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만족하십니까?(3)

첨부 1


집사가 되고 난 후부터 오히려 저의 신앙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오래 하셨다고 장로가 되셨다고 목사가 되셨다고 집사님 되셨다고 자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신자보다 못한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집사가 되고 나서부터 오히려 초신자보다 못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저를 교만케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사탄의 유혹에 많이 빠졌습니다. 제가 성경을 남편따라 많이 읽다 보니까. 성경 암송을 잘하게 되었어요. 우리교회에서 잘하니까 전국대회를 나가 보래요. 새문안교회에서 전국 성경암송대회를 주최했는데 제가 암송대회에 나가서 예선에서 본선을 거칠 필요도 없이 금상을 받았는데 심사의원들이 시계를 보면서 서로 "지금 몇 시간째야? 하다가 "그만하십시오"라고 할 정도 였어요. 퀴즈대회 잘하니까 우리 교회에서 연합대회를 나가보래요. 연합회 퀴즈 대회를 나가서 문제 나오자 마자 제가 계속 맞추니까. 나중에는 진행하는 사람이 뛰어와서 제 입을 막으면서 "그만 하십시오. 이미 일등이 되었는데요" 그러면서 그 다음해에도 또 우승 하니까. 다른 교회 성도들이 "내년에도 저 집사님 출전시키면 우리 재미없어서 못하겠으니까. 출전 정지를 시키십시오." 그 정도로 잘하니까 우리 교회에서요. "늦게 예수를 믿었는데 이렇게 잘 할 수가 있느냐!"며 저를 칭찬해 주게 되었는데 부끄럽게도 그 칭찬이 저를 넘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우고 아무리 예배를 열심히 드려도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도 그 속에 교만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만한 마음이 싹 트면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예배 드리는 열심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헌금생활을 방해했습니다. 남편의 열심있는 교회 봉사 생활을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전도했던 친구가 직장을 그만두고 홍콩대학으로 CCC를 통해서 선교사로 갔을 때, 우리 남편이 후원회 회장직을 맡아서 수고하다가 이젠 남편이 일본어를 잘한다는 것을 간사들이 알고서 와세다대나 도쿄대학에 CCC평신도 간사로, 선교사로 보내고 싶다고 했을 때 제가 우리 남편보고 "나는 선교사 아내되기 싫으니까. 이혼하고 혼자가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 믿지 않던 남편 예수 믿게 해 주고 어느 누구 보다 열심있는 남편을 만들어 주셨지만 저는 그것이 축복인 줄 모르고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동네 병원에서 고칠 수 있나 싶어서 동네 병원을 다니다가 동네 병원에서 "이것은 무슨 병인지 모르겠지만 큰 병원 가야한다"고 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우여곡절 끝에 병명이 밝혀졌는데 바로 "결장암"이었습니다. 암이지만 가스가 나오지 않고 장이 부어있었기 때문에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래 죽어도 죽고, 저래도 죽어도 죽으니까, 수술을 하다가 죽겠다"고 했어요. 장이 부어 있었던 사람은 수술하게 되면 열이 오르고 결국 장이 일제히 썩는다면서 도저히 수술이 안 된다는 것을, "수술하고 죽겠다"고 온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교인과 농협직원들의 기도 덕분에 수술을 했지만 열이 오르지 않아서 기적처럼 나아서 우리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창자를 이을 수 없어서 장을 옆구리로 빼내고 비닐을 붙여서 대변을 받아내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숨만 건진 것도 감사한 줄 알았는데 창자를 옆구리로 빼내고 사니까 너무나 불편하더군요. 그 때 남편은 농협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었는데 창자를 옆구리로 빼내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옆으로 지나다니면 아주 냄새가 심할 텐데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냐며... 그래서 다시 이어 달라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다시 배를 열었다가 또 다시 다른 곳에 암이 있으면 그때는 창자를 옆구리로 빼내지도 못하고 죽게 되니까, 힘들어도 그냥 그렇게 살아 가십시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라고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남편이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석달만에 의사 선생님이 "모험을 해 보자"며 다시 배를 열었습니다. 다행히 암이 없어서 장을 이었습니다. 다시 밑으로 변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다른 2개 교회를 다니며 남편과 간증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면 얼마나 오랫동안 그 은혜를 간직하십니까. 저는 참으로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남편, 창자를 옆구리로 빼내고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남편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고 장을 잇게 해 주셨는데도 저는 그 감사가 6개월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6개월을 넘어가니까 그 감격이 희미해지면서 또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항문에서 피가 난다고 했어요. 병원에다가 연락을 했더니 암은 아닐 거라고, 치질일 거라고, 매달 체크하는데 지난 달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괜찮다고 하니까 별 염려를 안 했는데 남편이 자꾸 통증이 심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다시 병원에 갔습니다. 한 달 보름간 여러 가지 검사를 해서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임파선 전이도 안됐다고 하던 그 암이 수술한 부위에서 또다시 콩알만하게 전이가 돼서 이제는 직장암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직장암이 되었지만 다시 수술을 할 수 없다면서 그냥 생명이 있는 한 살아 있으리라고 했어요. 항암치료도 우리는 효과가 없다고 했습니다. 방사선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방사선과에 갔더니 뇌종양, 유방암, 폐암과 같은 경우는 방사선 치료가 어느 정도 유효하지만 직장암은 장을 방사선 치료를 하면 장이 굳어져서 터질 수도 있으니까. 안 된다고 했어요, 사정 사정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뭔가라도 할 수 있어야 할 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남편은 아직 마흔도 안됐는데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매달렸더니 방사선 치료를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40여회에 걸쳐서 장이 굳어 들어갈 때까지 했습니다. 