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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할 수 있는가 (룻 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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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수 있는가 (룻 1:18-22)


룻1:18 -22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며칠 전 TV를 보다가 우연히 Vogue라는 패션잡지사가 주최하는 패션 디자이너 시상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상이 영화부문에서 권위 있는 상인 것처럼 이 상은 패션 부문에서 주는 권위 있는 상입니다. 랠프 로렌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도 게스트로 등장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데는 별 관심이 없지만 어떻게 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시상식 중간중간에 인기 연예인들이 나와서 공연을 하는데, 그 중에 "Pink"라는 젊은 미국인 여가수가 무대에 나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도 잘 불렀지만 노래의 가사 내용이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가족사진>이란 제목의 노래였는데, 어린 소녀가 자라면서 겪은 가정 생활의 아픔을 노래하는 곡이었습니다. 가사 내용을 소개하면, "아빠, 제발 소리지르지 말아요. 엄마, 아빠 제발 싸우지 말아요. 아빠, 집을 나가지 말아요. 제가 더 좋은 딸이 될게요. 동생보고 식탁에 우유를 엎지르지 말라고 타이를게요."라는 내용의 노래였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곡이 이런 행사에 어울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곡이었지만 청중이 이 노래에 열광을 했습니다. 그냥 슬픈 노래가 아닌 청중의 마음에 와 닿는 노래라는 것을 TV로 보는 저마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청중의 마음을 만져주는 노래였습니다. 교회용어로 말하면 청중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저는 순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패션세계라는 것이 얼마나 화려한 세계입니까? 디자이너, 모델들은 세계 최고의 화려함을 누리는 사람들인데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 솔직한 노래가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해 무엇을 시사한다고 생각되십니까? 시상식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중에도 그 노래 가사처럼 아픈 가정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 노래가 그들에게 남의 얘기가 아니고 내 얘기처럼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이 가수가 이런 행사에서 이런 노래를 불러서 청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는 결코 대중의 정서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서둘러서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마치 버스가 정류장에서 조금만 더 기다릴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을 텐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서둘러서 종점을 향해 출발하려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을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서둘러서 내 결론을 말하려고 합니다. 서둘러서 정답을 말하려고 하고, 서둘러서 해피엔딩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좀 더 속도를 늦춰도 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현재 아픔을 이해해주기만 해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을 공감합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만 해줄 수 있어도 사람들은 벌써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와 복음성가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많은 설교들은 너무 빨리 결론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기쁨이니, 구원이니, 은혜니 듣기 좋은 말들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거기에 도달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찬송가 455장에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얼마나 좋은 가사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싶어 합니다. "어떻게 해서 당신의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몇 주전에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과정을 보면 정답만을 말해서는 안되고 정답에 어떻게 도달했는지를 보여주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정답에 도달하는 과정이 답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답만 말해서는 100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해서 지금 믿고있는 믿음에 도달했느냐가 귀중한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중학교 동창을 27년만에 만났습니다. 27년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제가 그 동안에 목사가 되었다고 말하니까 이 친구는 아주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너희 가족들 중에 목사님이 계셨느냐?" "아니다." "네가 원래부터 예수님을 믿었느냐?" "아니다."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해서 목사가 되었느냐?" 지금 목사가 된 것보다도 어떻게 목사가 되었느냐를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독일에서 유학생을 대상으로 교회를 하고 있는데, 교인들 대부분이 젊은 유학생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부부간에 갈등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이 언제 목사님의 말씀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듣느냐하면, 목사님 자신이 부부싸움한 얘기를 할 때 아주 좋아하더랍니다. 목사가 부부싸움 한 것이 뭐가 좋다고. 그러나 우리만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만 이런 갈등이 있는 줄 알았더니 목사님에게도 똑같은 갈등이 있구나.'하면서 오히려 용기가 되고 소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사실 이들은 베들레헴에 오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고 멀고 험한 길을 거쳐서 베들레헴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 와서 있는 이 모습만 보아서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 올 수 있었는지를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여기 와있는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베들레헴, 보아스의 추수 밭을 교회의 예표로 본다면 지금 교회에 와 앉아있는 여러분들이 베들레헴에 와 있다고 보았을 때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만을 보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룻은 지금 초년생입니다. 이방인 출신입니다. 이제 겨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합류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로 치면 새신자중에 새신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그냥 어떻게 하다 베들레헴에 온 게 아니고 많은 시련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고, 상당한 결단을 내리고 비로소 베들레헴에 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 와 앉아있는 성도들도 겉으로만 봐서는 그들의 사연을 알 수 없지만 다 평범하게 보이고 평안하게 보입니다. 

