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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 : 보는 것을 보는 눈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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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 보는 것을 보는 눈 (눅 17:11-19) 

< 들어가는 말씀 > 

제가 미국에 가고 얼마되지 않아서,  쇼핑을 하러 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쇼핑을 하고 있는데,  방송이 나오면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객서비스 센터에 갔더니만, 제 지갑을 주면서, 이 지갑이 네 지갑이냐,, 하면서, 누가 주워서 여기 맡겼다고 하면서 건네 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지갑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래서 잃었던 지갑을 다시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지갑 안에 여러 가지 신분증과 돈과 신용카드와 같은 중요하고 값진 것들을 넣어서 다닙니다. 그러다가  지갑을 잃어버리면 큰 일이 나죠? 우리 삶에 있어서 감사는 바로 지갑과 같습니다. 감사 안에 많은 소중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감사라는 지갑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오늘 감사주일인데요, 오늘 감사주일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감사라는 지갑을 다시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감사는 보는 것을 보는 눈이다 > 

I. 먼저, 오늘 본문말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3-24절에 보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에서 앞의 “보다”와,,  뒤의 “보다”가, 같은 "보다"라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앞의 “보다”는 시각적으로 보는 것을 말하고, 뒤에 “보다”는 '의미를 본다,' 혹은,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저도 피카소의 그림을 눈으로 보기는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릅니다. 미술작품을 보는 눈이 없는 것이지요. 들에 핀 풀 한 포기, 파란 하늘을 우리가 보기는 해도, 그 속에서 생명의 신비를 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은 또 다른 눈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는 이 말씀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정말 누구인지를 아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인데요, 우리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본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이 나병환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했습니다. 15절에서,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과, 또 고침을 받고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모두 보는 눈이 특별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보셨을 때, 그들을  보시는 눈이 보통 사람들이 보는 눈과 달랐고,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한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치유를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먼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II. 먼저, 감사는 내게 일어난 일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넓은 문액 안에서 보면, 17장 5절에서 시작합니다. 

1) 17장 5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고침 받고 돌아와 감사한 나병환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따라서 보다 넓은 문맥안에서 본문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고 있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모두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17장 5절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그렇게 된다" 하시면서, 그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예를 , 두가지로 보여주는데, 그 첫번째가, 무익한 종의 비유이고, 두번째가, 오늘 본문은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먼저, 무익한 종의 비유를 한번 봅시다. 종이 밖에 나가서  종일 뼈빠지게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피곤하다고 쉴 수 있느냐? 집에 오면, 다시 주인을 수종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수고하더라도, 누가 종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나? 이렇게 수고를 다 한 후에, 종이 하는 말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예가 바로 이 무익한 종입니다. 

그런데 이 무익한 종의 이야기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사실 이것은 감사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무익한 종의 삶의 자세는 그것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그것은 그 종의 마음에 근본적으로 감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늘 이런 무익한 종의 자세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갈 때에, 한량없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무익한 종의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 -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는 사건인데요, 열 명이 고침을 받았지만, 한 명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나병환자를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면서, 그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감사하는 마음을 보시면서,, 믿음이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무익한 종의 이야기와 나병환자의 감사의 이야기는 모두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모두 감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2.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감사하는 생활은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보통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서,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라는 수식어들을 붙이는데, 믿음에는, '믿음의 역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기우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감사가 믿음에서 피어나는 꽃이기에, 감사의 생활에서도  이런 믿음의 역사가  그대로 일어납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녀가 하도 말썽을 부려서, 늘 아들만 생각하면 속상하고 불평이 쏟아져 나왔답니다. 그래서 한번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막 하소연을 했답니다. 그러자  마음에 음성이 있기로, '그렇다면 네 자식이 없었으면 좋겠느냐' 하더랍니다. 그 때 목사님은 얼른 깨닫고는 '아닙니다. 귀한 아들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다음부터 아들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고,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니까, 그때부터 아들이 변화되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달라지는 기적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믿음으로, 기도해서 물리적인 환경을 바꾸어야 신앙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 환경을 보는 눈이 바뀌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불평이 아니라, 감사한다면, 그 감사로 인해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병들고, 내 사업이 망하고, 자녀가 대학시험에 떨어지고 했을 때에, 불평과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한다면, 병도 이길 수 있고, 우리의 눈이 열려서 더 좋은  길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에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하셨는데, 감사는 감정에 의존하는 무엇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께 부르짖는 것도 믿음일 수 있지만, 더 큰 믿음은 - 칭찬받는 믿음은,, 주님께 감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거기서 육신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분량이 얼마이든지 간에,  감사하는 삶으로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라도 산을 옮기는 그런 믿음의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있는 자가 감사할 수 있을까요?)
 

