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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려온 도끼 (왕하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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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온 도끼 (왕하 6:1-7)

 
엘리야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만 남았다, 남들은 다 변절했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나 한사람뿐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나 홀로 집에, all by myself. 또 다니엘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 홀로 사자 굴에 던져졌다는 생각입니다. 혼자 믿음을 지키려면 이렇게 된다, 피해의식, 또 불리하다, 친구도 없고 불이익을 겪는다, 솔로로 믿음을 지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적대적인 환경, 피해의식, 고독, 그리고 불리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단적인 생각입니다. 엘리야는 과대망상증적인 증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 이외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칠천 명이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경험도 극단적인 것이고 예외적인 것입니다. 서울 시내에는 사자가 없습니다. 그런 일에 처해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솔로로 혼자 믿음을 지키는 것의 장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 집에 있었을 때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언급이 나오기 시작했느냐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이런 말씀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에게는 솔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축복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아버지 집에 있었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거나 실감하지 못했는데 애굽에 홀로 떨어지게 되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고 그것이 대체적으로 유익하고 소득이 많았어요. 그래서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고 자기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전제하고 있는 것은 요셉 자신이 애굽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타 종교 ․ 타 문화 ․ 남의 나라, 아무도 지켜보거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 환경에 던져졌지만 요셉은 함부로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았어요. 증거가 무엇이냐면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을 때 요셉은 내가 어찌 하나님에게 득죄하겠느냐며 거절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신실함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요셉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유행에 약합니다. 사람은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충분한 숫자의 사람이 무엇을 하면 거기에 이끌려 가기가 쉽습니다. 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의 간증이 효과가 있느냐. 사람들에게 ‘저런 유명한 사람도 교회에 다닌다면 나도 교회를 다녀야겠구나.’ 이런 반응을 낳게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주위에 여러 사람이 교회에 다니거나 신앙에 열심을 내면 그것을 따라할 가능성이 그만큼 많아집니다. 거기에도 장점은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친구든 가족이든 스승이든 간에. 

그러나 문제는 남에게 이끌려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환경이 바뀌었을 때 그것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듣지요. 미국에 유학할 때는 교회를 다니고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열심을 내다가 귀국하면 안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왜 그렇습니까. 환경에 이끌렸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환경에 이끌려서 교회에 간 것이고 한국에서는 환경에 이끌려서 교회에 안 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 보니까 고등학생 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부모님을 따라서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가 대학에 가서 기숙사생활을 하는 순간부터 교회를 안 다니는 젊은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방학이 돼서 집에 오면 또 교회에 나가요. 신기한 것입니다. 왜 혼자 있을 때는 교회에 안 다니고 자기 집에 왔을 때는 교회를 다니느냐. 자기의 믿음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직 자기 스스로 영적으로 서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유심히 보니까 학생들 중에 크리스찬이 꽤 있습니다. 그건 통계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일 아침에 일어나보면 캠퍼스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아예 아침을 먹으러 내려오는 학생이 없어요. 식당도 조용합니다. 그 말은 교회를 다니는 학생이 적다는 얘기입니다. 왜 그렇게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적으냐. 귀찮으니까, 토요일 밤에 늦게까지 놀았으니까, 늦잠을 자니까, 깨워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같이 교회 갈 사람이 없으니까. 누가 교회가자고 깨워준다면 모르지만 자기 스스로 일어나서 주일 아침에 정장을 차려입고 교회를 갈 정도면 그건 대단한 크리스찬입니다. 그 자체가 대단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스스로 서는 법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자기의 믿음이 아니고 남의 믿음을 의지하고 살아왔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선지자 생도가 얼마나 도끼질이 서툴면 나무를 하다가 그 도끼를 물에 빠뜨립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기 도끼가 아니고 남에게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남에게 빌려온 도끼를 쓰다가 그나마 그것을 물에 빠뜨린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집을 살 때도 돈을 빌려서 사고 사업을 할 때도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하고 신앙생활도 남의 믿음을 빌려서 할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내 것에 대한 확신이 별로 없습니다. 내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내 믿음, 내게 주신 은혜, 나의 갈 길, 나의 사명, 나의 믿음. 이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로스쿨 졸업을 앞두고 일자리를 찾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인생은 일사천리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졸업하면 취업을 하면 되는 것이고 취업을 하면 거기에서 내 직장이 정해지고 승진하고 돈을 벌고 결혼하고 다들 그렇게 사니까 저도 그렇게 살면 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어려울 게 뭐가 있을까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취업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면접을 하면서 제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몇 가지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 미국이 좋은 나라이고 저에게 좋은 공부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 여긴 내가 설 땅이 아니다, 그걸 깨달았고 또 하나는 이 직업은 내 직업이 아니다. 남 보기에 좋고 보수도 좋고 뭐 좋아 보이지만 이건 내 일이 아니다, 내 길길이 아니다 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건 굉장히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준비는 학위를 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좀 더 냉정하고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준비가 됐는지 안됐는지를 내 자신은 모를지라도 남들은 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들이 나를 볼 때 내가 정말로 준비가 된 사람인지 남들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먼저 제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제 자신도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느낌이었는고 하니 남의 옷을 빌려 입고 멋을 부리려는 것과 같았어요. 남의 옷. 남의 옷을 빌려 입고 멋을 부리려고 하니까 잘 맞지 않지요. 마치 오늘 본문에 남의 도끼를 빌려다가 나무를 하는 선지자 생도와 같은 것입니다. 