뜻밖에요, 정말 뜻밖에 36살에, 농협에서 그래도 쾌속 승진을 하고 좋은 보직을 맡게 되었고 입사동기들이 출세했다고 인정했던 남편, 교회에서도 열심있는 일꾼이라고 했던 남편, 친구들도 "니 남편 성격 좋고 잘 생겼다고 부럽다"고 했던 그 남편이 36살에 결장암에 걸리고 37살에 직장암으로 전이가 되어서 암으로 죽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남편과 더불어서 투병하는 4년 동안 제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줄 아십니까? 여러분은 평안한 가운데 은혜를 깨닫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너무 어리석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고난과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 남편이 예배시간만 되면 교회를 못 가니까 라디오를 통해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 언제쯤 교회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가던 그 때가 돌아올 수 없는 겁니까? 언제쯤 교회 갈 수 있겠습니까? 남편과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을까요? 다시 나아서 다시 교회를 갈수 있게 해 주세요!" 지금 이 기도는 환자들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 병원에는 많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입원해 있는데 그들의 첫번째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빨리 나아서 다시 한 번만 더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돌아가서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예배드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 병원에서 교회로 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하는 환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교회를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곳인 줄 알았더니 우리 남편이 병들어서 교회에 갈 수 없었을 때에라야 깨달았습니다. 예배시간에 졸다 오더라도, 아이들이 떠들어서 교회 마당에서 놀다 오더라도, 예배시간 마다 교회에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과 투병하며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남편이 "교회일 많이 한다"고 불평하며 "적당하게 하고 우리도 아이들과 같이 주일날 오후에는 좀 놀자"고 했는데 병드니까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앞에 하루 종일 교회에 가서 살아도 좋으니까 병원에만 있지 말게 해주세요. 남편이 열심있고 능력이 있어서 교사하고 성가대 하는 줄 알았는데 천만에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으로 인해 비워진 자리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하여 메꾸어 가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병원에 있는 많은 환자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들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좋은 목사가 될 수 있겠는데요." "좋은 장로, 좋은 권사 될 수 있겠는데요." 믿지 않는 환자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암에서 낫게만 해주신다면 신학해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시 한번 더 기회를 갖지 못한 채,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야 하는 환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36살의 나이에 수간호사가 된 우리 교회 집사님이 병원에서 같이 일하다가 5월달에 폐암이 있는 것을 알고 10월에 죽으면서 "전도사님 시간이 많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좀 하라"고 할 때 "나중에 하겠습니다.나중에 하겠습니다" 했는데 폐암에 걸려서 내가 36살의 나이에 죽을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빨리 죽을 줄 알았다면 교회 열심히 나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남을 위해 기도 많이 할 건데 내게 이렇게 시간이 짧은 줄 몰랐으니..."라고 끝내 말을 잇지 못하시더군요. 또 남편과 투병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물질이 저는 내 것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86년 2월에 우리 남편이 승진을 하고는 교육원 교수로 발령이 났는데 교육수당이 붙어서 급여가 파격적으로 올랐을 때 "십일조하지 말고 원정 헌금하자"며 "우리보다 직급이 높은 분이 십일조 적게 한다"고 지혜롭게 돈을 모아서 집을 사고 이사를 가야만 일가친척들이 "저것들 예수믿고 복 받았다"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겠냐라고 했어요. 당시 강남의 8학군이 유명할 때였어요, 그래서 아이들 크기 전에 8학군으로 이사가자며 남편이 헌금할 때마다 꼬집고요, 하도 감사헌금을 많이 내서 내가 옆에서 꼬집었는데도 헌금은 무명으로 내요, 그런데 무명으로 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남편은 무명이 소개될 때마다 꼬집혔어요. 그렇게 방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 아프기 전에 돈을 많이 모은 편이었는데 병원비로 나가기 시작해서 3번째 아플 때는 수술비가 바닥 났어요. 그래서 교인들과 농협직원이 모금을 해서 가져 왔을 때 제가 그 돈을 받고 울 때가 없어서 병원 화장실에 가서 울었어요. "하나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남을 도와줄 망정, 남의 신세지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살았는데 그리고 지혜롭게 돈 모아서 잘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려고 했는데 그 돈 다 쓰고 이제 남의 신세지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제가 단 돈 만원도 쥘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환자들의 고백도 그때의 저와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으로 악으로 돈을 모아서 이렇게 병치료로 쓰다가 죽을 줄 알았으면 그렇게 돈 모으려고 아둥 바둥 살지 말걸요. 나중에 잘 살면 교회 다니려고 했는데 이렇게 아파서 죽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예수 믿을 걸요..." 여러분, 물질이 여러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하나님께서 이 물질 거두어 가시려고 한다면, 강도 만나거나 불나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아프거나 여러분의 가족이 아파서 그 물질 다 없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 김복남/전도사/연세의료원(이 간증은 계속이어집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