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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사람씩 (요 2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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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씩
요한복음 21:15-22

볼프강 짐존이라는 분이 쓴 ‘가정교회’라는 책은 초대교회와 지금 이 시대의 교회를 비교해서,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가야 할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오늘의 교회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내용이 한 가지 제게는 보였는데, 그것은 ‘이제 앞으로의 시대의 교회는, 건물을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오라고 부르고,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야 한다.’라는 지적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가서, 그 삶의 현장이 교회가 되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가 진정한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거기서 지역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도 마땅히 이런 방향으로 가야만 하는구나! 하는 점을, 저는 요즘 다시 분명하게 인식을 했습니다. 교회가 먼저 아픔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는 믿음공동체로 서고,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 예수를 예배하고 의지하는 예배공동체로 설 때, ‘하나님과 사람에게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고, 믿음 공동체의 구성원인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로서의 분명한 의미와 목적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한 번에 한 사람씩’ 돌아보고, 살피면서, 마음과 뜻을 합하여 일을 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내가 단 번에 무엇인가를 이루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단번에 많은 것, 큰 것을 이루고, 한 번에 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한번에 많은 사람을 가르쳐서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이 전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일반화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감당한 일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베드로 개인의 능력이 아닌, 성령님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요긴하게 사용하셨기 때문이고,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런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에는 베드로의 초월적인 능력을 행하는 방법보다는, ‘한 번에 한 사람씩’이라는 전도의 원칙이 더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여러분은 유념하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돌아보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성령님께서 베푸신 은사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면서, 세상을 향하여는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통하여, 이웃을 설복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원칙이고,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아담’ 한 사람을 만드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를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고, 당신의 구원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나사렛 사람 예수’ 한 분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돌아보시고, 인도하셔서, 멸망당할 인생들을 한 사람씩 구원으로, 생명으로, 복된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단체로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생명 말씀을 주시고, 구원의 길을 따라가게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역사도, 구원의 역사도 개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한 일군을 세우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한꺼번에 많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당신을 위하여 일하는 일군으로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세우실 때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찾아가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당신의 제자로 훈련을 시키고, 장차 하나님 나라 곧 교회를 세우고 지켜갈 지도자로 양육을 하셨습니다.

비록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 좇았지만, 예수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제자들을 비롯하여 장차 교회를 세우고 지켜갈 지도자를 훈련하고, 돌보시고, 양육하면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사렛 예수께서 복음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예수님의 방법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겸손하게 배우고, 성실하게 지금 여기 있는 주님의 교회에 적용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은 그 점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이웃을 돌아 볼 때에는 한 번에 한 사람씩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이웃을 돌아 볼 때에는, 여러분에게 맡겨준 영혼 곧 여러분이 돌아볼 사람을, 그것이 가족이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지체이든지 관계 없이, 한 번에 한 사람씩, 돌아보아야 하는 사람에게 거짖없는 사랑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돌아보세요. 그리스도인이 범하기 쉬운 실수가, 바로 ‘한 번에 한사람씩’ 돌보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이 있을 때, 많은 사람으로 인하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약해져 버리는 것, 곧 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희미해져 버리고, 전체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곧 곁에 있는 나무는 보지를 못하고, 멀리서 숲만 보고 말게 됩니다. 그 숲에 구체적으로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 그 나무는 어떤 모습이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겉모습만 슬쩍 보고 지나가는, 여행객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1997년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까지, 인도 캘커타에서 주위에 있는 빈민들과 행려병자들을 돌아보며, 말로서가 아니라 섬김의 생활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한 ‘마더 데레사’라고 불리는 수녀가 있습니다. 그녀가 이룩한 많은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칭찬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라고, 그런 사람들의 질문에 그녀는 ‘나는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입니다. 나는 한 번에 단지 한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단지 한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도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한사람을 붙잡습니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나는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의 물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족에게도,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단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감당하는 모든 일은  ‘한 번에 한 사람씩.’에게, 관심을 보이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의 손을 통해서 섬김을 받은 사람이 무려 4만 2천 여명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을 테레사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섬김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파하는 사람을 섬기실 때의 마음자세와 방법도 ‘한 번에 한 사람씩’이라는 원칙입니다.

복음서를 보세요 예수님은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는, 모두 한 영혼의 소중함을 말씀하는 비유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판에 놓아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온 종일, 비로 집안을 쓴 한 여인의 심정에서, 그리고 잃었던 것을 찾았을 때에 기뻐하면서, 이웃까지 불러서 잔치를 베푸는, 그 심정에서, 여러분은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을 말씀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 주변에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하거나 귀찮게 여겨서, 이를 막고자 했던 제자들과 예수님과 가까이 있던 어른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당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고는 어린아이들에게 복을 빌어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작은 소자에게까지도 ‘한 번에 한사람씩’ 돌보아주고, 섬기고, 사랑하고, 복을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전개하는 방식입니다.  

