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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쉽게 응답된 기도 (창 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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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응답된 기도 (창 24:10-27)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과연 내 기도가 응답될 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8:2)." 문둥병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마음이 있는지에 대한 의도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과연 그분께서 지금 내 기도를 응답하실 지에 대해서는 고민합니다. 또한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았다 하더라도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길 위에 뿌려진 씨앗은 날아오는 새에게 금방 먹혀 버립니다. 이처럼,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응답을 '의심'이라는 새가 와서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려면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쌓아놓은 의심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제 룸메이트 중에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하나님께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그 친구는 이미 방언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내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은사를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게 됩니다. 이 의심의 벽을 뚫고 하나님이 다시 응답 하시기에는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어려워지고 본인의 입장에서도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과연 올 것인가 의심하는 것도 고민이지만, 이미 주어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도 고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를 단순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의심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단순해질 수록 믿음의 도를 배우기가 쉬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믿음 있는 자의 좋은 예가 됩니다. 백부장은 군인이기 때문에 명령체계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듯이, 기도도 함께 하면 더욱 힘이 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우리가 골방에서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의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지 혼자서만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교인들이 골방에서 기도하고 있는 줄은 믿고 있지만, 때로는 교인들이 힘써서 기도하는 모습을 봐야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믿음은 중심에 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사람은 믿음의 증거가 밖으로 드러나야 그 모습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됩니다. 

본인은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자신의 아내가 새벽 기도하는 것은 좋게 여기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새벽기도를 가지 않으면 "왜 기도하러 가지 않느냐"고 오히려 채근을 한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믿음을 보고, '적어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남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혼자만의 믿음으로 큰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믿음으로만 이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사도바울도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도바울도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필요로 했습니다. 기도는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믿음과, 자신을 보낸 아브라함의 믿음을 함께 가져갔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만을 가지고 된 것도 아니고, 종의 믿음만을 가지고 된 것도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의 믿음이 연합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은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를 놓고 기도부탁을 하러오는 성도들 중에는 이미 모든 결정을 다 해놓고 축복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내가 이미 다 결정했으니 축복만 해달라"는 의도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목회자의 믿음을 합칠 수가 없습니다.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는 아직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인도를 함께 구하는 마음으로 오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에는 목회자의 믿음을 합쳐서 함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대되어 함께 기도할 때 훨씬 더 큰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보다는 여러 명의 믿음이 합쳐졌을 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의식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믿음에 적용시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직장도 공동체요, 가정도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역사하는 범위에 있어서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너무나 짙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을 자기의 종에게 맡겼습니다. "너는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24:4)." 

종은 아브라함의 지시에 따라 하란의 우물가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우물가는 여자들을 만나기 쉬운 장소입니다. 우물가에 도착한 종은,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창24:12-14)."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왔습니다(창24:15). 기도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이미 응답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만을 보고 "기도가 이렇게 쉽게 응답되다니, 참 좋겠다"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생각은 열매만을 보는 것입니다. 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 심어야 했던 종의 순종과 희생과 충성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심고 거두는 원리에 의해 역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먼 길 하란까지 가는 그의 순종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력 없이 열매만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요행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려서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열매만을 보고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열매가 맺혀지기까지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오랜 인내와 순종,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력 없는 열매를 주시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할 지라도, 알고 보면 부모님이나 다른 누구의 수고와 믿음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을 보고 야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열매만을 보아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진 영적인 권세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께 요청한대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창24:14)." 종은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 선을 그어놓고 '이 범위 안에서 역사하시면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줄 알겠습니다'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응답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적인 권세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권세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흥분해서 기도해서도 안됩니다. 21절에,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시험에 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응답을 너무 쉽게 판단해서 실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맞는지 안 맞는지 묵묵히 분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기도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창24:26-27)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수고하며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남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방인과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마음에 품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염려하며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다른 영혼을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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