III. 감사는 내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감사는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뻐하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누가는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18절에 보면,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왜 나머지 아홉 명은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했을까요?  

병고침을 받은 나머지 아홉 명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정말 저주스러운 병이었던 나병이 고쳐진 것에 대해서 너무나 기뻐했을  것입니다. 아홉명의 고침받은 유대인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치유가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그거는 당연한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비가 온 후에 밝은 햇빛이 나올 때에, 기분이 좋지만, 그렇지만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로서 혜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그걸 누릴/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감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은 사마리아 이방인으로서,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은혜를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고, 주님 앞에 나와서 특별히 감사의 사례를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귀신들린 자신의 어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여인을 퉁명스럽게 대하면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대답하기를,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주시기를 구했을 때에, 예수님이 그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5) 이처럼 감사는 그것을 은혜로 아는 자, 다시 말해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것임을 아는 자가 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도 내게 일어난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없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당연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누릴 자격이 있어서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폴 브랜드 박사는 나병에 대한 권위자로서, 미국 루이지애나의 나병환자 재활원의 원장으로 매우 이름난 사람입니다. 그가 하루는 출장을 가서 호텔에서 양말을 벗는데, 발 뒤꿈치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항상 나병환자를 대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병의 첫 증상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순간적으로 혹시 자기가 나병이 전염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일어나서 핀을 찾아서, 자신의 복숭아뼈 밑부분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감각이 없었습니다. 더 깊이 찔렀지만 피가 나는데도 감각은 없었습니다. 나병에 감염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순간, 폴 박사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병환자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인생을 머리에 그리면서, 가족과 떨어져서 버림받은 인생을 살 것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서,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했을 때에, 다시 한번 어제 핀으로 찔렀던 복숭아뼈 밑부분을 푹 눌러서 쑤셨습니다. 순간 그는 기절할 듯한 아픔에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픔은 그야말로 축복의 고통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감각이 마비되었던 일은,, 장시간의 비행기와 기차여행으로 신경의 한 부분이 눌려서 발에 마비상태가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폴 브랜드 박사는 실수로 손가락이 칼에 베였을 때도, 그 고통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발목이 삐었을 때도, 절룩거리면서도 그 아픔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버섯을 잘못 먹고 몸에 경련이 일어나며 심한 두통과 구토가 일어날 때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소리쳤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시련도 감사해야 할 감사의 제목입니다. 우리가 시련과 고난에 대해서 감사한다면, 이 세상의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 세상의 그 무엇이, 그 누가 고난을 감사하는 우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것이 은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그 은혜와 사랑을 한시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은혜가,, 우리 감사의 원동력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맺는 말씀 > 

캐나다에 가면 어느 강가에 있는 도시에 조각공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 공원에 전시된 작품들은  특별한 점이 있는데, 모두 강바닥에서 건져 올린 폐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그 도시는 물길을 막고, 강바닥을 청소하는 행사를 벌이는데, 그 때 수거한 폐품들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서 그곳에 전시한다고 합니다. 강바닥에 버려진 폐품들이, 다시 찾아져서,  예술가의 손에 의해서 멋진 예술작품으로 바뀌어서, 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 아닐까요? 우리도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허망한 것에 굴복하여 살도록 버려진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값으로 우리를 구하시고, 멋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걸작품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감사의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나 이제 생명 있음을 주님의 은사요.... 하는 찬송처럼,  자격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가 정말 감사하지 않습니까?  "늘 울어도 그 은혜를 다 갚을 길 없어,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이 찬양이 정말 우리 믿음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추수감사 주일을 맞아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성도다운 모습을 다시 회복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그 삶에 정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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