000만(2012. 6.23. AM 6시30분), GNP 2만불 시대입니다. 세계인구 70억 4천만의 0.7%가 됩니다.
엘리야는 가도 가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신적사명입니다.
엘리야는 가도 가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승계 받은 엘리사에게는 외적 표징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에 반고소 고려파의 적자들입니까? 그렇다고 하면 이 명분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이 명분을 가지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통괄 고려파 시대의 찬란했던 거룩함과 의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요단강을 가르는 기적이 무엇입니까? 고려파의 이름으로 부흥되는 각자의 목장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 우성의 적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멀어져 가는 마침내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실 때 "우리의 아버지여 우리의 병거와 마병이여"하면서 옷을 찢는 절규가 있어야 합니다.

스승을 인정하는 교공영찬(敎功永燦)을 고백하는 표징, 헤어짐을 슬퍼하며 옷을 찢는 표징, 교회를 부흥시키는 표징, 선교운동, 고려신학교 운동의 표징, 이러한 표징이 오늘날 고려파의 적자된 공개된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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