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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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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갈 6:14) 


어떤 사람이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었다. 깜짝 놀란 부인이 달려와서 물었다. 
-여보 누가 죽었어요? 그렇게 슬피울게. 그때 그 남자가 대답했다.
-여보 내 마음 속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 사람은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촬스 스펄젼이었다. 

초기 교회시대 당시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수치, 불명예,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사형수들의 형틀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수치와 혐오의 상징이었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노라고 선언하게 되었는가?

1.십자가는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갈2:16,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착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로운 행동이나 업적을 남긴 사람을 의인이 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과 계명을 잘 지켰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율법은 우리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로 가득찬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죄의 값을 치룰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속죄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 방법이 다름아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것이다. 나 대신, 우리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가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의롭게 되며 하나님 앞에 그의 아들과 딸로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2.십자가는 성화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성화란? 거룩해져 가는 과정을 말한다. 예수를 믿는 순간 거룩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를 믿어도 내 속에는 옛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성품 속에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이 점점 커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는 점진적으로 되어 지는 것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스토트 목사는 성도가 거룩해지기 위해 세 개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고 말했다.

첫번째 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 나는 죽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두번째 타락한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의 본성들, 곧 음행, 우상숭배, 분쟁, 시기, 분냄, 투기, 술취함, 방탕함과 같은 것들이다. 성도는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음난한 생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세번째 십자가는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는 것이다.
갈6:14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말은 세상의 가치관, 무신론적 물질주의, 허영심, 위선을 계속적으로 못 박아 나가는 것이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 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사람은 죄에 젖어 있지 않는다. 날마다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3.화평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죄가 인류에게 들어옴으로 인해 모든 관계가 깨어져 버렸다. 말세가 가까울 수록 나타나는 현상이 개인주의 이기주의이다. 
마24:10-12,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해진다. 서로 믿지 못하고 의심과 불신이 골이 깊어진다. 부부관계가 깨어지고, 형제간에 다툼이 심해지고, 이웃과 담을 쌓고 살게 된다.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성도들은 세상을 향하여 평화를 선포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과거의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추궁받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영원한 저주에서 속량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이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화평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고후5:18-19,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과 화목케 하는 말씀을 주셨다고 했다. 깨어지고 멀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화평케 하는 유일한 대안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뿐이다. 

4.영원토록 증거해야 할 주제이기 때문이다.

빌리 그레이엄목사, 달라스의 코튼 원형 경기장, 큰 무리가 운집한 그 곳에서 저녁 시간 그는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가 연단에서 내려오고 있었을 때 다정스러운 노인 한 분이 오더니 팔로 그를 감싸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빌리 목사님, 십자가를 오늘밤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설교 내용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설교하시지 않더군요." 
그 위대한 복음 전도자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서 울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였다. "오 하나님, 저를 도우셔서 십자가가 중심이 아닌 설교를 결코 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바로 여기에 승리케 하는 메시지의 본질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어린양의 피로써 교회는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가장 힘들었던 곳은 아덴이었다. 아덴은 철학자의 도시였다. 그는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도의 열매는 많이 거두지 못했다. 아레오바고 관원을 비롯해서 몇 사람을 건져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로 향하는 도중에 일단의 결심을 하게 된다. 
고전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매우 논리적인 두뇌와 학문적인 박식함과 율법에 대한 정통함이 있었다. 행26:24,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라고 말하였던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아덴에서 철학자들과 변론할 때 자신의 실력으로 철학자들을 능히 설득하여 예수님을 믿게 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스토익파와 에비구레오파 철학자들이 꼼짝 못하도록 언변으로 그들을 눌렀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겉으로는 승리를 얻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덴에서의 실패는 그로하여금 더욱 십자가만을 붙잡게 하였고, 십자가만을 증거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지금부터 약 170년전, 알렉산더 더프라는 젊은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인도에서 사역하다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대선교의 창시자라 불리우고, 인도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은퇴한 윌리암 캐리선교사를 자주 방문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캐리의 업적을 자랑하였다. 더프선교사가 자신을 칭찬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윌리암 캐리는 더프선교사를 불러서 타일렀다.
-더프씨 이제 나에 대한 자랑은 그만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그러나 더프선교사는 계속해서 윌리암 캐리의 성공적인 사역을 칭찬하고 다녔다. 캐리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다시 더프선교사를 불렀다. 
-더프씨 내가 죽은 후에는 제발 나에게 대해서 말하지 말고 윌리암 캐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세요.

윌리암 캐리의 간절한 부탁의 말씀을 듣고 그는 더 이상 캐리의 업적을 칭송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선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분 모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지 않고, 자기의 소유나 재능이나 업적, 명예를 자랑한다면 그 사람의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자랑은 그의 출신 배경이나, 학벌이 아니었다. 그도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자랑할만 것들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육신적으로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다.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다.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육체의 자랑거리가 끊임없이 튀어 나오려는 악한 본성을 누르기 위해 그는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작업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자신이 소유한 자랑할만 것들이 많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러분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학벌을 자랑하고, 업적을 자랑하고, 하다 못해 운전실력이나 기술을 자랑하기도 한다.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1)십자가만이 죄인들을 의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십자가만이 우리를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3)십자가만이 깨어진 평화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4)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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