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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차 복종하라’의 두 번째 의미(2)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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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차 복종하라’의 두 번째 의미(2)  (엡 6:1-4)


우리나라 말에 ‘농사 중에 자식 농사가 가장 어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가 성장하면 할수록 옛 어른들이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됩니다.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기도 쉽지 않지만 자녀를 사람답게 키운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보다 커갈수록 바르게 양육하기가 더욱 힘이 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은 잘 감당했지만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는 실패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자녀들로 인해 큰 아픔들을 겪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도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실패한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 하실 만큼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형제간의 권력 다툼으로 서로를 죽였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맨 발로 도망을 치는 수모를 겪습니다.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문제는 모든 부모들이 풀어가야 할 무거운 숙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자녀를 양육할 때 두 가지를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아비들이 너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나님은 부모인 우리를 향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된 입장에서 보면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 분노를 품을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십대들의 쪽지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간행물이 있습니다. 그 기관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대상을 적는 난에 부모라고 대답한 학생들이 27%가 넘었습니다. 아직 세상을 모르고, 생각이 성숙하게 형성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충격적입니다. 부모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자녀들을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받는 자녀들 중에 네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부모를 경멸하고 미워합니다. 아이러니한 현상입니다. 
 
하나님도 이런 현상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부모들에게 권면하기를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이 노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모는 자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과 과정에 매우 일방적이고 비인격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로 인해 자녀들이 분노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 부부는 탄탄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딸은 모범생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말썽을 부립니다. 부부는 아들 문제로 인해 심각하게 싸우기도 했습니다. 얼만 전에 아들이 엄마와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아들을 때렸습니다. 그냥 때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골프채로 아들을 때렸습니다. 골프채로 맞던 아들이 한 곳으로  뛰어가더니 양손에 골프채를 들고 왔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죽어도 좋으니 싸우려면 밖으로 나가 마당에서 맞장을 뜨자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충격을 받고 당황해 했습니다. 아내는 큰 사고가 날 것 같아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아들이 부모를 향해 ‘나는 이 가정에 필요 없는 존재지? 내가 가족의 행복을 깨는 암적인 존재지? 나만 없으면 누나와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라고 외칩니다. 그 말에 아버지는 ‘그래 우리는 네가 우리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 네가 없으면 우리 집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나가 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그 길로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이 평상시에는 전혀 대화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아들에게 성적과 사건이 있을 때만 아들과 말을 했고 자신의 말에 아들이 따르지 않으면 어김없이 혼을 내고 때렸습니다. 그것도 무식하게 때렸습니다. 테니스채와 골프채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렸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부모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학교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고 자신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부모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컴퓨터를 만지고 핸드폰을 사용해도 사용법을 알아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데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낳고 길렀으니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 대해 모릅니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지합니다. 자녀를 모를 뿐만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자녀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우격다짐으로 소리 지르고,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릅니다.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만합니다. 수 십년 전에 자신이 다녔던 학교생활과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것을 기준으로 자녀를 대하니 자녀와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부모를 향해 자녀들이 마음을 열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르치느냐도 중요합니다.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무엇을 가르치느냐의 내용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문제의 부모는 무엇을 가르치느냐도 모르고 어떻게 가르치느냐도 제대로 모릅니다. 문화의 충돌은 나라와 민족 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세대 간에 가장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도 제 큰 아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습니다.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을 갔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자녀를 키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커다란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아이를 대하는 저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지만 공부하는 과정에서 열등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열등의식을 자녀를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큰 아이는 저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허벅지가 피멍이들 정도로 맞았습니다. 청소년에 대한 강의를 듣는 중에 제가 아이에게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깨달았습니다. 어렸을 때 저로 인해 받은 아픔과 상처가 훗날 아이의 미래의 삶에 어떤 아픔이 될지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이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들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네 번에 걸쳐 아이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지금까지 아이와 관계가 험악하게 깨어진 적은 없지만 아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못했던 부분이 그렇게 미안했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부탁하기를 ‘네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아빠가 너를 다루었던 것처럼 다루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했습니다. 
 
부부도 서로에 대해 무지하고 무례하면 관계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낳았고, 내가 먹이고 입혔고 학비를 대주었기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소유물이 아닙니다. 자녀는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생각이 짧아도 한 인격체입니다. 그 인격체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실력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부모의 역할을 우리들이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교육학자들은 문제의 자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부모가 있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바뀌면 자녀가 바뀝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노여워하는 것은 맞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자녀들도 알고 있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모의 무례함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비인격적인 모습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면 부모도 자녀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통해 사람을 대하는 예의와 인격적인 관계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자녀를 인격체로 인식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격체로 인정받으며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형상을 회복하며 그 가운데 참 인격체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인격체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양육하는데 두 번째로 주시는 말씀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리학에서 모든 사람들은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역할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역할을 합니다. 남편의 역할, 아들의 역할, 친구의 역할, 직장인의 역할, 아버지의 역할을 합니다. 역할에만 충실하다 보면 진정한 나를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참 자아, 즉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나는 어디 갔는가? 아내, 엄마, 딸의 역할 또는 남편, 아버지, 아들의 역할을 하다 보니 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며 외치는 말이 ‘내가 밥순이냐?’ ‘내가 돈을 버는 기계냐?’ ‘내가 공부하는 로봇이냐?’ 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나의 참 자아인 정체성을 잃고 역할만 하다 보니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입니다. 남편 역할을 하든지, 아내 역할을 하든지, 부모 역할을 하든지, 자녀 역할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의 가치와 정신을 가지고 그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부모를 보고 자녀를 보아도 내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어느 상황에서든지 같은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역할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카멜레온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몸의 색깔을 바꿉니다. 나무줄기에 있으면 몸을 갈색으로 바꿉니다. 푸른 잎에 있으면 몸을 푸른색으로 바꿉니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카멜레온을 격자무늬 위에 올려놓았더니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변화를 주어 자신을 위장해야 하겠는데 변할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스트레스를 받아 터져서 죽습니다. 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에는 자라서 번데기가 됩니다. 그리고 번데기가 자라면 누에고치를 찢고 나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납니다. 
 
자신의 참 자아, 즉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주어진 역할에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를 모릅니다. 역할을 하다가 힘이 들고, 한계에 부딪치면 그곳에서 뛰쳐나갑니다. 역할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정체성이 분명하면 그 역할들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이루고, 어떤 삶을 사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 역할이 힘들고 어려워도 어떨 때는 인내함으로, 어떨 때는 감사함으로 감당해 나갑니다. 
 
가정은 최고의 교육의 장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고의 롤 모델입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녀들이 양육됩니다. 긍정적인 사고와 신앙의 DNA를 보여주는 부모 밑에서 긍정적인 사고와 신앙의 DNA를 가진 자녀가 나옵니다. 우리들이 자녀 문제로 속이 상하며 ‘저런 놈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데 틀림없이 부모의 모습에서 그와 같은 자녀가 나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녀에게 최고의 선물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서로 힘과 지혜를 모아 행복을 만들며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육하며 온전한 인격체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들이 그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요청하며 무릎을 꿇은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부모와 자녀의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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