제자를 양육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전체를 가르치고, 훈련하기도 하셨지만, 어떤 경우에는 두 세 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가실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도마 단 한 명의 제자를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신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동료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도마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성적이고 매우 책임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도마로서는 당시에 ‘다른 제자들이 서로 짜고서 나를 놀린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도마는 ‘내가 주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 허리의 창자국을 내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도마를 위하여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신 당신의 몸을 제자 도마에게 보여주면서, 당신의 손과 발에 잇는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하면서, 사랑하는 제자 도마가 당신의 부활을 믿게끔 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기도 전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페르시야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는 인도에 까지 가서 선교를 하고, 인도남부에 있는 마드라스 라는 지역에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 불신하는 도마를 찾아가서 확신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의 열매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연약한 사람, 핑계가 많은 사람을 한 사람씩 찾아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본문을 읽으면서 왜 유독 베드로만 드러나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만 부르시고, 베드로만 찾으시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본문을 살펴보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특별히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일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와서 고기잡이를 나간 모든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잡수시고, 제자들과 함께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셨고, 그곳에 있던 제자들 모두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만 다시 부르고,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조반을 먹은 제자들의 대표자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면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하고, 범하지 말아야 하는 실수가 바로 ‘한 번에 한사람씩’ 신실하게 대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효용성만 따지고, 한 번에 여러 사람을 대하려고 하다가, 나 자신도 잃어버리고, 이미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까지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아무리 분주해도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여러분의 가슴 속에 품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많은 효과와 열매만 생각을 하기보다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섬기고 구원하자는 예수님의 원칙을 지키고 수행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여러분이 섬기고, 돌아 볼 사람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가슴으로 품고, 위하여 기도하고, 섬기며 돌아볼 사람을 스스로 찾아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전도할 대상과 예수님의 제자 삼을 사람을 여러분이 찾아서 여러분의 가슴으로 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대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한 사람을 여러분의 가슴에 품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스스로 돌아보고, 살펴주고 섬겨야만 할 영혼을 한 사람씩 여러분 가슴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도 믿음이 성숙하게 자라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고, 겸손하게 성경말씀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좋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도록 훈련하고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번에 한 사람씩 양육을 하면, 그 한 사람이 때가 되면 다수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는 기도하기를 자기에게 12 사람만 주면, 세계를 자기의 교구로 만들겠다고 했고, 루터도 신실한 지도자 24 사람만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군이 더 많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가 교회에서 쉬지 않고 일어나도록 나보다 연약한 이웃을 여러분의 가슴에 품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이웃에 대하여 길이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를 양육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유념해야만 할 것은,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을 ‘좋은 그리스도의 군사’로 만들기 위하여 참고 기다려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하여 인내하시듯이, 여러분 또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농부가 좋은 열매를 얻지 못하듯이, 참고 인내하지 못하는 신자 또한 좋은 것을 얻거나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도가 인내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참으라고 합니다.

(2)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참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약 5:7-8절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면서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오래 참고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사람에 대하여 참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후서 3:9절에서 말하기를,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듯이 여러분 또한 우리가 돌아보는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 주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배경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실 것을 이미 예고하셨고, 부활하실 것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도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까지 찾아가신 것입니다. 당신을 배반하고 저주하기까지 한 제자들입니다. 우리 같으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장담을 했던, 제자 베드로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니, 베드로가 먼저 찾아가야만 했을 것 같은데, 정작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 앞에 가지도 못했습니다. 

이유는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 찾아가서는 베드로에게 묻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이나 하시더니,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는 ‘내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런 오래 참으심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배반한 제자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을 다시 맡기신 것은 베드로를 신뢰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나를 기다려 주시고, 나 때문에 오래 참으시는 것은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에 대한 아가페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이웃을 위하여 오래 참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주님을 만날 때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서기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것이, 바로 경건한 신자가 감당할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한 번에 한 사람씩을 통해서 확장되어 갑니다. 

프랑크 로바흐(Frank C. Laubach, 1884~1970)는, 필리핀 민다나오 섬 모로(moros) 부족에게 선교를 했습니다. 그가 선교한 지역은 병원도 학교도 없는, 회교도 마을이었습니다. 선교사의 세 자녀가 말라리아로 죽었고, 주민들은 완악하기만 했습니다. 프랑크 선교사가 완악한 사람들을 위해서 힘쓰다가 너무도 지치고, 힘들어 낙심하여, 시그널언덕이라는 곳에 앉아 있을 때, 자신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이며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내 아들아, 네가 사역에 실패한 것은, 네가 이 모로인들을 참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백인이라는 편견과 우월감을 버려라. 네 종교를 귀하게 여겨주기를 바라거든 네가 먼저 그들에게서 코란경을 배워라.’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즉시 일어나 회교성직자인 이맘에게 코란을 배우러 왔다고 하자, 주민들이 프랑크 로바흐를 기뻐하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주민은 문맹이었고, 병들고 가난했습니다. 

이때부터 프랑크 로바흐의 사명이 분명해졌고, 쉬지 않고 기도하였으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일을 했습니다. 로바흐가 실천한 문맹 퇴치 원리는 단순합니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마다 ‘한 사람씩 가르쳐라!’ “Each One Teach One” - literacy program  로바흐의 문맹퇴치 운동은 필리핀뿐만 아니라, 문맹인을 찾아 아프리카 등, 130국을 여행하며, 프랑크 로바흐는 세계 10억 문맹자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월감과 자존심과 권위의식을 버리고, 주민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아픔을 가진 자를 섬길 때, 그리고 한 사람씩 글을 가르칠 때, 로바흐는 10억의 문맹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10억이라는 숫자는 결과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씩이라는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에 한 사람씩’ 섬기고 사랑하세요. 먼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세요. 여러분이 가슴에 품은 사람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세요. 그 사람이 혹 당신에게 실망을 안겨 주어도, 당신을 버리고 떠나간다 할지라도 기다려 주세요. 오직 그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변함없는 사랑과 진심을 보이세요. 지금부터 그렇게 하세요. 이미 시작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어도,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르고 그렇게 하세요. 그러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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