남의 것, 지금까지 남의 인생을 살았어요. 남이 하는 말, 남이 좋다고 하니까, 남들 보기에 좋은, 남들에게 자랑하기 쉬운, 남의 생각을 좇아가서 살았는데 정작 제 삶을 찾으려고 하다보니까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뭘 해야 되고, 내가 갈 길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고, 또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여기에 대해서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지만 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 길을 떠나서 신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제가 할 일 또 제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찾아 나서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간다고 자동적으로 그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많은 성도님들은 좀 신앙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신학교가, 신학교 교수들이 신학을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신앙을 심어주지는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학교를 가면 신앙이 자랄 줄로 생각하는데 신학교는 어디까지나 신학을 수업시간에 가르쳐주는 곳이지 신앙은 각자 챙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 있는 신앙까지도 까먹는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성도님들이 자기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 신학교에 간다는 것을 전혀 장려하지 않습니다. 아예 저에게 추천서 써달라고 오지를 마세요. 정말로 여러분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제가 그것을 인정하겠지만 그게 아니고 시간이 남고 뭔가를 해야 되겠고 신앙을 자라나게 하고 싶기 때문에 나도 한번 신학교에 가겠다, 장려하지 않습니다. 

신학교는 그런 사람들 가는 데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의 선지자 생도라는 사람도 오늘날로 치면 신학생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생도가 나무를 하는데 남의 도끼를 빌려다 하고 그리고 그나마 물에 빠뜨린 것처럼 자기의 믿음이 없는 사람이 섣불리 뭐를 하다가는 그것마저도 잃어버립니다. 신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자라는 게 아니고 믿음은 각자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부교역자로 여러 교회를 섬겼지만 부교역자의 경험이 자동적으로 영력을 얻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걸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흉내 냈습니다. 스승들을 흉내 냈습니다. 그분들의 스타일, 그분들의 메시지, 흉내 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다윗이 사울왕의 갑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안 맞습니다. 너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왕의 갑옷을 포기하고 평소에 자기가 입던 옷을 입고 물매를 들고 나가서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각 사람이 발견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과 내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과 내게 주신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통해서 그것이 사울의 갑옷처럼 멋있고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내게 있는 것은 소박할지라도 그것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하루아침에 깨닫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저도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은사, 하나님이 저에게 허락하시는 일, 이것을 찾아야 했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기도회를 인도할 때의 트레이드마크가 찬송부터 하는 것 아닙니까. 아마 여러분은 목사님이 오늘 부를 찬양을 정해왔나보다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정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 떠오르는 곡을 부릅니다. 안 떠오르면 안 부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떠오르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가 캐나다에 살 때 새벽기도를 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방법입니다.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고 누구를 흉내 내는 게 아니에요. 제가 스스로 새벽에 기도하면서 찬송하면서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법을 터득한 거예요. 그걸 목회현장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을 위해서 안수기도를 할 때 예언하는 것, 예언을 자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누구를 흉내 내는 게 아니에요.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하고 안 떠오르면 안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말씀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건 제가 목회하면서 목회현장에서 터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되더라, 그렇게 하니까 교인들이 은혜를 받더라, 그래서 이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방법이구나! 그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거기에서 메시지를 추출하는 방법도 그것도 남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고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요즘말로 필링이 꽂히는 대로 그러나 그게 그냥 아무렇게 나 꽂히는 것이 아니고 신학적으로 옳고 또 저의 그동안의 믿음을 반영하고 또 성도들에게 쉽게 이해할만한 방식으로 거기서 깨닫는 것을 가지고 메시지를 만들어서 성도님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성경을 접근하는 방법이 독특하다고 말씀들 하시는데 당연하지요. 왜냐하면 남의 메시지를 흉내 낸 게 아니니까. 어디서 책을 읽어서 전달하는 게 아니니까. 제가 성경을 읽고 거기에서 깨닫는 것으로 메시지를 만드니까 당연히 독특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단은 아니에요. 지극히 성경적인 것이고 믿음의 뿌리와 교리와 신학의 뿌리에서 그것이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제 자신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제가 보기에도 교리적으로 위태하다 그러면 그건 신뢰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신학적으로도 건실하고 그리고 인간의 경험과 상황을 제가 평소에 스스로 이해하는 것보다도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깨달으면서 아, 이건 내 생각이 아니고 이건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다 이렇게 확신하고 전하게 되는 그게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메시지를 얻어서 전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은혜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하시는 일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사명이요, 소명이요,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길이요, 그것이 제가 갈 길이요, 제가 해야 될 일이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결국 사람은 자기의 믿음을 가지고 영적으로 서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를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당연한 것이고 나에게 유익한 것이고 이것은 누가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내가 이것을 함으로 오히려 남을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전에는 남이 나를 이끌어 주었지만 이제는 내가 이 일을 하며 많은 사람을 이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장막에 내가 거하기보다는 나의 장막에 사람들이 거하게 하는 그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 개인주의적이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개인주의는 아니고 개인적인 것은 맞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끼는 공용의 도끼가 아니에요. 아무나 갖다 쓸 수 있는 도끼가 아니고 임자가 있는 도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면 남의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자기 도끼가 아니고 남의 것을 빌려서 자기 것처럼 쓰다가 그것을 물에 빠뜨린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 선지자 생도와 같은 입장에 있는 분이 계실지 몰라요. 지금까지 남의 믿음을 빌렸는데 그나마 물에 빠뜨렸어요. 남은 게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째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건 내 것이 아니고 물에 빠뜨렸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또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도움을 구해야 됩니다. 건져 달라, 그게 바로 기도입니다. 
셋째는 도끼가 떠올랐을 때 내 손을 내밀어서 취해야 됩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는 그때부터는 내 것이 됩니다. 내 손으로 취했기 때문에 이제는 이것이 내 경험이고 이것이 내 믿음이고 이것이 이제부터는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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