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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은 얼만큼 효험이 있는가? (롬 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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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얼만큼 효험이 있는가? (롬 8:31-32)

 
제가 성도님들을 오랫동안 접하면서 느끼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여러분이 대체로 착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나름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여러분 모두가 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묻고 싶지만 묻지 못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과연 목사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그것이 나의 삶에 얼마만큼 효험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어보고 싶은데 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의 침묵을 아주 강력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아마 모세도 그런 책임감을 느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많은 백성들이 모세 한 사람을 믿고 사백년이나 살던 애굽을 떠났을 때 모세에게는 내가 이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아주 무거운 책임감으로 그에게 다가왔을 것이고, 또 다윗이 사백 명 남짓한 사람들의 두목이 됐을 때 빚진 자, 원통한 자, 이런 사람들이 다윗을 따랐는데 다윗은 이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는 아주 중요한 책임을 떠맡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부족한 이 사람을 따라오고 있는데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신앙이 여러분의 삶에 별로 효험이 되는 것 같지 않다면 얼마나 저의 입장이 난처하고 민망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겁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사실은 저를 따르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고 저의 말을 들으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의 책임을 져야 되는 당사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요. 

효험이 있든 없든 그건 하나님과 예수님이 져야 될 책임져야 될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저의 역할은 보험 설계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험 회사가 있고 고객이 있는데 보험설계사가 가운데 있어서 보험설계사를 통하여 보험을 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 목회자가 있어서 목회자를 통하여 예수님의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같으니까 일정의 책임이 당연히 있지요.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이 신앙의 효험을 경험하고자 하는 부분은 네 가지 분야에 걸쳐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경제적인 부분일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헌금을 하고 교회에 다니는데 경제적으로 나아져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 경제형편이 나아져야 헌금을 하던 봉사를 하던 명분이 서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부분은 건강입니다.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하면 있던 병도 낳고 없던 병도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 번째 부분은 자녀입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가 다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구하는 것은 자녀가 잘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부분은 이것은 아마 누구도 내색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는 질문일 텐데 결혼생활에 대한 것일 거라고 봅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내 결혼생활이 개선되느냐.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결혼생활이 더 행복해질 것이냐. 이건 어느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아마 교회에 AS센터가 있다면 제일 AS신청이 많이 쇄도하는 부분이 바로 결혼생활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여기요! 저 교회 다니는데요. 하나님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거 잘 안되거든요? 이거 고장 난 겁니까? 제가 뭘 잘못한 거지요? 와서 좀 고쳐주세요!’ 이런 식으로 도움을 청할 부분이 있다면 아마 결혼생활일 것이라고 봅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기계치였다고 하지요. 단순한 기계도 다룰 줄 몰라서 매번 누가 와서 도와주어야 했는데 이후에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닉슨이 백악관에서 녹음한 대화가 닉슨이 녹음기를 다룰 줄 몰라서 더 문제가 커졌다고 하는데 우리 모두도 저마다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음치가 있고 몸치가 있고 기계치가 있어요. 치는 치인데 서로 분야가 달라요. 다시 말하면 남들은 쉽게 하는데 나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신앙의 효험을 경험하는 것도 마찬가지일거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길을 가실 때 열 두해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습니다. 내가 그 옷에 손만 대어도 나으리라 이렇게 믿고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더니 믿음대로 즉시 나음을 얻었어요. 

그런데 그 순간에 예수님 주변에 그 여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순간에 나음을 입은 사람은 그 여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 똑같은 은혜에요. 그러나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고 못 받는 사람이 있고 더 쉽게 받는 사람이 있고 어렵게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효험을 경험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어느 성도님을 심방하는데 여자 집사님이 남편 앞에서 이런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제가 아니었으면 저 사람은 결혼을 해도 몇 번 했을 거예요.’ 제가 구체적인 사유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짐작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말도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겪는 애로사항은 대충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더 쉽게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경험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있는 것뿐입니다. 이 원리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어요. ‘볼지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렇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느냐. 그건 아니에요. 

예수께서 세상 죄를 담당하셨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지옥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은혜를 좀 더 쉽게, 좀 더 자주, 좀 더 원활하게 누릴 수 있느냐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온유함 · 겸손함 · 착함 ·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이 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리는 씨는 똑같은 씨앗이에요. 그런데 토양에 따라서 결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아예 씨도 먹히지 않는 땅이 있고, 금방 말라버리는 땅이 있고, 싹이 나는데 기운을 빼앗겨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도 있고, 그리고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땅이 있습니다. 

그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땅은 무엇이 특별하냐. 누가복음 8장 15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런 구절은 외워야 됩니다. 신앙이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면도 있지만 착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걸 무시하면 안 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왜 저에게는 신앙이 효험이 없을까요?’라고 묻는 분이 계시다면 좀 더 착해지기를 저는 권하고 싶습니다. 좀 더 착해져 보세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 한 구절에서 왜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좀 더 효험을 주지 못하는가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네 가지 분야, 경제 · 건강 · 자녀 · 결혼생활 이 네 가지 분야는 사실 작은 것입니다. 좁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분야는 훨씬 넓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효험을 이 네 가지 분야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좁은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무슨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셨습니까. 무소유로 사셨는데. 예수님이 무슨 건강에 대해서 염려하셨겠습니까. 

삼심 삼세의 나이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예수님이 무슨 결혼생활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염려하셨겠습니까. 독신으로 사셨는데. 그렇다고 신앙이 예수님에게 효험이 없었느냐. 그게 아니지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훨씬 크고 광대한 분야에 있어서 신앙은 예수님에게 효험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야를 넓혀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의 효험을 더 널리 볼 수가 있습니다. 이 한 부분이 빨리 해결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조급한 것입니다. 그건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는 분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봐야 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신앙이 여러분에게 이미 효험이 있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신앙은 많은 효험이 있어요. 우리는 이미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금세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고 내세를 아우르는 축복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편이에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은 우리 편이에요. 우리를 위하십니다. 여기에서 이미 신앙의 효험을 맛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설사 다른 것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이미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주시리라’고 말하지 않고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어요. 여기에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슷하게 말씀하셨어요. 예수님도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질문하셨어요.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고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단언이 아닌 질문으로 말씀 하셨어요.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질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늘 질문적인 입장을 갖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갖고 계신 것이 질문인 것처럼. 그런데 이 질문은 의심에서 비롯되는 질문이 아니고 의심을 낳는 질문이 아니고 믿음을 주는 계기가 되는 질문입니다. 질문을 통해서 사람은 답변을 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주님에게 질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막무가내로 믿거나 광신적으로 믿거나 아니면 자신의 머리를 꺼놓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많이 할수록 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는 것뿐만이 아니고 더 깊고 더 중요한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배우지 못합니다. 배움은 질문과 답변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의심을 낳는 질문이 아니고 믿음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질문이에요. 

그리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은 아들과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축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제하고 부하게 되려고 한다든가, 예수님을 배제하고 병을 고치려고 한다든가, 예수님을 배제하고 소원을 이루려고 한다든가, 예수님을 배제하고 나의 쾌락을 누리려고 한다든가, 예수님을 배제하고 성공하려 하는 것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인터넷 사이트에서 무엇을 가입할 때마다 늘 ‘계속하시겠습니까?’ 라는 버튼이 등장하지요. ‘계속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취소하시겠습니까?’ 취소버튼을 누르면 무산됩니다. 계속하겠다고 하면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하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할 것이냐 취소할 것이냐 하는 유혹은 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계속하겠다는 버튼을 눌러야 됩니다.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 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려 문 앞에 기다려 서있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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