'이 교회는 강남에 있는 교회니까 다 평안한 삶을 살겠지.' 이렇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느 누구도 아무런 사연 없이 교회에 와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사연 없이 어떻게 하다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다 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이 자리에 와 앉아있기까지는 뭔가 이유가 있었고, 시련이 있었고, 믿음의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고, 믿음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고, 그리고 비로소 이 자리에 와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봤을 때 아직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봉사하는 것도 아닐지라도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만으로도 간과할 수 없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른에게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남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저의 아들 머리를 자주 손으로 눌러서 고개를 숙이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안 하기 때문입니다. '인사해라. 안녕히 계세요. 인사해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배우면서 제일 먼저 배워야 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입니다. 이것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 자식에게 인사는 강요할 수 있지만,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강요함으로 안됩니다. 감사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감사를 강요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본인이 스스로 감사할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미를 보시기 바랍니다. 원래 나오미라는 의미는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즐거움)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라." '마라'라는 이름은 쓰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오미는 그의 인생의 경험이 그의 마음에 쓴 물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나오미라는 이름조차도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쓴 물이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오미와 같은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가 나오미와 같은 사람을 심방했을 때, 그에게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으며 그에게 어떻게 기도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만일 목사가 이런 집에 심방 가서 괜히 상투적인 말, 진부한 말이나 하고 온다면 그 사람은 목회경험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말로는 나오미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오미를 위로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오미와 같은 사람을 위로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전개하실 때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나오미와 같은 사람에게 보여주어서 나오미로 하여금 당신의 삶 속에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Let God, Be God."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해야 합니다. 

왜 제가 설교하다가 간혹 영어를 쓰는지 저도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첫 번째 이유는 아마도 제가 영어권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 이유는 영어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언어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영어라는 언어는 벌써 천 오 백 년 동안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한국어는 이제 백 십 년 남짓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를 정확하고 잘 전달할 수 있는 도구로서 영어는 이미 오랫동안 사용이 되었기 때문에 그 면으로 발달했습니다. 

풍성한 표현이 있습니다. 아직도 한국어는 그 면에 있어서 발전해야 될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누수되는 것이 많습니다. 마치 수도관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 것처럼, 인간언어의 한계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신다면 성경을 한문으로도 읽으시고, 일본어로도 읽으시고, 영어로도 읽으셔서 누수되는 것을 가급적 다시 찾을 수 있어야 과연 이 성경 속에 얼마만큼의 보배가 담겨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제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을 위로하실 것이라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는 그것이 없는 것 같은데 끝 절에 있습니다. 22절에 보시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자, 여러분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보리밭을 지나가는데, 보리가 무르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고 추수를 시작하려고 일꾼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제 나오미와 룻이 그 곁을 지나갑니다. 

이들은 가난합니다. 배고픕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추수밭과 두 여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밭은 남의 밭이고 이 밭은 남의 수확인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러나 여러분 이 밭과 나오미와 룻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룻이 그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의 눈에 뜨이게 될 것이고, 보아스가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것이고, 룻은 이 추수밭 주인의 부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직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이 밭을 룻과 나오미를 위해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그 밭을 그냥 우연히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무지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은혜니, 섭리니 남의 얘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게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입니다.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2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1990년대에 우리 나라에는 유난히 사고가 많았습니다.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고. 왜 처음부터 잘 짓지 못했을까? 만약에 짓는 사람이 '이 다리는 장차 내가 지나갈 다리다.'라고 생각하면서 지었다면 더 잘 지었을 것입니다. 

백화점을 지으면서 '이 백화점은 장차 내 아내와 딸이 가서 돈 쓸 곳이다.'라고 생각했다면 좀 더 잘 지었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낍니까? '이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길을 가다가 명문 대학교 캠퍼스를 지나갈 때 '저 학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장차 우리 아이가 저 대학의 장학생이 될 지 모른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장차 우리 손주가 저 대학의 총장이 될 지 모른다.'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동네의 아파트 재건축을 할 때 '길도 막히는데 왜 저런 고급 아파트를 또 짓느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장차 우리가 저 아파트에 입주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딸이 시집갈 때 저 아파트를 우리가 사서 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룻과 나오미가 보아스의 밭을 지나가면서도 그 밭이 이후에 그들의 밭이 될 줄은 몰랐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믿음만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합니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레스토랑 체인점 중에 "T. G. I"라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녀들과 가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T. G. I"가 무슨 말의 준말인 줄 아십니까? "Thank God It's Friday.(주말이 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의 준말입니다. "Thank God"을 줄여 "T. G."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은 주말이 온 것만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식당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주말이 온 것보다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릅니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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